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의 육중완 20대 무렵 육중완이 한 손에 마이크를 든 채로 환하게 웃고있다.

▲ 젊은 시절의 육중완 20대 무렵 육중완이 한 손에 마이크를 든 채로 환하게 웃고있다. ⓒ 백창훈

 
"보잘 것 없는 내 노래에 위안을 얻고 상처를 회복하는 이들도 있더라고요. 음악을 관둘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돈되지 않은 덥수룩한 머리.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목소리. 바로 밴드 장미여관 메인보컬에서 2인조 듀오 '육중완밴드'로 제2의 가수 인생을 시작한 육중완이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30일 전화 인터뷰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육중완은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자신의 고향인 부산으로 향한다. 한쪽 어깨에는 기타를 맨 채로. 그의 도착지는 부산진구 초읍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이다. 그곳에서 그는 소아암 환우를 위해 자선모금 공연을 펼친다.

"백혈병을 앓는 아동들을 지원하기 위해 2002년부터 모금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모인 돈은 지정기부 방식으로 매달 병원비를 후원하고 있죠."
 
달콤함의 이유

그는 본업 외에 부산에서 활동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 9명과 함께 '하눌타리'라는 자선 모금밴드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2001년에 결성한 이 밴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공연을 멈춘 상태. 이들이 지금까지 소아암 환우에게 기부한 금액만 해도 1억 4000여만 원에 달한다.

"정기적인 후원 덕에 완치된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죠. 이들을 위해 부르는 노래는 참 달콤합니다."
 
하눌타리 밴드의 기부방식은 이렇다. 먼저 공연으로 벌어들인 모금액은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에 전달한다. 재단에서는 480만 원이라는 일정한 금액이 도달하면 한 명의 환우를 선정해 매달 20만 원씩 2년 동안 지원한다.

처음부터 그가 선행 활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눌타리 원년 멤버였던 대학교 동아리 선배가 다른 목적으로 그를 끌어들인 것이다.

"처음엔 그 선배가 나를 옆에서 짐이나 드는 꼬붕(부하의 일본어) 정도로 생각하고 밴드를 같이하자고 부른 것 같아요. 밴드에 들어가자마자 무거운 물건이나 악기들을 옮겼거든요."
 
그러다 자선모금 공연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날 때쯤 나눔과 베풂의 진정한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그는 털어놨다.

"어느 날 편지가 한 통 왔어요. 우리가 지원한 소아암 환자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였죠. 읽어보니 우리 덕분에 자녀가 앓았던 암이 완치됐다며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어요. 뭔가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죠. 눈물이 났어요."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모금 공연 뒤로 육중완 씨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모금 공연 뒤로 육중완 씨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 백창훈

 
흔들리지 않는 산과 같이

이 일 이후로 그는 책임감을 느끼고 공연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노래를 부르다 맨 앞에 있던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눈망울이 빛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만이 아니었어요. 지금까지는 미처 몰랐는데 아이들이 제 공연을 정말 좋아하더라고요"라며 그는 그때를 상기했다. "아이들은 엄마 손을 졸라 천원, 이 천원을 받아낸 뒤 스스로 모금함에 돈을 넣기도 했어요."
 
그는 그동안의 봉사로 소아암 환자에게 오히려 얻은 게 더 많았다.

"왜 베풀수록 행복은 더 커진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진짜였어요. 그들로 인해서 좋은 기운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주는 음악을 통해 음악을 더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죠."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23세 때 바다창작가요제에 나갔다. 은상을 받고 자신의 음악 잠재력을 확신했다.

"동네에서 종종 노래 좀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다 내 실력을 테스트해볼 겸 '가니 마니' 라는 사랑 노래를 작곡해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죠. 거기서 좋은 성적을 거둬서 계속 곡을 쓰게 됐어요. 그때 떨어졌다면 아마 음악은 포기하고 지금쯤 장사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본격적인 가수 준비를 위해 28세에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생활비가 넉넉하지 않아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월세마저 부족해지자 2~3일 굶는 일은 다반사였다.

"돈이 없어 굶는 날도 많았지만, 음악을 한다는 생각에 그마저도 좋았어요. 얼마나 좋았냐면 결혼이나 미래 생각도 포기할 정도였어요. 나는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만나면 그것 외에는 안중에도 없어요."
 
KBS 밴드 서바이벌 예능 '탑밴드'에서 능청스러운 가사의 봉숙이란 노래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장미여관은 더티섹시 정규앨범 1집 <산전수전 공중전>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장미여관에 날개를 달아줬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 '오늘의 뮤직'에 '이 주의 후보작'으로 선정. 걸그룹 크레용팝과 함께 제5회 멜론뮤직어워드 핫트렌드상을 수상했다.
 
 
 20살 무렵 육중완이 자선모금 공연을 하던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살 무렵 육중완이 자선모금 공연을 하던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백창훈

 
그 후 육중완의 입담을 알아본 방송사들은 그를 예능 무대로 끌어당겼다. 2014년에는 <나혼자산다>, 2015년에는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에 참가해 무한도전 멤버 노홍철 씨와 '장미하관'이라는 팀을 꾸렸다. 예능 나혼자산다 출연에 대해서는 "그냥 재밌어 보여서 했어요. 평소 나를 남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거든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승승장구만 하라는 법은 없었다. '악플'이라는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나혼자산다에 나가고 악성 댓글이 심했어요. 더럽다, 못 산다, 못생겼다 등등. 처음에는 아주 힘들었죠. 하지만 깊게 생각해보니 이런 것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 보면 내 인생을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 다시 자신감이 샘솟았어요".

자신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말에 그는 '산'이라고 답했다. 산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보통 가수들은 '나는 음악 그 자체다'라고 말하긴 하던데. 나는 그런 대답이 조금 민망해요. 산이라는 대답도 아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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