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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6일,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이들 중 63명이 성인지 감수성 향상 교육 등 각종 교육과 직무훈련을 받고 목포교도소와 대전교도소에서 36개월 동안 대체복무 업무를 수행합니다. 그동안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해 활동해온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들과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제의 시작에 맞춰 병역거부 문제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는 것들과 대체복무제의 문제점과 개선점, 대체복무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기자말]
현실은 변함이 없고, 세상은 어제와 같고, 나는 이렇게 힘든데, 타인의 편안함은 허무한 기분만 들게 한다. 이 심리 상태에 한국 사회는 '박탈감'이라는 단어를 붙였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여기에 전체주의적 '연대 책임'으로 해결하려 했다.
 현실은 변함이 없고, 세상은 어제와 같고, 나는 이렇게 힘든데, 타인의 편안함은 허무한 기분만 들게 한다. 이 심리 상태에 한국 사회는 "박탈감"이라는 단어를 붙였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여기에 전체주의적 "연대 책임"으로 해결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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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초적인 평등만을 강조하는 한국의 징병제

한국에서 공정과 공평이라는 단어는 많이 오염되었다. 한국이 오랫동안 군사독재를 겪으며 전체주의와 군사주의가 익숙한 사회여서 그런지, 모두가 "단체 기합"이나 "연대 책임" 같은 단어에 너무 익숙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고통받고 있는데 바로 옆 타인이 고통받지 아니하는 것은 개인주의나 요행수로 인식되곤 한다. 현실은 변함이 없고, 세상은 어제와 같고, 나는 이렇게 힘든데, 타인의 편안함은 허무한 기분만 들게 한다. 이 심리 상태에 한국 사회는 '박탈감'이라는 단어를 붙였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여기에 전체주의적 '연대 책임'으로 해결하려 했다.

징병제도 하의 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1차원적이다. 물론 이는 그와 동시에 굉장히 선명한 이미지와 결과물을 형성해 낸다. 근대 이후 징병제가 가진 강제적 평등성은 그 자체로 '준(準)민주주의'적 성격이 있어서, 민주시민으로서의 탈계급성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실제로 군대에 들어가면 일반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나 가문 등을 (중략) 조금도 말하지 않고, 귀족 도련님이 노동자 상등병에게 따귀를 맞고 있다. 무엇인가 준데모크라시적인 것이 사회적인 계급차이에서 오는 불만의 마취제가 되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라고 이야기한다.(일본의 군대. 논형, 2005년) 

이런 일들은 한국군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농촌 출신 비정규직 선임병사가 언제 또 서울대 출신 후임병에게 지시와 간섭을 할 기회를 가져 보겠는가.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된 2020년의 한국에서 병역의 평등이란 더 말초적이라서, 모두 "불편한" 곳에서 "불편한" 잠을 자고, "불편한" 식사를 하며, "불편한" 월급을 받고, "불편한" 얼차려를 받으며, "불편하게" 감금당하는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그리고 이것에 의문을 품거나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라는 믿음을 거스르는 이단자가 된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군대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모두'를 강제로 징집하지도 않으며, 각자 임무와 목적에 따라 다른 방식의 군 복무를 하는 경우도 많으며, 적정 수준의 보상을 주는 국가들도 많고,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의 가정 형편에 따라 집과 가까운 곳에서 출퇴근하며 군 복무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초적인 평등만을 부여잡고 있다 보니 군 복무에 대한 논의는 계속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고자 화두를 던져도 언제나 군 복무는 하향평준화를 기본 기조로 논의된다. 현재의 징병제를 축소하거나, 선택적 징병제로 전환하거나, 모병제와 사회복무제를 병치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러자면 그 이전에 쌓아왔던 "불편한 군대"의 신화가 훼손되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어깃장을 놓는다.

하향평준화가 형평성의 기준이 되어버린 한국의 대체복무
 
종교나 비폭력·평화주의 신념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가 처음 시행된 26일 오후 대전교도소 내 대체복무 교육센터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 63명의 입교식이 열린 가운데 입교생들이 입교식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종교나 비폭력·평화주의 신념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가 처음 시행된 26일 오후 대전교도소 내 대체복무 교육센터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 63명의 입교식이 열린 가운데 입교생들이 입교식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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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한국의 대체복무제는 처음부터 합리성보다는 군복무의 하향평준화 기조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디자인되었다. 2018년 헌재의 병역법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 후, 한국 정부는 2020년에는 대체복무를 시행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직 기존의 징병제가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있는 상태에서 대체복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시점까지 한국 정부는, 특히 국회는 대체복무나 병역거부자의 인권에 큰 관심이 없었다. 몇몇 정치인들이 고군분투했지만, 입법 과정을 볼 때 인권은 현역 군인의 박탈감에 치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다 보니 대체복무제를 만들 때 주안점은 "어떻게 하면 대체복무자들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을까"가 아닌 "어떻게 하면 (거의 무급으로) 찬바람 맞아 가며 고생하는 병사들보다 더 가혹한 대체복무제를 만들 수 있을까"가 되어버렸다. 무한 불행 경쟁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고, 대체복무 도입 여론도 좋은 최고의 상황에서 세계에서 가장 긴 기간을 가진 징벌적인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상식적으로 따져 볼 때,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더 주고, 보급품이라도 하나 더 챙겨주면 '박탈감'이나 '형평성'을 논의할 필요가 없게 된다. 지금은 1950년대가 아니며,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노동은 그 자체로 무가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수해로 인해 우리 집이 부서졌는데 옆집은 무사하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집을 복구하면 될 일이지 옆집을 부술 것인가? 멀쩡한 옆집을 부숴놓고 두 가구 모두에게 천막을 던져 주면서 "자 이제 함께 풍찬노숙을 경험하며 평등하게 이 고통을 분담해 보자"라고 하는 게 과연 상식적일까.

대체복무제 도입을 논의할 때, 국방부가 만든 정부의 대체복무 법안은 현역병들과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2배의 복무기간과 합숙을 전제로 하는 제도를 명시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도 과연 형평성에 해당하는지 의문이 든다. 대체복무자들의 복무기간은 공중보건의와 같지만, 월급은 현역 육군병사와 같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 이상한 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어떠한 제도를 만들 때 형평성보다는, 이 제도를 통해 창출해 낼 수 있는 아웃풋을 고민하는 것이 정상인데 한국 정부는 사람에게 돈을 안 쓰는 쪽으로 궁리하던 버릇을 못 버리고 고통을 공유하는 방식을 고안해 낸 것이다.

징병이 공평하지 않다는 현실 먼저 바라봐야
 
종교나 비폭력·평화주의 신념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가 처음 시행된 26일 오후 대전교도소 내 대체복무 교육센터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 63명의 입교식이 열린 가운데 입교생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종교나 비폭력·평화주의 신념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가 처음 시행된 26일 오후 대전교도소 내 대체복무 교육센터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 63명의 입교식이 열린 가운데 입교생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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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실 병역조차도 별로 공평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다시 이야기해 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라 할지라도 노르망디의 오마하 해변에서 싸운 공수부대원과 후방의 본부에서 행정업무를 하던 비전투원이 똑같은 병역을 이행했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병역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특히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은 '강제적이고 보편적인' 징병제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한국군에서는 사고나 가혹행위로 죽을 수는 있어도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죽는 일은 거의 없다. 최전방 철책선을 만져가며 복무하는 병사와 북위 37도 이하의 기행부대에서 근무한 병사는 그 체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공정성을 논하기 이전에, 병역은 절대 공평하지 않을뿐더러 각자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모순과, 병역 이행 또한 각자의 특성에 따라 달리 이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애초부터 대체복무 이슈가 급부상했을 때 많은 사람이 이 인적 자원들을 어디에 어떻게 써먹어야 좋을지가 아닌, "그들이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합숙을 하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는 것부터가, 한국사회가 병역을 국방이 아닌 계도와 교화의 제도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쉽게 말해 병역거부자라는 반항아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군기를 잡을 방법이 생겼으니, 기왕이면 빡세게 굴려야 한다는 이야기 밖에 할 줄 모르는 사회인 것이다. 이제 21세기도 5분의 1 가량이 지났는데, 좀 더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는 없는 걸까?

[기획-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
① 총과 게임에 집착한 검사님, 그런 병역거부자는 없습니다 http://omn.kr/1q1cf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팀 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http://www.withoutwar.org/?p=16785


태그:#대체복무제 , #징병제, #양심적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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