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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저씨>를 보다 얼어붙은 장면이 있었다. 한 여자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장면이었다. 지금도 그 장면이 스틸컷처럼 생생한 걸 보면, 충격적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장면은 간간이 플래시백처럼 터지며 나를 진저리 치게 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최근에야 알아챌 수 있었다. 영화 속 그 끔찍한 장면에서 나는 아마도 찰나, 그 죽은 여자에 빙의되었던 것 같다. 무참히 살해당한 그(나)는, 슬펐고, 원통했고, 비참했다.

죽어도 싼 여자가 있다고 믿게 하는 장면들

영화 <아저씨>에는 나쁜 여자의 표상을 한 한 효정이 나온다. 그녀는 가난하고,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살고 있고, 딸아이를 방치한다. 클럽에서 일하고, 술 담배에 절어 있고, 마약을 한다.

어느 날, 그녀는 환금하면 거액이 될 만한 한 뭉치의 마약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되고, 이 우연 때문에 참혹히 살해당한다. 누아르 영화의 공식을 여자의 몸에 새기겠다는 듯 말이다. 당연히 그는 마약밀매 조직에 잡히고 선혈이 낭자한 복수의 희생양이 된다. 여기까지라면 어쩌면 참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시체를 관음하거나, 시체를 통해 서비스 컷이라도 제공하려는 저열한 의도가 아니라면, 시신이 참혹하게 훼손된 것도 모자라 나체여야 해야 하는 까닭이, 그저 잔인한 조폭의 복수 때문이라고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시체가 불온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잔인하게 훼손된 여자의 나체 시신이 재현하는 바는 성별에 따라 극렬하게 그 반응이 갈릴 것이다. 아마도 남자에게는 지저분하게 죽은 몸이라는 혐오를 남기겠지만, 여자에게는 극단적 공포를 새기게 한다. 여자는 필연적으로, 참혹하게 죽은 저 시체의 몸이 나일 수도 있다는 환영을 겪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자를 '공포로 길들이기'가 영화 속 죽은 여자의 몸으로도 진행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시체가 된 여자들> 스틸 사진. 영화는 죽은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문화적 집착을 범죄과학수사물을 통해 살펴본다
 다큐멘터리 영화 <시체가 된 여자들> 스틸 사진. 영화는 죽은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문화적 집착을 범죄과학수사물을 통해 살펴본다
ⓒ 시체가된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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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참혹한 죽음을 견딜 수 없는 여자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난 저 여자와 달라. 죽을 짓을 하지 않았어.' 마치 순응한 채 고분고분하게 살면, 죽음을 피할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말이다. 과도한 피해 의식일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요란한 알람을 울려 댄다. 지금 이 시간도 여러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어떤 여자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알리면서. 이런 여성혐오 살인을 종종 '묻지마식'으로 오해해온 것이라 속삭이면서.

죽을 짓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규명하기도 난해하지만, 죽인 것도 모자라 장기를 적출하고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채 내다 버려도 괜찮다고 믿게 하는 죽음, 혹은 이렇게 재현되어도 무방하다고 믿어지는 죽음은 어떤 것인가. 무엇 보다 죽어도 괜찮다 믿게 하는 대상이, 어째서 가난하고 행실이 좋지 못하고 쓰레기 모성이라 단정 지어지는 혐오 당하는 여자들인 것인가. 그저 우연인가?
  
극 중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한 여자는 대체로 나쁜 여자의 표상을 가지고 있다. 마치 나쁜 여자이기 때문에 징벌을 받았다고 믿게 하기라도 하는 양 말이다. 가난하고, 아이를 돌보지 않는 사악한 모성이고, 성적으로 문란하고, 떳떳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여자는 죽여도 되는 여자인 것인가?

참혹한 죽음의 자리로 나를 위치시키지 않기 위해 의식의 회피를 감행해도, 잔혹하게 당한 여자의 고통 앞에 상처받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살해당할 만큼 나쁜 여자가 아니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이 장면에서 빠져나온다 해도, 가일층 참혹해지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한 장면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이 현실을 목도하는 여자는 고통스럽다.
  
<아저씨> 이후로도 영화의 참혹한 여자 시체 재현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참혹하게 죽였다, 그것도 거의 발가벗겨져서. 지독한 영화마다 경쟁이라도 벌이듯, 여자의 시체를 거의 클리셰처럼 전시해댔다. 참혹히 죽은 여자의 시체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수술대에 살아있는 여자를 벌거벗겨 올려놓고 메스로 몸을 해부하듯 그어가며 고통을 관음하게 한 영화 <VIP>의 장면은, 극단적 페미사이드(Femicide·여성 살해)의 현장을 재현했다.
  
극의 장르가 액션이든, 누아르든, 공포물이든 가리지 않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여자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냈다. 참혹한 시체의 재현에 진저리치다 문득, 저 연기를 하는 배우는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14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인 다큐멘터리 <시체가 된 여자들>을 보면, 이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여자들의 죽음이 참혹하게 재현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시체가 된 여자들> 스틸 사진. 영화는 죽은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문화적 집착을 범죄과학수사물을 통해 살펴본다
 다큐멘터리 영화 <시체가 된 여자들> 스틸 사진. 영화는 죽은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문화적 집착을 범죄과학수사물을 통해 살펴본다
ⓒ 시체가된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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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된 여자들>은 크리스티 게바라 플래너건 감독이 만든 단편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시체 전문 배우'의 인터뷰와 여자 시체가 영화에서 재현되는 양상을 교차시키며 이어진다.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과학수사 드라마 CSI 시리즈의 시체 재현을 자주 대비시킨다. 수사물을 좋아하면서도 CSI 시리즈를 보지 못했다면, 관람객은 그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참혹한 가학을 견딜 수 없어 차마 드라마를 볼 수 없었다는 걸 말이다. 드라마는 이 시리즈에서 과학 수사물이라는 장르성을 등에 업고, 여자의 가공할 시체들을 널브러뜨리며 참으로 많은 여자를 가혹한 고통 속에 가두었다.

배우라는 말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시체 전문 배우'라면 그로테스크(grotesque)하다. 이를 스터트맨처럼 전문 영역이라 여겨야 할지는, '시체 전문 배우'의 증언을 들으며 영화 말미에 이르면, 전문이란 말이 인권침해와 동의어가 돼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시체 전문 배우'가 된 것도 시체 역이 어떤 환경에서 어느 정도 강도로 이루어지는지 제대로 된 설명조차 듣지 못하고 우연히 시작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정말 불안했"다고 한다. 몇 시간에 걸친 고된 분장에 종종 성추행을 당하기도 하고, 거의 모든 인력이 남자인 현장에서 남자들의 눈길을 받아내며 불안을 안고 대부분 나체로 몇 시간이고 촬영에 임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 계속 시체 배우를 하게 되었을 때도, "한 번도 전체 대본을 보여주지 않아 자신이 어떤 상태로 시체 역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명백한 인권 침해의 현장이었다.
  
영화는 극 속에 재현되는 시체의 양태를 함께 조명한다. 재현되는 각각의 시체는 어쩌면 이리도 각각 적나라하게 참혹할 수 있는 것일까. 최악의 고통을 당하다 죽은 몸의 재현인지라, 시체 역의 배우는 물속에 잠겨 호흡이 곤란한 채 고통을 감수해야 하고, 흙 속에 파묻혀 꼼짝할 수 없는 데다 일부러 기어 다니도록 배치한 벌레의 침입까지 참아내야 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로테스크한 시체의 재현을 해내기 위해, 시체 배우들은 매번 누구도 그의 안전을 돌보지 않는 환경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해야 했다. 인터뷰 속 '시체 전문 배우'는 현장에서 늘 "상자에 갇혀있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극 중 진저리치던 여자들의 시체를 떠올려 본다. 문득 그 시체 역을 했던 배우들의 고독과 고통, 그리고 시체와 한 몸이 되어 살해라는 극단의 소외와 고통을 함께 겪는다는 것이 어떤 감정일지를 상상해 본다. 누더기처럼 꿰매어진 영화 속 그를 보고 참았던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통곡을 삼키는 눈물이 흐른다. 죽은 몸이 하도 가엽고 무서워 공포로 질식할 것 같았던 그 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채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기만 속에 숨겨둔 애도를 이제야 보낸다. 영화 말미에 '시체 전문 배우'가 슬프게 던진 말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시체가 되어 보고서야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게 됐어요."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게시


태그:#<시체가 된 여자들>, #여성인권영화제, #페미사이드, #여성혐오살인, #시체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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