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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김병진
 어린시절 김병진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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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진은 1955년 일본 고베시에서 재일동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일본 아이들로부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집단 '왕따'를 당했다. 하루는 그가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였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고 있는데 갑자기 그보다 나이 많은 대여섯 명 일본아이들이 나타났다. 그 아이들은 그에게 "조센징, 조선정벌 해 주겠다!"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몽둥이로 그의 온몸을 무작정 내리쳤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일본아이들에게 몰매를 맞고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의 부친은 오히려 울고 있던 그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은 공부든 싸움이든 1등을 해야 한다. 1등해서 일본 놈들에게는 뭐든지 이겨야만 한다."

이런 부친의 말씀은, 마치 유언처럼 평생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부친은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자마자 할머니 등에 업혀, 일본으로 가는 연락선을 탔다. 당시 그의 할아버지는 먼저 생계를 위하여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부친의 동생인 그의 고모들과 삼촌들은 다 일본에서 태어났고, 부친도 갓난 애기 때 일본에 온 관계로 고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한편, 그는 일본 아이들에게 수시로 몰매를 맞았지만 일본 아이들은 그에게 혼자서 덤비는 일이 없었다. 그가 형 혹은 사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일본 아이들은 그에게 접근조차 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그는 혼자 집밖에 나갈 때는 항상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마치 전투장에 나가는 투사 같은 각오로 임했다.  

일본 아이들의 "조센징" 조롱 들으며... 괴로웠던 '조선정벌' 교과 시간

'조선 정벌'이라는 표현은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본 역사공부를 하면서 학교에서 처음 들은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라는 내용을 배우는 날이었다. 의기양양하게 가르치는 교사의 표정과 눈을 반짝이는 일본 아이들의 '광기' 속에서 그는 기가 죽어 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런 갈등과 번민으로 인해, 그의 초등학교 시절은 즐거웠던 일보다는 괴로웠던 기억들로 남아있다.

그는 줄곧 일본 학교만 다녔고 이른바 '민족교육'이라는 것을 정식으로 받아보지 못했다. 또 항상 일본 학생들에게 '왕따' 당하는 그를 보다 못한 고모들이, 그에게 학교에서만이라도 조선인이라는 것을 절대로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그래서 걱정하는 고모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 후로는 일본 이름으로 학교에 다녔고, 그렇게 자신을 숨기는 생활은 고등학교2학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지난 1971년 고2 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국을 방문해 경북 칠곡 조상 묘지에 성묘했다. 그리고 당시 민단과 한국 정부에서 개최하는 하계학교에 참가하며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알고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그때부터 그는 일본학교에서 다시 한국 이름을 쓰며, 일본 학생들에게도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선포했다.

당시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오사카 제일의 명문이었다. 따라서 졸업 후 학생들은 일본의 명문대학교를 진학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 대학 대신 모국의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어 공부에 몰두했다. 또 학교에서 동포 모임 서클 조선문화연구회를 결성해 동포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가 고3이 되어 모국의 대학 진학 준비를 하던 중, 재일교포 유학생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공판장에 화상 입은 얼굴로 등장하는 '서승(1945-)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그는 민단을 통해 모국으로 유학 가는 수속을 밟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서승사건이 나자 그의 할머니가 완강하게 모국유학을 반대했다. 고민 끝에 그는 "나중에 조용할 때 모국에 가자"는 생각으로 1973년 간세이학원대학교로 진학하며 동시에 재일한국학생동맹(아래 한학동)에 가입했다.

한학동은 민단민주화를 외친 죄로 민단 산하단체 인정취소 처분을 받고 있었는데, 1973년 10월 한국에서 반유신 투쟁이 일어나자 한학동 소속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반유신 투쟁에 참여했다. 이어서 1974년 민청학련사건이 터지자 한학동맹원 300여 명은 주일한국대사관에 항의 데모를 했고 그 자리에서 그는 항의문을 낭독했다. 그 결과 그는 민단 지부 지단장으로부터 협박을 받게 되었다. 당시 그의 막내 고모는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

민단 지부 지단장은 그에게 한학동 활동을 계속한다면, 김병진 자신은 물론 한국에 시집간 고모여권을 취소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래서 그는 평소 소원이었던 모국유학이 점점 멀어질 것 같아 답답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79년 10.26이 일어났다. 그는 마침내 재일동포들을 위한 모국어 교육을 위해 국문학자가 되겠다는 꿈으로 최현배 선생의 학맥을 이어온 연세대 국문과를 지망했고 합격했다. 오래도록 꿈꿔온 모국의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그에겐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에 비해 그는 모든 것이 힘에 부쳤지만 그럭저럭 열심히 해서 모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나름대로 보람찬 생활이었다.

1980년 당시에는 학생데모가 한창이었고 그는 처음에는 멀찌감치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국문과 급우들이 여러 번 같이 하자고 권유하는 덕에 그도 같이 스크럼을 짜기도 했다. 그래서 1980년 5월15일 서울역광장회군 때도 그는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연대 재학 시절 김병진
 연대 재학 시절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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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전두환은 결국 대학휴교령을 내렸다. 그래서 기숙사 학생들은 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 갈 곳이 없었다. 생각 끝에 제주도에 시집간 막내 고모한테로 가서 학교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당시 고모부 댁에 자주 놀러 오는 동국대생과 그는 어울리고 지냈는데 그 친구의 친구 여동생이라는 한 여성을 제주 시내에서 소개로 처음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당시 그 여성은 제주도 교육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여성의 부친은 고등학교 교감 생활 중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모친은 혼자 5남매를 키우셨는데 그 모친도 암으로 얼마 못 사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 그는 그 여성과의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고 1981년 5월, 그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수운회관에서 결혼했고 그가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장모도 돌아가셨다.

결혼 뒤 대학원 다니던 중... 보안사 끌려가 간첩으로 조작되다 

1983년 3월 아내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는 연세대 대학원에 들어갔고, 그해 4월에 장남이 태어났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983년 7월 9일 오후 2시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주거지 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국군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수사관들에 의해 그는 강제로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었다.

서빙고분실에서 몇 개월 동안 가혹한 고문 끝에 보안사에서 조작한 대로 그는 '간첩'이 됐다. 그는 당시 받은 가혹한 고문을 훗날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보안사 수사관들이) 나를 세운 상태에서 (수사2계장) 김용성이가 양팔을 잡고 길이 150cm 정도, 굵기가 지름 10cm 이상 되는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 등과 허벅지 등 전신을 수십 차례 때리고, '너 이 새끼 죽여버리겠다' '네 마누라를 윤락녀로 만들고 네 자식은 애비도 모르게 만들어 고아원에 보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갖은 고문에도 그가 간첩인 것을 밝힐 수 없었던 보안사는, 그의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이용해 그를 보안사 일어 통역으로 써먹기로 했다. 1984년 보안사에 연행된 80%가 재일동포였고 모국어가 서툰 재일동포 때문에 보안사는 일어 통역이 필요했던 탓이다. 결국 그는 보안사에 강제특채 돼, 1984년 1월 1일부터 1986년 1월 31일까지 약 2년간 통역으로 근무했다.

그는 보안사 강제근무 당시, 자기와 같은 재일동포들이 가혹하게 고문받는 모습을 옆에서 가까이 지켜보면서 너무 힘들어 거의 매일 밤 악몽을 꾸었고 급기야는 가족과 동반자살도 계획했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들을 보니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강제근무는 당시 최경조 대공처장, 우종일 수사과장, 김용성 수사2계장의 작품이었음이 훗날 진실위에서 밝혀졌다.

그러던 중 그의 처가 둘째를 임신했다. 그는 "둘째 출산을 위해 처와 함께 일본에 다녀와서 다시 보안사로 돌아온다는 조건"으로 퇴직을 하고, 그다음 날인 1986년 2월 1일 일본으로 가족과 함께 돌아왔다. 그렇게 일본으로 오자마자 그는 자신이 보안사에 2년간 강제근무하면서 겪었던 악몽과도 같은 경험을 책으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날부터 낮에는 <보안사>를 쓰고, 밤에는 학원 강사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그와 가족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지만, 그저 그렇게 버티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한편, 둘째 출산 뒤에도 그가 보안사로 돌아오지 않자, 보안사의 압박은 심해졌다. 보안사 요원이 그를 접촉하려고 전화와 편지를 보내왔다. 그가 대응을 하지 않자 네다섯 명 건장한 사내들이 그의 집주변에서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일절 응답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자 보안사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로 그와 가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는 "죽더라도 <보안사>는 다 쓰고 난 다음에 죽자"는 각오를 했다고 한다. 처자식들을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고 제정신이 아니었단다. 유일하게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길은 하루라도 빨리 <보안사>를 완성하고 책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김병진이 쓴 보안사
 김병진이 쓴 보안사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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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1988년 6월 마침내 일본어판 <보안사>가 출간되었고, 그해 8월 한국어판 <보안사>도 출간되었다. 일본판 <보안사>는 그해 10월 아사히신문사 아사히저널 논픽션 대상 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책이 먼저 일본에서 출간되자 그 해 8.15특사로 대부분 조작간첩사건 피해자들이 석방되었다. 그리고 1988년 당시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처음으로 간첩조작문제가 다루어졌다. 그때 그의 이름과 책 <보안사>를 거론하며, 정부 추궁에 노무현 당시 국회의원(전 대통령)이 앞장섰다.

하지만 한국어판 <보안사> 출간 뒤, 그는 노태우 정권하에서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 중지와 지명 수배되어 여권 발급이 아예 금지되었다. 2000년 5월, 출국한 지 14년 4개월 만에, 비로소 김대중 정부 아래에서야 그는 다시 모국에 올 수 있었다.

14년 만의 귀국, "명예회복 하라"는 진실위 권고 받았지만 현실은... 
  
김병진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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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진실위는 사건 발생 26년 만에 "국가폭력의 피해자 김병진씨에 대해 국가는 사과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김병진 사건'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결국 손해배상 소송도 제기했다. 하지만 한국 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는 인정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라며 패소판결을 내렸다. 법원 논리대로라면, 그는 노태우 정권 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지명수배 당하고 입국까지 금지 된 그가 정부를 상대로 소송하는 것이 가능했단 말인가? 그에게 있어 대한민국 법원은 이미 상식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어려서부터 일본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며 자란 그는 젊은 시절 국문학자가 되어서 재일 동포들에게 힘이 될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는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와 아내는 그동안 한일 교류 여러 장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많은 역할을 해왔고 지난 2012년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상을 받기도 했다. 그것이 그나마 이제까지 절망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최근 김병진 부부
 최근 김병진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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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8년 <보안사> 출간 때부터 수년간 학원 강사로 지내며 가난 속에 시달리면서도 두 아이를 키웠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고등학교까지는 일본에서 나오고 서울대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현재는 한국 모 기업의 일본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의 딸은 일본 교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일본에서 줄기세포 연구자로 생활하고 있다.

현재 그는 8년 전에 앓은 병으로 강사 일을 접었고, 연금도 거의 없는 막막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보안사에 잡혀갔을 때 그는 20대 중반 청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60대 중반 노인이 되었다. 더 늦기 전에, 한국 정부가 그와 그 가족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고 가족의 인생과 행복을 송두리째 뺏어간 일에 대해 배상할 수는 없는 것일까?

태그:#김병진, #보안사, #고문, #간첩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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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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