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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머니, 오늘은 이런일이 있었어

난 할머니랑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내가 종알종알 이야기하면 할머니는 마늘을 까면서, 호박잎 줄기를 벗기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 그리고 이내 할머니가 경험하신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 맞장구를 치실 때면, 할머니가 내 뜻을 알아주셨구나 싶어 신이 났다. 시대는 다르지만, 할머니의 통찰을 느낄 수 있어 애틋한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평소엔 아침에 눈도 안 뜨고 밥을 먹는다고,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도 잘 까먹는다고 잔소리를 하셨지만, 잘하는 거 하나 있다며 이모들 앞에서 치켜세우셨는데, 쓰레기 분리배출을 아주 철저히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장마에 할머니는 베란다 창문을 닫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야, 그 네가 만날 떠드는 지구인가 그게 굉장히 중요한 거야. 우리 땐 전쟁이 나서 그랬는데, 이제는 환경이 망가져서 사람이 죽게 생겼어! 지금"

언젠가, 할머니랑 탈핵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야지. 쉽게, 공감이 가게. 난 자신이 있었다.

마침 에너지정의행동에서 핵 문제를 쉽게 알리기 위한 컨텐츠를 만든다고 했고, "쉽게"란 말에 냉큼 참여하기로 했다. 멋지게 만들고 싶었다. 음악도 넣고, 자료도 많이 찾아서 영상효과도 화려한 그런 엄청난 영상을 기획했다. 예산이 부족했다.

그럼, 쉽게만 설명해보자 싶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동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를 빗대어 영상을 제작해보려 했다. 하지만 역시 여력이 안 됐다. 결국, 활동가들이 직접 출연해서 내용을 설명하는 영상을 찍기로 했다. 김이 빠져 나는 촬영 당일까지 별로 신나지 않았다. 그렇게 형식이 정해지고 막상 원고를 쓰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직도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를 가지고 투쟁을 하는 거야? 2016년 공청회에서도 주민들이 그렇게 반발을 했는데 아직도 해결을 못 보고 있다니. 아니, 그때야 친원전 정부였다 쳐도 지금은, 탈핵하겠다는 정부가 아직도 방법을 마련하지 못한 거야?

#2 그게 고준위였나요 아니면 중저준위였나요?

영상은 총 3편으로 구성하기로 하고, 1편은 탈핵 기초를 주제로 했다. 나는 영상 마무리에 "핵 문제는 지역 간에도 세대 간에도 결코 정의롭지 못한 특성도 있다"는 이야기를 넣자고 했다. 굉장히 멋있는 결말 같았고 완성도가 높아질거라 생각했다. 
 
에너지짜잔 촬영당일, 출연자들과 함께 관악 FM에 모여서 마지막으로 원고를 보며 연습을 했다.
▲ 에너지짜잔 촬영당일 회의중 에너지짜잔 촬영당일, 출연자들과 함께 관악 FM에 모여서 마지막으로 원고를 보며 연습을 했다.
ⓒ 에너지정의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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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은 그간 있었던 핵폐기장 투쟁의 역사를 주제로 했다. 평소 같으면 다 지난 옛날 투쟁을 되짚는 일에 고개를 절레절레했겠지만, 여태껏 해결방법을 못 찾았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뒤져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면도, 굴업도, 부안 위도 사례를 찾아봤다.

굴업도는 부지를 선정한 뒤에 활성단층이 발견되었고, 안면도에서는 주민들에게 설명이 없이 추진되다가 아홉 시 뉴스를 보고, 신문을 보고 자기 집 앞에 핵폐기장이 들어선다는 걸 알게 된 주민들도 있었다. 부안은 군수가 군 회의의 의결을 두어 시간 앞두고 독단적으로 갑자기 기자회견을 열어 핵폐기장을 유치신청을 내기도 했다. 지금은 말도 안될 일들이 당시에는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당연히 주민들은 반발했고 그렇게 핵폐기장 논란은 지역 간의 갈등을 부추긴 결과로, 경주로 귀결됐다. 그런데 경주는 중저준위 핵폐기물만 처분하는 곳이었다. 그럼 여태껏 정부가 부지 선정했던 지역은 고준위를 지으려고 했던 건가, 중저준위를 지으려고 했던 건가? 오랫동안 탈핵 활동을 했던 활동가에게 질문했다.

"굴업도, 안면도, 부안 위도 거기에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을 지으려고 했던 거에요, 아니면 중저준위만 처분하려고 했던 거에요?"
"아 그게 당시엔 그런 구분이 없었어요…."
"그럼 고준위 핵폐기물을 중저준위 핵폐기물이랑 같이 묻으려 했던 거에요?"
"예. 그냥 핵폐기장이었어요. "

세상에. 10만 년 동안 방사능의 세기가 겨우 절반으로 줄어드는 그런 무시무시한 폐기물을 이 땅 어딘가에 묻어버리고 끝내려고 했다니. 비과학적이고, 비민주적인 절차에 어울리는 야만이었다. 불과 30~40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이라니 끔찍했다.

*핵폐기물은 그 폐기물이 내뿜는 방사능의 세기에 따라, 상대적으로 방사능이 적은 중저준위 핵폐기물과 고준위 핵폐기물로 나뉜다. 핵발전소에서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장갑, 망치와 같이 방사능에 노출된 도구 같은 것들을 중저준위 폐기물이라 하고 그 폐기물에서 나오는 방사능의 세기가 반으로 줄어드는데 약 300년 정도 걸린다고 본다.

고준위 핵폐기물은 핵발전소에서 사용하고 난 폐핵연료로, 방사능의 세기가 굉장해서 그 앞에 사람이 몇 초만 서 있어도 사람이 사망한다. 고준위 핵폐기물의 방사능의 세기가 반으로 줄어드는 기간은 약 10만 년으로 중저준위 핵폐기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3 왜 핵폐기장을 왜 서울에 지어야만 하는 걸까?

현재 정부는 고준위 핵폐기물의 처분에 대해 시민들과 함께 공론화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목소리는 제한적으로만 반영이되었고, 너무나 졸속으로 추진되어 제대로 된 공론화라는 말이 무색해지고 있었다. 공론화가 맥스터라는 임시 핵폐기물 저장시설의 추가건설 근거로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었다.

3부는 고준위 핵폐기물 공론화 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를 섭외했다. 현장감 있고 좋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그 활동가는 공론화가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는지, 이후에 추가로 맥스터를 지을 것이라는 우려는 어떻게 나온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영상의 도입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핵폐기장이 서울에 지어야 한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요?"
"아 서울에 짓는다면요?"
"아니 서울에 지어야 한다고 하면요."

속으로 생각했다, ' 왜 저 활동가는 서울에 지어야 한다고 표현하지? 전혀 상상이 안 되는데? 만약에 서울에 짓게 된다면 서울에 사는 나로써는 당연히 싫겠지만, 아니, 지어야 한다고? 누가? 그걸 왜 서울에?'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다시 물어봤다.

"그런데 만약에 짓는다면이 아니라, 지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는 거죠? 왜 우리 동네에 지어야만 하는 거예요?"

"네, 핵폐기장을 지어야 하는데, 당신이 사는 지역이 어떻겠냐고 묻는 게 아니라, 그 동네에 지어야만 한다고 하면 어떨것 같냐고 물어본거에요. 예를 들면, 어차피 핵발전소도 있고, 임시저장시설도 있으니까 거기에 추가로 더 지어야 한다고 하는 거죠."

'그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월성핵발전소가 있다. 월성은 그곳의 옛 지명이다. 그리고 월성원자력환경관리센터도 있다. 이곳은 이름만 봐서는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잘 알기 어렵지만, 한국에서 발생한 모든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처분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들어오지 않는데, 그걸 처분하는 곳은 아직 우리나라에 없다(더욱 놀라운 건 아직 전 세계 지구 그 어디에도 없다).

다만, 핵발전소가 가동되는 이상 계속해서 다 쓰고 난 핵연료봉, 그러니까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도 계속 발생하는데, 이들은 발전소 부지 안에 있는 임시 저장시설에 쌓여가는 중이다. 그러니까 핵발전소가 있으므로 그 부지 안에 고준위 핵폐기물을 보관하는 임시저장시설도 있고, 이미 중저준위 핵폐기물 처분장도 있는 지역, 그곳이 바로 경주였다.

해당 지역주민들에게 만약에 우리 지역에 핵폐기장이 지어진다면? 이라고 단순히 가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경주와 인근 지역주민들에게는 이 모든 핵쓰레기가, 이미 나에게 온다고 결정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활동가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당신이라면 어떨 것 같은지를 물은 것이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눈 후 "지어야만 한다"는 의미를 받아들이게 되자, 나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이미 우리나라엔 핵발전소가 24개가 가동되고 있고, 핵발전을 시작한 지 벌써 약 50년이 다 되어가기 때문에 쌓여있는 핵폐기물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땅 어딘가에는 핵폐기장을 지어야 하는 건 맞는 얘기다. 거기에 동의하다 못해 하루빨리 이 위험한 폐기물을 처리할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 하지만, 결국 내 집이 아니라면, 누군가의 집 앞에 짓게 되는 것이었고, 나는 지금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 미안했다. 그런 쓰레기랑 함께 살게 한 건 바로 나였다. 한편으론 억울했다. 그렇게까지 핵발전소를 돌려서 전기를 만들어야만 한다고 내가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창피했다. 그동안 핵은 지역 간, 세대 간 정의롭지 않다고 쓰고 말했지만,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정의로운 척 한 게 들통난 것 같아 너무 창피했다.
 
핵폐기물을 던져놓고 한없이 미안해서 녹화를 하면서도 얼굴을 쳐다볼수가 없었다.
▲ 에너지짜잔 촬영당일 3편 녹화중 핵폐기물을 던져놓고 한없이 미안해서 녹화를 하면서도 얼굴을 쳐다볼수가 없었다.
ⓒ 에너지정의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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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네 사람들~ 지금 한국에 핵폐기장이 만들어지고 있대요!

예상대로 정부는 고준위 핵폐기물 시민 공론화를 서둘러 마무리 짓고 8월 31일 임시저장시설(맥스터) 7기의 추가건설 착공식을 진행했다. 오래전부터 정부는 핵발전소 부지 내에 있는 임시저장시설이 포화 되는 시점이 곧 올 거라며 여론을 압박했다. 이번에도 사업자와 정부는 월성핵발전소의 운영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기 위해서, 즉 쓰레기통이 가득 차서 발전소가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서둘러 임시저장시설을 지어야 한다며 지역주민들을 설득했다.

'아니, 쓰레기를 줄일 생각을 해야지, 무턱대고 쓰레기통만 늘리면 어떡하자는 것인가? 애초에 쓰레기를 안 만들 생각, 아니 적어도 줄일 생각도 없는 것인가? 이것이 탈핵하겠다는 정부인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활동가가 말했다.  
"주민들에게는, 최종처분 방법이나 처분장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시저장시설이란 사실상 주민들에게는 그냥 핵폐기장이나 다름없이 느껴지는 거죠." 

촬영을 마치고 나서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졌다. 한없이 미안한 마음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할머니, 나 너무 미안한데 억울해. 어쩌지?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거야?"
촬영을 마치며 나오는데 처음 영상을 기획할 때 가졌던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앞산에라도 올라 소리라도 질러봐야 할까?

동네 사람들, 지금 한국에 핵폐기장이 만들어지고 있대요, 동네사람들!

태그:#고준위 핵폐기물, #에너지짜잔, #맥스터, #공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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