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 포스터.

영화 <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 포스터. ⓒ 영화사 오원

 
할리우드를 넘어 세계 영화사에 남을 만한 굵직한 영화들을 족히 수십 년간 찍어온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작 <킹덤 오브 헤븐>이 15년 만에 '디렉터스 컷'으로 돌아왔다. 전 세계 최초 개봉이라고 하는데, 그동안 수많은 영화 팬들의 질타를 받아온 극장판을 뒤로 하고 '제대로 된' 판본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극장판과 감독판이 완전히 다른 영화라고 하는 와중에, 반드시 감독판을 볼 것을 추천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라면, 20편이 넘는 연출작 중에 본 것보다 안 본 걸 찾는 게 빠를 텐데 유독 <킹덤 오브 헤븐>을 볼 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정식으로 개봉한 극장판에 대한 후기가 너무나도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 늦게나마 정식 개봉한 감독판을 볼 수 있어서 감동까지 받았다. 단순한 서사 액션 대작이 아니라, 인류의 핵심을 이루는 것 중 하나인 종교 철학을 중심에 둔 대서사시. 

영화는 정녕 수많은 대단한 조연들(리암 리슨, 에드워드 노튼, 제레미 아이언스, 데이빗 듈리스, 마이클 쉰, 브렌던 글리슨 등)이 탄탄하게 뒤를 받쳐 주는 와중에 '올랜도 블룸'과 '에바 그린'이라는 당시엔 신예나 마찬가지였던 이들(비록 올랜도 블룸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지만)을 주연으로 발탁했는데, 그들이 맹렬하게 튀지 않고 그나마 영화에 잘 버무려진 느낌이다. 

하늘의 나라 예루살렘의 앞날을 책임지게 된 발리앙

망해 가는 위기의 동로마제국, 왕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1세는 사방의 적을 견디지 못하고 서방에 도움을 청한다. 그 도움을 받은 교황 우르반 2세는 고국 프랑스에서 회의를 열어 성지 탈환을 외치며 200여 년간 이어질 십자군 전쟁을 시작한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지 1백여 년이 지난 1184년,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유럽인들이 부귀와 구원을 찾아 성지로 떠나던 와중 기사 고프리는 아들을 찾아 돌아왔다. 고프리는 예루살렘 왕국의 영주로 큰 지휘와 인망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후계자가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대장장이로 있던 발리앙, 일찍이 아내와 아이를 잃고 시름에 빠져 있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고프리의 기사단, 발리앙에게 말굽과 음식을 부탁한다. 한때 전쟁에도 참여한 적이 있었던 그에게, 고프리가 고백하며 함께 성지로 떠날 것을 종용한다. 고프리의 사생아가 발리앙이었던 것. 거절하고 그들을 돌려보낸 발리앙, 그날 저녁 찾아온 이복 형은 죽은 아내에게 해서는 안 되었던 짓을 한 걸 말해 죽임을 당한다. 그 여파로 집도 불타고 살인자가 된 발리앙은 뒤늦게 고프리를 따라나선다. 

하지만, 고프리의 후계자 자리를 탐내고 있던 고프리의 동생은 아들을 보내 고프리 일행을 습격한다. 많은 이가 죽고 몇몇이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고프리는 화살에 맞은 자리가 덧나 오래 가지 않아 죽고 만다. 죽으면서 아들 발리앙에게 영주 자리를 넘겨, 발리앙은 영주 자격으로 예루살렘 왕국에 입성하게 된다. 그의 됨됨이를 알아 본 국왕 보두앵 4세는 발리앙을 가까이 하지만, 왕을 시샘하는 강경파로 왕의 누이인 시빌라 공주의 남편이기도 한 기 드 뤼지냥의 존재가 걸림돌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이 그나마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건, 보두앵 4세를 필두로 한 온건파가 이슬람 세계를 평정하고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살라딘과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두앵 4세는 나병 환자로 오래 살지 못할 터였고, 발리앙이 그 뜻을 이어야 했다. 그런가 하면, 기 드 뤼지냥은 기사 르노 드 샤티옹을 앞세워 살라딘과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남편을 싫어하고 발리앙을 사랑하는 시빌라는, 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늘의 왕국' 예루살렘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백성들의 안전과 자유를 최우선으로!

영화에서 발리앙이 고프리를 따라나선 1184년은,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를 필두로 한 제3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1189년)되기 직전인 때로 전쟁 없는 평화가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불안한 폭풍전야의 느낌을 품고 있었다. 와중에 발리앙은 아버지 고프리와 고프리를 스승으로 두었던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4세의 유지를 받들어 백성들의 안전과 자유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를 유추해 보자. 그는 아내와 아이를 동시에 잃고 살아갈 이유가 없었고 비록 귀족의 사생아였지만 대장장이에 불과한 백성이었으며 비록 이복 형이지만 가족을 죽인 패륜아였기에, 그저 신에게 구원받길 원했고 본인의 안위를 챙기지 않으며 백성들만 생각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성지 수복을 외치며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부귀영화를 위해 한 자리 꿰차려는 수작도 있었던 여타 십자군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또한 그는 종교나 정치에 대해 무지하다시피 했기에,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의 선함이 다행이도 고스란히 스며들 수 있었다. 아버지 고프리는 예루살렘이 양심이 살아 숨쉬고 모든 종교가 함께 평화를 유지하는 '킹덤 오브 헤븐(하늘의 왕국)'이 되길 바랐다. 또한 국왕 보두앵 4세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예루살렘을 모든 종교의 성지로 개방하고 이슬람의 왕 살라딘과 화친하며 '몸은 권력에 복종해도 영혼은 나의 것'이라는 신념을 이어간다. 

발리앙은 보두앵 4세가 본인의 신념을 전해 준 '몸은 권력에 복종해도 영혼은 나의 것'을 중심에 두고, 아버지 고프리로부터 기사 작위로 영주 자리를 이어받을 때 받았던 서약 '적 앞에서 두려워 말라, 용감하고 강직하라,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진실을 말하라, 약자를 보호하고 그릇된 일을 하지 마라.'를 마음에 새기며 나아간다. 그의 신념과 행동은 온건파와 강건파로 첨예하게 갈린 당시 예루살렘 왕국에 파장을 일으켰는데, 사실 십자군의 머릿속엔 '신'이 있었지 '백성'은 없었기로서니 발리앙의 머릿속엔 '신' 아닌 '백성'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협 없는 올곧고 올바른 신념이 생생한 그곳이 '킹덤 오브 헤븐'

'신의 뜻'이 과연 진정한 승자 없는 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의 피가 강을 이루며 그 여파로 백성들 역시 죽어가는 것이었을까. 영화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말하고자 장장 3시간에 걸친 대서사시로 보여 준다. 이 전쟁은, 신의 뜻으로 성지 수복을 위해 일으킨 십자군 전쟁은, 사실 신은 핑계였을 뿐 그 목적은 영토와 재물에 있었다는 걸 말이다. 엄연히 '인간'이 저지른 전쟁에서 '신'을 울부짖는 것이야말로 신을 모독하는 게 아닌가. 

인류 역사에서, 인류가 행한 모든 행동에는 명분과 의도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이니 만큼, 누구도 승복 가능할 명분이 있어야 했을 테다. 십자군 전쟁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 중에서도 단연 가장 확고한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무수히 보여지듯 십자군의 모든 이가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신은 예루살렘이 아닌 마음속에 있다는 걸, 신을 위해 '성지' 수복 전쟁에 참전한 게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해 '기회의 땅'으로 떠난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에 시작해 200여 년 후 끝나지만, 다른 이름으로 거행되는 십자군 전쟁들은 10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예루살렘을 둘러싼 중동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계속되고 있고, 그 여파는 사실상 전 세계를 흔들고 있으며, 또 다른 신의 이름으로 '성전'을 외치는 사람과 조직과 나라는 지금 이 시간에도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그걸 역이용해 국부와 국력을 챙기는 나라도 있고 말이다. '신'의 이름 대신 '백성'의 이름을 넣어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나라도 있다. 

킹덤 오브 헤븐, 즉 하늘의 왕국은 존재할까. 아니, 존재하게끔 할 수 있을까. 신을 향하는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진정 신에게서 왔을 것만 같은 타협 없는 올곧고 올바른 신념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곳 말이다. 극중 살라딘의 명언, '예루살렘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기도 하지'를 되새겨 본다. 예루살렘은 하늘의 왕국으로서만 모든 것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가 하면, 하늘의 왕국으로서 꼭 예루살렘일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그곳이 어디든 타협 없는 올곧고 올바른 신념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곳이면 킹덤 오브 헤븐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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