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2 07:39최종 업데이트 20.09.2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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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싱가포르 공기업 창이공항그룹(이하 CAG) 회장인 리우 문 롱(이하 리우)이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그가 맡고 있던 싱가포르 투자회사 테마섹의 고문직, 인프라컨설팅 회사인 서바나 주롱의 회장 자리도 함께 내놓았습니다. CAG는 한국의 인천공항공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으로, 리우는 2009년 6월 취임 후 창이공항을 지금과 같은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만든 인물입니다.

그 전에는 싱가포르의 대표적 부동산투자회사인 캐피탈랜드의 CEO였고, 싱가포르 국립대학의 교수 및 정부 외 여러 기관에서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싱가포르 대통령 훈장을 받았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경제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에서도 훈장을 받을 만큼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경제 발전에 대한 공로로 프랑스 훈장을 받는 리우 문 렁 ⓒ 싱가포르 주재 프랑스 대사관

 
그런 그가 스스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이유는 자신이 고용했던 인도네시아 출신 가사도우미와 관련한 고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사건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리우가 자기 집에서 9년 동안 일했던 가사도우미를 절도 혐의로 고발했는데, 4년 간의 재판 끝에 가사도우미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싱가포르의 최상위 공직자인 리우가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사도우미를 쫓아내고 절도죄를 뒤집어 씌웠는데 그게 재판을 통해 무고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갑질이 알려지고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자 판결이 난 지 일주일 만에 리우가 모든 공직에서 사임을 하게 된 것입니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이번 사건을 처음부터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당노동 항의하니 가사도우미 해고
 

가사도우미 소개 업체의 모습. 두 명의 가사도우미가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여기서 대기 하는 동안은 수입이 없습니다. ⓒ 이봉렬

 
전체 인구 580만 명인 싱가포르에는 약 26만여 명의 가정부가 있습니다. 싱가포르 가정의 5분의 1 정도가 가정부를 고용합니다. 맞벌이를 하는 가정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가정부 고용 비용이 한 달 80만 원 정도로 싱가포르 소득 수준에 비해 그리 높지 않아서 많은 가정이 가정부를 들입니다. 가사도우미들은 대부분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주변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성들입니다.

인도네시아 여성인 파르티 리야니(이하 파르티)는 2007년부터 리우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9년 정도 일하는 동안 리우 가족과 특별한 불화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2016년에 리우의 아들 카알이 분가를 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카알은 이사한 집의 청소를 파르티에게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고용이 된 집 외의 다른 곳에서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카알은 이사 나가기 전에도 몇 번이나 그의 사무실 청소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법정에 출두하는 리우의 아들 카알과 가사도우미 파르티 ⓒ 스트레이트 타임스 화면 갈무리

 
파르티는 분가해서 나간 카알의 집 청소까지 시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따졌으나, 그에 대한 리우의 답은 해고였습니다. 9년을 일한 집에서 갑자기 해고당한 파르티는 화를 참지 못하고 노동부에 불만을 제기하겠다는 말을 리우 가족에게 해버렸습니다.

해고 당한 파르티가 짐을 정리하기 위해 허락 받은 시간은 단 두 시간뿐이었습니다. 서둘러 상자 3개에 짐을 챙겼으나, 시간이 부족해 채 봉인도 끝내지 못했습니다. 파르티는 리우 가족에게 상자를 인도네시아로 보내 달라고 요청한 다음 싱가포르를 떠났습니다. 노동부에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불만을 제기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체포된 가사도우미

한달 뒤 파르티는 다른 일자리를 찾기 위해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싱가포르에서 그를 맞아 준 것은 새로운 일자리가 아니라 공항에서의 체포였습니다. 파르티가 인도네시아로 떠난 후 리우 가족이 파르티의 소지품 상자를 열어 촬영한 후 그 안에 있는 물건 일부가 훔친 물건이라며 그녀를 절도 혐의로 경찰에 신고를 한 것입니다. 


파르티는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리우 가족이 도난 당했다고 신고한 가방과 휴대폰 등을 싱가포르에 오면서 그대로 들고 왔고, 그게 절도의 증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날 이후 오랜 조사가 진행되었고 다음 해 8월 파르티는 절도 혐의로 기소가 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리우는 지난 10년 동안 몇 번이나 그녀가 물건을 훔치는 걸 눈치챘으나 그 동안은 눈감아 줬다고 말했습니다. 파르티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물건을 따로 보관했고, 때로는 못 쓰게 된 물건을 리우의 부인이 가져도 된다고 해서 가졌을 뿐이라고 항변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리우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2019년 3월, 재판부는 파르티가 3만 달러 (약 2600만원) 상당의 물품을 훔친 혐의가 인정된다며 2년 2개월의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공항에서 체포된 지 2년 3개월여 만에 나온 판결이었습니다.

뒤집어진 판결

파르티는 항소했고,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난 2020년 9월 4일, 항소심 재판 결과가 나왔습니다. 2심 재판부는 1심의 유죄 판결을 뒤집고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리우 가족의 물건이 파르티의 상자에서 나왔고, 심지어는 싱가포르에 입국하는 파르티의 소지품에서도 나왔음에도 무죄가 선고된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선 도난 당했다는 물건들의 상태가 파르티에게 유리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낡은 DVD플레이어는 고장이 나서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최상위 부자인 리우의 가족이라면 수리하는 대신 버리고 새 것을 사는 게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오래 된 휴대전화 2개, 얼룩이 묻은 선글라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난 당했다고 주장한 물건들이 사실은 리우의 가족에게는 버리는 물건이었고, 파르티는 그걸 고쳐서 쓸 생각으로 보관을 했을 뿐이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습니다.

두번째로는 리우 가족의 진술에 많은 허점이 있었습니다. 증거물인 낡은 가방을 두고 파르티는 이웃집 쓰레기통 근처에서 주웠다고 했는데, 리우 가족은 도난 당했다고 했지만 언제 샀는지, 어디서 샀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못했습니다. 재판부는 파르티의 주장이 더 타당하다고 봤습니다.
 

남자인 카알이 도난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용 드레스 ⓒ HOME

 
불화의 당사자인 카알의 진술은 신빙성이 더 많이 떨어졌습니다. 파르티가 훔쳤다고 하는 옷이 여성용인데, 카알은 자신이 가끔 여성용 옷을 입기도 한다고 했고, 고장이 나서 못 쓰게 된 중가 시계를 두고도 그 가치가 2만5000달러(약 2200만원)가 된다고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도난 당했다고 주장하는 물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경찰이 작성한 조서도 부실했습니다. 파르티가 조사를 받는 동안 경찰은 영어와 말레이시아어(Bahasa Melayu)를 혼합하여 질문했고, 파르티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어(Bahasa Indonesi)를 사용해서 답변했습니다. 제대로 된 기록을 위한 통역사 없이 다른 수사관이 번역을 하는 수준이어서 경찰이 제출한 진술 내용 자체에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봤습니다. 파르티의 방어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재판부는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이번 사건은 리우 가족이 물건을 도둑맞아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부당노동행위를 노동부에 신고하겠다고 한 파르티를 인도네시아로 돌려 보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벌어진 일이라고 봤습니다.

최고위 공직자에게 쏟아지는 비판

이 같은 재판 결과가 나오자 리우에게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사회적 약자인 가사노동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부당한 대우를 한 것도, 1심 재판부가 이 같은 사실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결국 재판 결과가 나온 지 일주일만에 리우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코로나19와 실업률 문제를 빼면 지난 2주 동안 싱가포르는 이 사건이 모든 이슈를 다 삼켜 버릴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선 현 법무부 장관은 리우가 캐피탈랜드의 회장으로 있을 때 이사로 함께 일했던 이력 때문에 의심의 눈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법무부는 장관이 재판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하면서 차관 주재 하에 재판 과정을 다시 점검해서 필요한 추가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노동부에서는 리우 가족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파르티의 신고를 제대로 처리했는지를 다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의회에서는 여야 할 것 없이 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불공정한 사례가 있었는지를 따져 물었고, 내무부 장관은 답변을 통해 전체적으로 조사 후 장관 성명을 발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사건을 두고 가난한 이웃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에 대한 싱가포르 상류층의 갑질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 주는 사례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 사건 이전에도 가사도우미를 대상으로 한 학대 행위가 뉴스에 자주 나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도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난한 가사도우미가 시민단체와 공익 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싱가포르 최상위 권력자와 법정 다툼을 해서 이길 수 있는 그런 제도적 장치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 좋은 사례라는 겁니다.

조력자들
 

싱가포르의 이주민 지원 단체 홈 (HOME) 웹사이트 ⓒ HOME

 
파르티가 4년의 법정투쟁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싱가포르의 이주민 지원 단체 홈(HOME : Humanitarian Organisation for Migration Economics)의 역할이 큽니다. 절도 혐의로 기소된 파르티는 다른 일을 구할 수도 없었고, 지낼 곳도 없었습니다. 그런 파르티에게 홈은 쉼터를 제공했고, 프로보노(Pro Bono : 변호사를 선임할 여유가 없는 이에게 보수를 받지 않고 법률서비스를 해 주는 것)를 통해 변호사 지원을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프로보노가 아니었다면 변호사 비용만 15만 달러 (약1억2900만원) 이상이 들었을 거라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가사도우미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기에 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재판 자체를 포기하고 징역을 살게 됐을 것입니다. 홈은 파르티를 후원하기 위해 크라우딩펀드를 열어 2만8560달러(약 2450만원)을 모금하기도 했습니다.

싱가포르 최상위 공직자와 이주노동자인 가사도우미의 법정 다툼에서 정황과 증거만을 가지고 가사도우미의 손을 들어준 재판부의 불편부당함도 평가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의 경우 계란 한 판을 훔쳐도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 받고, 성추행을 저질러도 재벌회장이라면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한국과 비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이주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 1심에서 보여준 부실한 재판 등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런 게 드러났을 경우 의회와 정부가 나서서 적극 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대책을 내놓는 노력은 한다는 것도 긍정적입니다.
  

최종 판결 후 프로보노 변호사 아닐 발찬다니와 함께 한 파르티 ⓒ HOME

 
재판이 진행된 지난 4년 간 인도네시아로 돌아 갈 수도 없고, 돈을 보낼 수도 없었던 파르티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파르티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4년 동안 일하지 못한 데 대한 보상을 신청할 예정입니다. 보상이 마무리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작은 가게를 열고 싶다고 합니다.

반면 모든 공직에서 내려온 리우는 앞으로 부당노동행위와 무고에 대해 조사를 받게 될 예정입니다.

파르티는 판결이 나온 후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리우를 용서합니다. 다만 다른 직원에게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말을 새겨 들어야 할 사람, 리우 말고도 많을 겁니다.
싱가포르에도, 한국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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