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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성인 문해교육에 참가한 다섯 분의 할머니들이 자신의 글씨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폰트로 쓰인 글자판을 들고 있다.
 칠곡군 성인 문해교육에 참가한 다섯 분의 할머니들이 자신의 글씨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폰트로 쓰인 글자판을 들고 있다.
ⓒ 칠곡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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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칠곡에서 성인 문해교육으로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이 세 차례나 시집을 낸 데 이어 삐뚤빼뚤 적은 한글로 글꼴을 만들어 내놓았다. 칠곡군은 그간 한글을 공부해온 김영분(74), 권안자(76), 이원순(83), 이종희(78), 추유을(86) 할머니의 서체를 한글과 영문폰트로 각각 만들어 공개했다.

칠곡군 안 22개 마을 '성인 문해교실'에서 한글 공부가 시작된 것은 2008년부터였다. 높은 문해율을 자랑해 왔지만 여전히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이들은 곳곳에 적지 않다. 이들이 노년에서야 비로소 글을 깨치기 위해 연필을 잡게 한 것은 물론 고단한 삶 탓이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들이 한글을 깨치게 된 것은 단순히 읽기와 쓰기 능력을 갖추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두려움 없이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는다는 뜻이고, 힘겹게 곁눈질만 하던 세계가 옹글게 '나의 세상'으로 새로이 열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농협에 가서 돈을 찾으려 이름을 쓸 때, 팔이 떨려서 못 쓰던 기억을 떨쳐버리게 하고, 우편물을 전해주며 집배원이 서명하라고 해도 도무지 거리낄 게 없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세상에,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싶었던 '시'가 그들 앞으로 찾아왔다.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쓴 첫 시집 <시가 뭐고?>가 나온 것은 2015년이었다. 70대부터 90대까지 이 초보 시인들이 쓴 시집은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이듬해 서울국제도서전에 초청되기까지 했다. 그것은 첫 한글 강좌가 열릴 때 긴가민가하면서 마을회관을 찾았던 노인들로서는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친김에 이듬해 2016년에는 제대로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라는 제목을 단 두 번째 시집을 펴냈다. 작품을 고르고 직접 해설까지 맡은 김해자 시인의 말대로 그 시집은 "일반 시집의 형식과는 조금 다른, 삶의 결이 그대로 기록된 역사서"였다. 
 
지난 6월부터 시작된 글꼴 제작과정에서 할머니들은 제각기 2천여 장의 종이에다 글씨를 연습하면서 글꼴의 바탕을 만들어냈다.
 지난 6월부터 시작된 글꼴 제작과정에서 할머니들은 제각기 2천여 장의 종이에다 글씨를 연습하면서 글꼴의 바탕을 만들어냈다.
ⓒ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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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를 배우지도, 운율을 공부한 적도 없는 노인들이 마음속에서 끄집어낸 소박한 언어는 그들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면서 저마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 주었다. 2018년에는 세 번째 시집 <내 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를 세상에 선보였다. 

한글 교육이 10년을 넘기면서 할머니들의 글씨도 처음 글을 배울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이들의 필적을 눈여겨본 한선혁 칠곡군 평생교육 담당은 이 글씨를 폰트로 만들면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예산을 확보하여 본격적인 폰트 제작에 들어간 것은 올 6월이었다. 성인 문해 강사들이 기꺼이 할머니 폰트 제작의 도우미가 되어 주었다. 이번에 만들어진 글꼴의 바탕은 이들 할머니가 지난 넉 달 동안, 닳아서 못 쓰게 된 네임펜을 여러 개 바꾸어 가며 연습한 글씨다. 저마다 약 2천여 장에 이르는 종이에다 지치지 않고 쓴 글씨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딴 글꼴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한 번 할 때마다 열 장쓱(씩) 했다. 두 시간씩 걸렸지. 한글은 적겠는데 영어는 잘 몬하겠더라. 이거 적는다고 한글 안 이자뿌고(잊어버리고) 지냈다." - 권안자 

"글자를 썼다가 지웠다 하도 하이끼네(하니까) 볼펜 3개 이거는 금방이라. 다 쓰고 세알려(세어) 보니까 7개 썼드라. 뭐가 뭔지는 몰라도 아들딸한테 도움 되겠지 하면서 했지. 배우는 거는 재밌으니까." - 이종희

이 과정에서 할머니들을 힘들게 한 건 '영어와 특수문자'였다고 한다. 한글은 그동안 꾸준히 익혀온 것이었지만, 영어와 특수문자는 '그리기'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만학의 조모에게 개인 교수를 해 준 이는 손주들이었다. 비록 격려와 응원 이상은 아니었을 테지만, 폰트 제작에 '조손(祖孫) 연대'와 협업이 이루어진 거였다.
 
"폰트가 뭐꼬? 똑같이 잘 쓰고 싶은데 손도 떨리고 왜 이래 잘 안 되노. 영어는 왜 이래 꼬불랑거리고 손이 내 맘대로 안 된다카이. 아들도 옆에서 보고 잘한다카이 더 잘해야겠다 싶었어!" - 이원순

결과와 무관하게 이 글꼴 제작 과정은 이들의 '최선'이었다. 자신이 괴발개발 쓴 글씨가 사람들이 즐겨 쓰는 도구가 되리라는 상상은 말할 것도 없고, 폰트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조차 이들에겐 버거웠을 것이다. 자신 없어 하는 할머니들에겐 글씨가 예쁘다, 잘 쓴다는 격려와 칭찬이 큰 힘이 되었겠다. 
 
"한석봉이처럼 내가 글자 잘 써서 쓴다 카는데 내가 뭣이기 잘 쓰노. 폰트 나오면 자식들 제일 먼저 보여 주고 싶지." - 김영분

"내는 계속 틀려고 써도 쪼매만 힘들면 되는데 선생님이 힘드니까 그게 마음이 쓰이지. 글씨를 더 예쁘게 써야 안 되나 했는데 아닌가 봐. 그냥 쓴 게 더 좋다데. 아직도 이해는 안 돼. 내 글씨가 뭐 이쁜고." - 추유을 
 
글꼴 제작에 참가한 다섯 분의 칠곡할매들. 70대가 세 분, 80대가 두 분이다.
 글꼴 제작에 참가한 다섯 분의 칠곡할매들. 70대가 세 분, 80대가 두 분이다.
ⓒ 칠곡군 동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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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된 다섯 종의 칠곡할매 글꼴
 공개된 다섯 종의 칠곡할매 글꼴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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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으로 복고와 혁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기도 하는 글꼴은 출판과 인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전문 폰트 제작사에서 고도의 정밀한 작업을 거쳐 만들어지는 손글씨가, 한글을 익힌 지 10년을 겨우 넘긴 할머니들의 손을 모태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장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글씨가 아니라, 늘그막에 힘들게 쓴 손글씨로 우리와 만나게 되는 이 할머니들의 글꼴은 그들이 건너온 고단한 삶과 그 갈피마다 패인 옥니를 닮았다. 그들은 예순을 훨씬 넘어서 젊은이들에게 배운 한글을 이제 자신의 손글씨로 되돌려주려는 것이다. 백선기 군수가 보도자료를 통해 "코로나19로 힘든 상황에서 값진 문화유산을 만들어낸 우리 칠곡 할매들이 너무 자랑스럽다"라며 감사를 전하는 이유다. 

할머니들의 삶이 담긴 서체는 칠곡군 누리집(https://www.chilgok.go.kr/main/)에서 무료 배포하고 있다. 누리집 맨 위 차림표의 '칠곡 소개' 아래 '칠곡 할매 서체'에 들어가면 '칠곡할매 서체 이야기' 영상 밑에서 '칠곡할매' 글꼴을 내려받을 수 있다. 글꼴은 트루타입(TTF)과 오픈타입(OTF), 두 가지다. 

칠곡군은 이 글꼴을 칠곡군 홍보 문구 표기와 칠곡 지역 특산물 포장 등에도 쓸 계획이다. 조만간, 삐뚤빼뚤한 '칠곡할매 서체'로 쓰인, 칠곡군의 시정 구호 '사람과 함께 크는 도시, 칠곡'이나 '잘사는 군민, 새로운 칠곡' 따위를 만날 수 있겠다. 할머니들 숨결이 서린 글꼴로 쓰인 지역 특산물 '꿀벌 참외'나 '금남 오이'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보통교육의 시행과 의무교육의 확대는 더는 성인 문해교육이 필요치 않은 상황으로 가고 있다. 어쩌면 칠곡 할매들은 가난으로 보통교육을 받지 못한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들이 서툴게 써내려간 글씨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할매글꼴'은 아프고 고단한 '근대 속의 전근대'를 추억하고 환기하는 '문화유산'으로 너끈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태그:#칠곡할매 글꼴 5종, #성인 문해교육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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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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