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8 15:44최종 업데이트 20.12.2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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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이 발해와 신라와 양분돼 있었던 시절 '백성들에게 봉사하겠다'라며 나서는 사람들이 남쪽 신라에 대거 출현했다. 신라의 혼란을 틈타 역사무대에 오른 이들은 궁예·견훤·왕건·기훤·양길 등으로 대표된다.

왕위계승권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닌 한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천명과 백성을 받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후삼국 시대인 이 당시의 군웅들도 그랬다. 궁예를 포함한 이들이 말하는 '백성에 대한 봉사'는 무료 자원봉사가 아니라 권력투쟁이었다.


궁예는 그 봉사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한때 주군이었던 기훤과 양길을 등지고 독자 세력을 구축한 궁예는 후고구려(정식 명칭은 고려)를 세워 신라·후백제와 더불어 후삼국 구도를 만들었다. 이로써 남북국 시대는 발해-후삼국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궁예의 군대가 가장 강한 군대는 아니었다. 가장 강한 쪽은 후백제 견훤의 군대였다. 하지만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쪽은 궁예였다. 한때 후삼국 영역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견훤은 신라 땅 안에서만 영토를 확장한 데 반해 궁예는 신라를 벗어나 북으로까지 올라갔다. 대동강은 물론이고 압록강 유역까지 그의 군대가 진출했다.

그래서 궁예는 후삼국 통일을 꿈꿀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지만 왕건의 쿠데타로 어이없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은 쿠데타 발생 직후의 궁예에 관해 "왕은 이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라며 "미복을 입고 산속으로 도망갔다가 곧바로 부양(지금의 평강) 백성에게 해를 입었다"라고 말한다.

이로 인해 궁예는 후삼국 경쟁 구도에서 자동 탈락했다. 동시대 경쟁자들과 비교할 때 사후에도 대체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쿠데타로 실각한 궁예는 배신자 이미지까지 덮어썼다. 이 때문에 그는 더 나쁜 평가를 받게 됐다.

신라 왕실의 범여권 인사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에서 찍은 궁예 벽화. ⓒ 김종성



궁예는 크게 보면 신라 정계의 범여권이었다. 그는 신라 왕실의 피를 타고났다. 궁예 열전은 "신라인이며 성은 김씨"라고 말한 뒤 이렇게 소개한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인 의정이다.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며 그 성명은 알 수 없다. 혹자는 제48대 경문왕인 응렴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정확히 누구의 아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궁예는 왕자 출신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신라 왕실과 척을 지게 된 것은 출생 직후부터 살해 위협을 피해 민가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아도 시원찮을 갓난아이가 살해 위협까지 받은 것은 출생 당시의 기이한 현상 때문이었다.

궁예가 태어날 때 궁궐 지붕 위에 하얀 무지개가 서렸다. 이 때문에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궁예 열전에 따르면 점술가인 일관(日官)의 해석이 논란을 한층 부추겼다.

일관은 단오절인 음력 5월 5일에 태어난 궁예의 사주에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오(午)가 두 개 이상 있다는 점과 아이가 엄마 배 속에서 나올 때부터 치아가 있었다는 점을 거론했다. 그는 나라에 해가 될지 모르니 키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임금에게 건의했다.

태양이 하늘 중앙에 있는 낮 12시를 정오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는 양의 기운이 강하다. 그런 '오'가 두 개 이상 있었다. 또 엄마 배 속에서부터 치아를 갖고 태어났다. 거기다가 아기 울음과 함께 하얀 무지개까지 서렸다. 그래서 예사롭지 않은 아이로 인식됐다. 정실 왕후의 아들이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힘없는 후궁의 아들이라서 아기에게 불리한 유권해석이 나왔을 수도 있다.

만약 유모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궁예는 영아 살해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이 때문에 한쪽 눈을 잃고 평생 살아야 했다. 죽이려고 2층에서 던진 궁예를 아래쪽의 유모가 몰래 받는 과정에서 유모의 손가락이 아이의 눈을 실명에 이르게 했다. 이때부터 유모 품에서 성장한 그는 10살 무렵 유모를 떠나 승려가 됐다가 반군에 가담했다.

훗날 정권을 잡은 궁예는 신라 왕실에 대한 증오심을 남달리 표출했다. 궁예 열전에 따르면 후고구려를 건국한 901년에 그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복수의 의지를 천명했다. "필시 출생 시에 버림을 받은 데에 원한을 품고 이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라고 궁예 열전은 해석한다.

궁예는 불필요하게 민심을 자극하는 방법으로도 그런 증오심을 표현했다. 지금의 영주 부석사에 신라 왕실을 모독하는 행적을 남겼다. 신라왕의 초상이 그려진 그곳 벽화에 칼질을 했던 것이다.

배신의 정치는 못 참는다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역에서 찍은 후고구려(태봉) 도읍지 안내문. ⓒ 김종성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 신채호는 위와 같은 행적들과 더불어 궁예의 혈통이 그를 폄하하는 데 활용됐다고 해석한다. 왕건이 쿠데타를 합리화하고자 궁예의 혈통과 행적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신라 왕실의 피를 타고난 궁예가 신라 왕실에 적대했다는 점을 근거로 궁예가 배신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고 신채호는 풀이한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의 편협한 윤리관 아래에서는 헌안왕의 초상화를 모독하고 신라에 불충한 두 가지만으로도 궁예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런 궁예를 죽이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라는 논리가 나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건은 살아서 고려왕이 되고 죽어서 태조 문성(文聖)의 시호를 받아도 추호도 부끄러움이 없게 되는 것이다.
 
왕건과 고려인들이 궁예에게 배신자 이미지를 씌운 일을 생각하면서 신채호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이 있다. 궁예가 실제로는 왕족이 아니었는데도 왕건이 그렇게 조작했을 수 있다는 추론이다.

왕족도 똑같은 인간이므로 특별 대우할 필요는 없지만 인류는 오랫동안 그들을 신성시했다. 여기에는 종교 성직자들의 역할도 큰 몫을 했다. 제정일치를 벗어나 정교분리가 이뤄진 시대에도 종교는 왕실을 신성화하는 데 참여했다. 군주는 하늘의 대리인이라는 이미지가 종교의 협조로 더 쉽게 확산됐다.

그래서 군주들은 지금의 대통령 이미지뿐 아니라 신의 이미지도 상당 부분 갖고 있었다. 군주가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폭군이라 할지라도 군주를 시해하거나 배신하는 것을 고대인들은 꺼렸다. 고대인들은 군주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더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려왕조의 녹을 먹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공양왕을 비롯한 왕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이성계를 지지했던 개혁 세력인 신진사대부의 일부가 지지를 철회하고 중앙 정치에 등지는 주요 요인이 됐다.

군주를 배반하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은 왕조시대가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20세기에도 여전히 나타났다. 박정희가 윤보선 대통령을 어쩌지 못하고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을 어쩌지 못한 데는 그런 전통적인 관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김재규의 거사가 유신체제 종식에 크게 기여했는데도 그에 대한 평가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데는 그와 박정희의 인연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그날 궁정동 안가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사람이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가 확연히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군주와의 의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왕조시대의 낡은 유물이다. 그것은 대중의 정치적 이익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런 기준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궁예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궁예가 배신자 이미지를 갖게 된 것도 실상은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를 그런 운명으로 내몬 것은 신라 왕실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점을 고려해주지 않았다. 그가 신라 왕실의 피를 물려받고도 신라 왕실에 대항했다는 점만을 크게 중시했다.

궁예 왕조가 대대로 이어졌다면 평가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신라 왕실과의 인연을 등지고 신라 왕실에 대항했다는 점은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떨어뜨렸다. 비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인류가 의리 문제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같은 관념으로 인해 그는 죽은 뒤에도 동시대 경쟁자들보다 낮은 평가를 받게 됐다.

애초부터 군주와 인연이 없었던 사람이 혁명을 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봐줄 수 있지만 인연이 있는 사람이 군주에게 대항하는 것은 웬만해서는 긍정적으로 봐주지 않는 것이 인류의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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