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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죽은 전태일... '학삐리' 4남매 삶이 바뀌다(http://omn.kr/1qcrh)에서 이어집니다.

한 사람의 일생은 각 개인의 삶은 물론, 그가 겪어온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촘촘한 나이테로 쌓인 인생의 단면을 잘라보면 시대의 기쁨과 슬픔이 오롯이 담겨있다. 또 각 개인은 수많은 관계 맺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 인물의 뿌리를 당겨보면 셀 수 없는 인연과 관계가 함께 딸려 나온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을 퇴직한 후 현재 사단법인 한국사회정책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는 윤조덕 원장(70)의 삶을 들여다보면 질곡의 시대를 살아낸 사회상이 투영된다. 1970년대 유신 시절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이른바 장기 위장 취업을 한 윤 원장이 견뎌온 삶에는 시대에 맞서 대립하고 화해하고 쟁취한 과정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1969년 청년 윤조덕은 서울대 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한 후 서울고등학교와 학과 2년 직속 선배인 서경석의 영향을 받아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서경석의 인도로 대학 2학년 때부터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를 통해 당시 개인 구원에 비해 소수파였던 도시산업선교회의 사회 구원을 받아들였다. 

 
윤조덕 원장은 대학 3학년이던 1971년 6월 25일 김진수 열사의 장례식에서 인명진 위원장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참여, 부위원장과 호상을 각각 맡았다.
 윤조덕 원장은 대학 3학년이던 1971년 6월 25일 김진수 열사의 장례식에서 인명진 위원장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참여, 부위원장과 호상을 각각 맡았다.
ⓒ 윤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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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3학년이던 1971년에는 한영섬유(서울 영등포) 노동자 김진수 열사(1971년 3월 노동조합 활동 중 테러를 당해 5월에 사망했다. 6월에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에서는 인명진 장례집행위원 위원장과 함께 장례집행위원 부위원장과 호상(가족 이외의 상주 격)을 맡았다. 윤 원장은 훗날 모임에서 인명진씨가 "아이고, 윤조덕이 때문에 내가 이렇게 노동판으로 들어갔어"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

"대학교 입학 후 전태일 열사와 김진수 열사 등을 통해 노동현장의 문제를 직접 목격하며 마음을 굳혔지. 남은 삶은 노동운동에 전념하기로. 이를 위해선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했는데 대학생 신분으로 여기저기 발품을 많이 팔아선지 청계노조 역사를 다룬 책자에 내 이름이 기록되기도 했어."
 
당대 민주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른 청계노조에는 지식인들이 몰려들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장기표, 조영래, 윤조덕, 이우재, 한명숙, 장상환, 김세균, 이태복, 장명국, 이우정, 김근태, 이효재, 이재오, 김문수, 김세균, 최한배, 천상경, 문성현 등 이루 기록할 수도 없이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교실이나 외부 교육을 통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노조를 지원했다. 
- <청계, 내 청춘> (청계피복노조사 편찬위원회 기획, 안재성 씀, 돌베개, 2007. p228~229)

윤 원장은 대학 재학 중 공활(공장체험 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을 체험한 후 김근태(2011년 작고) 선배의 요청으로 김문수 등에게 공활을 안내해 줬다. 윤 원장은 "김문수가 훗날 자서전 성격의 책에 '윤조덕 선배를 통해서 노동운동의 똬리를 얹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교회, 민주화의 시발점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의 부당성과 비역사성을 비판하면서, 공정과 합법과 자유와 민주의 충만한 옥토가 되도록 힘을 다하여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 반독재 호헌 전국학생회’ 명의의 ‘비상 시국 공동 선언문’(1969년 9월 1일).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의 부당성과 비역사성을 비판하면서, 공정과 합법과 자유와 민주의 충만한 옥토가 되도록 힘을 다하여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 윤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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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공대 교문 밖, 박정희 이름이 적힌 현수막 아래 학생들이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다. 1969년 서울대에 입학한 윤조덕 원장은 "공대 밖 좁은 길에서 박정희의 3선 연임 반대와 교련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했었다"고 기억했다.
 서울대 공대 교문 밖, 박정희 이름이 적힌 현수막 아래 학생들이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다. 1969년 서울대에 입학한 윤조덕 원장은 "공대 밖 좁은 길에서 박정희의 3선 연임 반대와 교련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했었다"고 기억했다.
ⓒ 윤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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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원장은 당시 사회를 이렇게 회상했다.

"박정희가 대통령 2번 하고 3번째를 위해 헌법을 개정하려고 했을 때였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했어.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때 데모는 너나 나나 모두 하는 거였어."

그는 서경석과 자주 만나 대화했다. 윤 원장은 "서경석 선배가 집중적으로, 사회의식에 눈을 뜨게 했다"고 말한다.

"공대생 열 명이 자칭 '십인회'라는 명칭으로 모임을 자주 했지. 2학년 때부터 공대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서경석 선배도 있었지. 멤버들 대부분 가정교사를 했는데, 마치고 돌아오면 밤 11시쯤 됐지, 그때부터 중국의 신해혁명, 5·4운동,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운동 등을 논의했어. 서경석 선배가 지금은 굉장히 우향우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끊임없이 나에게 '민족에 대해서 생각을 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줬어."

윤 원장은 서경석의 영향으로 새문안교회에 나가면서 사회 의식에 눈뜨게 된다.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금과는 달랐다. 서경석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의 체질을 바꾸고 사회 의식화에 선구자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는 시대의 불빛이고 민주화운동의 성지였어. 가장 먼저 교회 청년학생운동을 시작했으니까. 서로가 의식을 계발하던 시기, 자연스럽게 사회의식을 깨웠지. 그런 면에서 나는 굳이 나누자면 학생운동권이라기보다는 교회 청년학생 운동권이라고 볼 수도 있어.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내에서 소수파였던 사회 구원을 받아들이고 치열하게 논쟁했지."

흔히 보수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교회가 민주화 의식의 요람이었다는 윤 원장의 이야기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다. 

"개인 구원이냐, 사회 구원이냐 굉장히 논쟁이 많았어. 나는 '개인 구원은 의미가 없다, 사회 구원이다'라며 치열한 논쟁을 했지. 그래서 학생운동 개별 그룹에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노동현장 지향적인 운동을 개척한 거야."
  
"청년들은 죽었는가?"라는 제목의 창간 메시지로 대학사회와 언론은 물론 “굶주려 쓰러진 무수한 우리의 이웃을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한 교회는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대역을 행하기를 원하는가?”라며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 서울지구 교회청년협회가 펴낸 ‘광야의 소리’ 창간호(1971년 3월 27일) "청년들은 죽었는가?"라는 제목의 창간 메시지로 대학사회와 언론은 물론 “굶주려 쓰러진 무수한 우리의 이웃을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한 교회는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대역을 행하기를 원하는가?”라며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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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민중민주(PD)나 민족자주(NL) 같은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윤 원장은 도시산업선교회의 영향을 받아 현장, 노동운동, 실천, 실습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후 사회 구원, 민중 신학 등을 개척하며 설교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제일교회 박형규 목사,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 기독교장로회 김재준 목사, 현명학 교수, 안병무 교수, 김용복 박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새문안교회 대학생회가 사회문제에 먼저 눈을 떴고 그 다음 제일교회 순이었지. 초기에는 사회 구원 쪽이 소수였지만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으며 사회 구원이 대세가 됐어.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는 유신 반대 운동을 했고, 73년 11월인가 횃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갔어. 유신 때 일어난 초유의 일이었지. 결국 74년 민청(학련) 때 새문안교회에서 7명이 잡혀가 징역을 살았어. 그때 학교에서 제적당한 학생들은 복학이 안 됐지. 그 학생들이 교회 청년학생 운동권의 한 그룹이 된 거야."

인천 지역 산업실태 견학, 노동운동 참여 전환점

윤 원장은 1970년 서울대 공대 써클 '산업사회연구회' 창립 멤버다. 올해 '서울공대 산업사회연구회 민주화운동사(안)' 50주년 기념편찬을 맡고 있기도 한 윤 원장은 "서울공대 산업사회연구회는 학생운동권 내에서 현장 체험, 공장체험 활동의 방향을 세운 획기적인 일을 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1970년 8월 여름방학 때 서울대 공대 '십인회' 멤버가 인천지구 산업 실태조사 견학을 갔어.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조승혁, 조화순 목사님이 산업선교 초기 개척자이셨어. 견학을 하며 빈민촌과 남녀 노동자들의 삶을 살폈지. 놀랍게도 이화여대 학생들 3명 정도가 이미 공장 실습을 한 달간 하고 있더군, 그중 한 명은 버스 차장을 했는데 후에 3년이나 지속해 기숙사 사감까지 했지. 공활이었던 건데. 그때만 해도 아주 초기 극소수 대학생들이 하던 단계였지."
 
“3선개헌 음모를 저지하기 위한 우리의 자랑스런 투쟁에서 자퇴를 강요당하고 학원에서 추방된 학우의 재입학을 위하여 우리는 진지하고 부단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이철, 서중석, 안병욱 등의 이름이 보인다.
▲ "1970년 4월 1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법과대학 학생회의 멧세지" “3선개헌 음모를 저지하기 위한 우리의 자랑스런 투쟁에서 자퇴를 강요당하고 학원에서 추방된 학우의 재입학을 위하여 우리는 진지하고 부단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이철, 서중석, 안병욱 등의 이름이 보인다.
ⓒ 윤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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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스며든 이들에게 감명을 받고, 곧바로 서울대 공대 써클 명칭을 '십인회'에서 '산업사회연구회'라고 개칭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을 때 학생운동권에서는 '학생운동이 노동의 현장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학생운동의 사회적 명제가 계기가 되어 산업사회연구회 회원 6~7명은 1970년 겨울방학 때 서울 영등포구 오류동에 자취방을 얻어 구로공단, 인천부두, 인천공업지대 등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그런 면에서 윤 원장과 써클 회원들은 전태일 열사 분신 직후 집단적으로 노동현장 체험을 시도한 개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 공대 산업사회연구회가 추진한 공활 체험은 하나의 프로그램이 됐고, 이후 2학년 때부터는 공장에서 한 달 현장체험을 하는 게 전통이 됐다. 대학 운동권 내에서 가장 먼저 노동현장 지향적인 써클로 자리 잡았고, 학생운동권 내의 방향을 잡아 준 획기적인 일로 노동운동사에 남았다.

다른 학생 운동권들은 노동현장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서울대 공대 산업사회연구회가 했듯이 집단적으로 공활을 가지는 못 했다. 그때 유일하게 찾아온 이가 후배 김문수였다. 71년 여름방학에 김문수를 비롯해 서울대 상대 써클 '이론경제학회'에서 4명이 김근태 선배를 통해 연락을 해왔다. 윤 원장은 이들에게 영등포산업선교회 조지송·김경락·안광수 목사를 소개해주고, 취업게시판과 전봇대 구인광고 등을 통해 구로공단과 문래동 공장지대에 취업하는 방법을 전해줬다.

"그런 것들이 계기가 돼서 김문수 등을 전태일 열사의 모친께 소개해줬지. 나를 비롯해 산업사회연구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친구들이 현장 지향성을 갖게 됐어."

- 3편 "태극기부대 핵심 서경석, 당시엔 학생운동 개척자였지"(http://omn.kr/1qcqo)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자료 제공 : 윤조덕 원장의 대학 동기 노태천씨


태그:#윤조덕, #김진수, #김문수, #인명진, #새문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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