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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은 공주 곰나루(熊津)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百濟) 흥망의 꿈 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참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西西南)으로 밋밋이 충청·전라 양도의 접경의 골을 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潮水)까지 섭슬려 더욱 흐르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 너비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이름난 강경 벌은 이 물로 해서 아무 때고 갈증을 잊고 촉촉하다. 낙동강이니 한강이니 하는 다른 강들처럼 해마다 무서운 물난리를 휘몰아 때리지 않아서 좋다. 하기야 가끔 홍수가 나기도 하지만.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 = 市街地)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 초입부에 금강과 강경, 군산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다. 탁한 금강 물이 황해바다로 풀려나는 곳, 강폭이 양양한 남측 기슭에 군산이 자리하였다.
  
고정식 잔교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항구 모습으로 보아 1910년대 후반이나 192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군산항 모습이다. 화물전용 철차와 창고, 곳곳에서 일하는 조선 백성들 모습이 보이고 일본으로 반출해낼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 1920년대 군산항 고정식 잔교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항구 모습으로 보아 1910년대 후반이나 192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군산항 모습이다. 화물전용 철차와 창고, 곳곳에서 일하는 조선 백성들 모습이 보이고 일본으로 반출해낼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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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줄기는 끊기듯 이어진 듯하며 동쪽으로 어미 줄기를 찾아 뻗어가고 있었는데, 그 오른쪽으로는 들판이 널따랗게 펼쳐져 나갔다. 바다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그 벌판 가운데로 기다란 몸짓을 지으며 유유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금강이었다.

몇 백리인지 모르게 굽이굽이 흘러내린 금강이 제 몸을 바다에 풀어 맡기는 지점에서 오른쪽 포구에 장항이 자리 잡았고 왼쪽 포구에 군산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군산이 바다를 넓게 안고 있어서 예로부터 항구로 긴요하게 쓰였고, 수군 초소도 자리 잡아 오게 되었다. 일본이 군산을 개항시킨 까닭도 거기 있는데다가, 군산은 또 광대한 곡창을 뒤로 거느리듯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정래 소설 <아리랑>에서 군산의 입지와 간략한 역사, 개항 주도자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사진 우측 상단에 조선은행 군산지점(현 근대건축관) 지붕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923년 이후 모습이다. 또한 항구에 뜬 다리가 부두가 없어 1933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바다 쪽으로 물양장이 넓어지고 철로로 보이는 시설이 보인다. 역시 일본으로 실어 낼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 1920년대 군산항 모습 사진 우측 상단에 조선은행 군산지점(현 근대건축관) 지붕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923년 이후 모습이다. 또한 항구에 뜬 다리가 부두가 없어 1933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바다 쪽으로 물양장이 넓어지고 철로로 보이는 시설이 보인다. 역시 일본으로 실어 낼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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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왜 군산을 선택했을까

대규모 항만 입지조건은 몇 가지가 필연적으로 들어맞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접안(接岸, 배를 안벽이나 육지에 댐) 시설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심이 깊어야 한다. 그래야 큰 배를 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수간만의 차가 크지 않으면서 해저에 퇴적물이 없어야 한다.

호안(護岸, 강이나 바다의 기슭이나 둑 따위가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을 쌓을 수 있는 단단한 지반에, 파도에 침식되지 않는 곳이 유리하다. 인문지리 측면에선 수입이건 수출이건 주요품목이 생산·소비·유통되는 넓은 배후지역(대도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 군산은 대규모 항만으로서 입지여건이 썩 훌륭한 편은 아니다.

그런데 일제는 왜 군산을 선택하여 1899년 조선에서 여섯 번째로 개항 시켰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쌀' 때문이다. 값싸고 질 좋은 조선 쌀은 일제에 있어서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군산 배후엔 호남평야라는 쌀 생산 보고(寶庫)가 있었다.
   
19세기 말엽, 일본은 본격적인 군국주의 길로 접어든다. 이를 위해 군수산업 고도화를 도모한다. 무기생산을 위한 대규모 중공업과 에너지산업이 핵심이다. 이런 왜곡된 산업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저물가와 저임금을 유지해내야 한다. 물가 상승을 억제시키려면 입는 것(衣), 먹는 것(食)을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야만 한다.

이에 일제는 저가 면직물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해내고, 조선과 만주 등지에서 값싼 곡물을 대량으로 수탈해 간다. 이를 통해 물가를 억제시켜, 낮은 임금수준을 유지시키는 바탕을 형성한다. 이는 초과잉여가 발생하지 않는 기형적인 군수산업을 떠받치는 필수요소였다.

일제는 광활한 호남평야에 주목한다. 쌀을 실어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항구로서 입지여건이 열악한 군산을 선택한다. 궁여지책이다. 쌀을 싼값에 안정적으로 확보해야만 하는 일제로선 군산 개항은 매우 절실한 일이었다. 1차와 2차 축항공사 땐 바다 쪽으로 뻗은 고정된 잔교(棧橋, 부두에서 선박에 걸쳐 놓아 화물을 싣고 부리거나 여객이 오르내리게 만든 다리) 4기를 만든다.

하지만 이는 대량수송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일본인들이 고안해 낸 것이 다름 아닌 '뜬 다리 부두'다. 실제로 3차 축항공사에서 해안 넓은 면적이 매립되어 수만 평 부두야적장과 쌀 25만 가마니를 보관할 수 있는 대규모 창고가 생겨난다. 이와 함께 철로도 확장되어 화물용 철차 150량이 동시에 출발하는 수송능력도 갖추게 된다.
 
사진에선 뜬 다리 부두 5기가 확인 가능하다. 따라서 1933년 이후 군산항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좌측에 대규모 창고가 있다. 뜬 다리 부두 끝 폰툰에선 분주한 모습이 확연하다. 부두 곳곳에 지게를 진 사람들과 쌀이 쌓여있는 곳에 조선 백성들 모습이 보인다. 멀리 바다로는 대규모 기선이 떠 있다.
▲ 1930년대 군산항 사진에선 뜬 다리 부두 5기가 확인 가능하다. 따라서 1933년 이후 군산항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좌측에 대규모 창고가 있다. 뜬 다리 부두 끝 폰툰에선 분주한 모습이 확연하다. 부두 곳곳에 지게를 진 사람들과 쌀이 쌓여있는 곳에 조선 백성들 모습이 보인다. 멀리 바다로는 대규모 기선이 떠 있다.
ⓒ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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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간만 차이에 더 큰 폭으로 작동하는 뜬 다리 부두

군산항에 뜬 다리 부두가 만들어진 과정을 되짚어 보자. 가장 먼저 원 지반에 호안 석축을 쌓는다. 그곳이 펄이라면 안정된 지반이 나올 때까지 퇴적된 펄을 다 걷어낸다. 그래야 침하로 인해 호안이 붕괴하지 않는다.

옛 군산세관에 전시된 호안축조 도면인 '군산항 매축공사 호안설계도'를 보면 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펄을 걷어낸 자리에 큰 돌로 석축을 쌓고, 그 뒤는 콘크리트를 버무려 뒤채움 하였다.
 
군산항에 설치한 호안 설계도이다. 지형여건에 따라 각각 형식을 달리하여 호안을 쌓았음을 볼 수 있다. 호안 구축 방법이 각 단면도에 잘 나타나 있다.
▲ 군산항매축공사 호안 설계도 군산항에 설치한 호안 설계도이다. 지형여건에 따라 각각 형식을 달리하여 호안을 쌓았음을 볼 수 있다. 호안 구축 방법이 각 단면도에 잘 나타나 있다.
ⓒ 이영천_옛 군산세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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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이 만들어지면 해안선 배후부지에 야적장을 만든다. 그 다음 해구(海溝, 바다 밑 바닥에 난 개울이나 움푹하게 들어간 곳) 못 미치는 곳에 연결다리용 교대장치를 만든다. 강관말뚝을 깊이 박아 기초로 삼고, 그 위 고정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운다. 구조물에 위아래로 움직이는 교대장치를 만든다.
 
군산 내항에 남아 있는 3기의 뜬 다리 부두 중 하나(3호)다. 펄이 퇴적되어 옛 사진에서 보이는 뜬 다리 보다 그 높이가 훨씬 낮아 보인다. 교대장치에 설치된 추가 반쯤 펄에 묻혀 있고, 바깥 폰툰도 썰물이 되면 퇴적된 펄에 걸리곤 한다.
▲ 군산 내항 뜬 다리 부두 군산 내항에 남아 있는 3기의 뜬 다리 부두 중 하나(3호)다. 펄이 퇴적되어 옛 사진에서 보이는 뜬 다리 보다 그 높이가 훨씬 낮아 보인다. 교대장치에 설치된 추가 반쯤 펄에 묻혀 있고, 바깥 폰툰도 썰물이 되면 퇴적된 펄에 걸리곤 한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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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장치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높낮이가 유동적으로 변하도록 만든 조절장치다. 교대장치엔 엘리베이터 원리를 응용한 균형추가 매달려 있다. 밀물에 연결다리 교대가 올라가면 균형추가 내려오고, 썰물이 되면 반대로 작동하는 원리다.

교대장치에 움직이는 기다란 연결다리를 건다. 연결다리 한쪽 끝을 힌지(Hinge, 다른 부품에 연결된 장치가 상하로 움직이거나 회전할 수 있도록 하는 조임 장치. 뜬 다리 부두 힌지는 경첩 역할이 주된 기능 임)로 호안에 고정시킨다. 교대장치의 움직임에 따라 연결다리도 조수간만 차이에 따라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연결다리가 걸린 곳에 위 아래로 움직이는 교대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콘크리트 구조물 안쪽 굵은 쇠줄이 상부에 설치된 기계장치와 연결되어 있다. 이 쇠줄이 교대장치를 지탱시키며 조수간만 차이에 따라 오르내린다. 밖으론 추를 매단 쇠줄이 보인다.
▲ 교대장치 새부 연결다리가 걸린 곳에 위 아래로 움직이는 교대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콘크리트 구조물 안쪽 굵은 쇠줄이 상부에 설치된 기계장치와 연결되어 있다. 이 쇠줄이 교대장치를 지탱시키며 조수간만 차이에 따라 오르내린다. 밖으론 추를 매단 쇠줄이 보인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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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다리는 어지간한 트럭이 교행 할 정도의 상당한 넓이다. 연결다리 끝에 폰툰(Pontoon, 배를 묶어 놓기 위해 임시로 가설한 수상 플랫폼. 부교, 부잔교라고도 함)을 매단다. 폰툰 끝에 다시 뜬 다리를 매단다. 연결다리 폰툰과 뜬 다리도 힌지로 결구한다. 연결다리보다 뜬 다리가 조수간만 차이에 더 큰 폭으로 작동한다.
  
뜬 다리 부두로 향하는 호안 측에서 바라본 연결다리다. 힌지로 결구된 부분이 확인된다. 작은 트럭이 교행 할 정도의 넓이다. 밖으로 폰툰과 정박한 소향선박이 즐비하다.
▲ 연결다리 입구 뜬 다리 부두로 향하는 호안 측에서 바라본 연결다리다. 힌지로 결구된 부분이 확인된다. 작은 트럭이 교행 할 정도의 넓이다. 밖으로 폰툰과 정박한 소향선박이 즐비하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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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 다리 끝에도 폰툰을 이어 붙인다. 역시 힌지로 뜬 다리와 결구시킨다. 이 폰툰은 일종의 커다란 바지(barge, 시추선이나 화물선 따위의 옆에 머무르며 장시간 작업자들을 위해 거주 시설을 제공하는 배)선이라 보면 된다.

뜬 다리에 결구된 폰툰에 다시 수평의 연결다리를 가설해 또 다른 폰툰과 이어 붙인다. 폰툰은 화물이 하역되면 배나 육지 방향으로 옮기는 작업장 역할을 하던 곳이다. 뜬 다리나 폰툰은 바다 바닥에 앵커를 박아, 낭창한 여러 가닥의 쇠줄로 만든 계류사슬을 걸어 떠내려가지 않도록 달아맨다.

뜬 다리 부두로 인해 군산이 비로소 항만으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근대 군산은 이 뜬 다리 부두에서 연유하였음이 분명하다. 뜬 다리 부두는 군산이 존재하게 한 1등 공신이다.

대규모 항만시설이 들어서기에 지형적으로 부적합한 군산에 뜬 다리 부두는 혁명적인 시설이었다. 뜬 다리 부두라는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항구는 존재하지 못하였다. 외세에 의해 이식된 시설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가지는 특장마저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군산항엔 3,000∼4,000톤 급 배가 접안하였다. 배 길이가 85∼90m에 이른다. 이 긴 배를 접안시켜 효율적인 작업을 하려면, 뜬 다리 부두 2개를 한 묶음으로 연결시켜 운영해야 했다. 옛 군산세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군산항 수축공사 준공평면도'를 보면 뜬 다리 부두의 세세한 규격을 알 수 있다.
  
3차 수축공사가 있었던 1933년 도면으로 추정되다. 한 묶음으로 묶인 뜬 다리 부두 모습이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 도면에 당시 뜬 다리 부두를만든 세세한 규격이 기록되어 있다.
▲ 군산항 수축공사 준공 평면도 3차 수축공사가 있었던 1933년 도면으로 추정되다. 한 묶음으로 묶인 뜬 다리 부두 모습이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 도면에 당시 뜬 다리 부두를만든 세세한 규격이 기록되어 있다.
ⓒ 이영천_옛 군산세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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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나가있는 뜬 다리 부두 총길이는 55.3m다. 연결다리 끝에 매단 폰툰은 12.9m 정사각형이다. 이 정사각형 폰툰에 5m 길이 세 가닥 뜬 다리를 연결시킨다. 뜬 다리 끝에 20.4m×12.5m 폰툰을 매단다. 뜬 다리 부두는 한 묶음이다. 묶음을 구성하는 다른 뜬 다리 부두와의 사이에 20.4m×12.5m 의 폰툰 하나를 더 설치한다.

한 묶음 뜬 다리 부두에는 20.4m×12.5m 폰툰 3개가 연속하여 떠있는 형상이 된다. 뜬 다리 부두 가로 길이는 70m다. 따라서 3,000∼4,000톤 급 배가 접안하여 작업할 수 있는 뜬 다리 부두는 전체적으로 55.3m×70m(맨 동측 묶음은 54.1m×75.1m)의 직사각형이다. 앞에서 말한 준공평면도에는 총 3 묶음 뜬 다리 부두가 그려져 있다.
  
맨 바깥 폰툰에서 바라 본 뜬 다리 부두다. 연결다리 폰툰에 매단 5 m 길이 세 가닥 뜬 다리는 없어졌다. 그 자리를 다른 폰툰이 대신하고 있으며, 하나의 묶음을 구성하던 구조물도 다 사라졌다. 남아있는 뜬 다리 부두 크기와 모양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 폰툰에 바라본 뜬 다리 부두 맨 바깥 폰툰에서 바라 본 뜬 다리 부두다. 연결다리 폰툰에 매단 5 m 길이 세 가닥 뜬 다리는 없어졌다. 그 자리를 다른 폰툰이 대신하고 있으며, 하나의 묶음을 구성하던 구조물도 다 사라졌다. 남아있는 뜬 다리 부두 크기와 모양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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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차 축항공사를 시작으로 1938년까지 총 4차례 항만공사가 진행된다. 군산항에 총 4 묶음 뜬 다리 부두가 만들어진다. 지금은 각 묶음도 다 사라지고, 단일 기능을 하는 3개 뜬 다리 부두만 남아있다. 모양도 변했다. 연결다리 폰툰에 매단 5 m 길이 세 가닥 뜬 다리는 없어졌다.

그 자리를 다른 폰툰이 대신하고 있다. 하나의 묶음을 구성하던 개개 구조물도 다 사라졌다. 남아있는 뜬 다리 부두 크기와 모양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바깥 폰툰 일부가 퇴적된 펄에 묻혀 이젠 그 기능을 다 잃고 말았다.

- 다음 회의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옛 사진 이미지를 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오마이뉴스 조종안 기자님께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태그:#군산항, #뜬_다리_부두, #쌀_수탈, #이식된_근대, #탁류_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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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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