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6 19:51최종 업데이트 20.12.2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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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고난으로 가득 찬 초년기를 보냈다. 만 10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쌀통)에 갇혀 죽었고, 그 뒤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음력으로 정조 즉위년 6월 23일 자(양력 1776년 8월 6일 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왕세손 시절에 관복을 입은 채로 잠드는 날이 많았다.

암살 위협은 임금이 된 뒤에도 있었다. 즉위 이듬해인 정조 1년 7월 28일(1777년 8월 30일)에는 현빈 주연의 영화 <역린>에 묘사된 것처럼 서울 광화문 서쪽 경희궁에서 정조 암살 미수가 있었다. 개혁파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 후환을 없애고자 그 아들까지 노렸던 것이다.


항상 절박하게 살았던 정조는 왕이 된 뒤에 가차 없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정적을 가급적 용서하지 않는 군주였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핵심 인물들을 그는 사형시켰다.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도 마찬가지였다. 홍인한은 사도세자를 비극으로 몰아가는 데 가담했다. 사도세자의 사망 당일에는 한강 뱃놀이로 기쁨을 표현하기도 했다. 정조는 그런 홍인한을 죽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외가를 사실상 몰락시켰다.

가차없는 응징에서 열외

아버지의 적들에 대한 그 같은 응징을 감안할 때 정조가 다소 예외적으로 대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 있다. 정조가 너무 잘 대해줬다는 느낌이 드는 인물이다. 노론당 정치 지도자 심환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사도세자가 기득권층에 맞서다가 1762년 뒤주에 갇혀 죽자 조선 정계에서는 그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2개의 진영이 출현했다. 벽파와 시파가 그것이다.

벽파(僻波)는 사도세자가 당한 죽임을 당연시했다. 시파(時波)는 동정론을 폈다. 최대 집단인 노론당은 벽파와 시파로 갈렸고, 제2세력인 소론당은 주로 시파였다. 심환지는 노론이자 벽파였다. 정조에게는 아버지 명예회복이 최고의 목표였다. 그랬기 때문에 노론 벽파 지도자인 심환지는 정조의 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심환지 영정 ⓒ 위키백과

  
청송 심씨인 심환지는 정조보다 22세 많고, 정조의 아버지보다 다섯 살 많았다. 영조 임금 때인 1730년 출생한 심환지는 평균보다 늦은 41세 때 대과 시험에 급제했다. 조선시대의 급제자 평균 연령인 36.7세보다 4년 내지 5년 늦은 때였다.

'늦깎이 고시 합격생'인 그는 엘리트 코스인 사간원·사헌부 등을 거쳤다.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사헌부 대사헌도 역임했다. 선망의 대상인 그런 관직들을 역임하면서 그는 강경한 원칙론자의 면모를 보여줬다. 이 때문에 몇 차례 유배를 가기도 했다. 그가 지도자급으로 부각된 것은 정조 시대 후반기였다. 60대가 된 이 시기에 그는 노론 벽파 지도자로 부각되고,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됐다.

정조 말년에 정치적 거물이 됐으니 심환지는 자신을 기용해준 정조에게 남다른 마음을 가졌어야 했다. 하지만 강경론자인 그는 동료 신하들뿐 아니라 '살아 있는 권력'에게도 매몰차게 대했다. 공개 석상에서 정조의 권위를 무시하기도 했다. 우의정이 되기 전년도인 1797년(67세)에는 실록에 기록될 정도의 사고도 쳤다.

사건의 발단은 실학자 박제가·이덕무·유득공과 더불어 4대 시인 혹은 사가(四家) 시인으로 불린 이서구의 관직 취임 거부였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 부의장 같은 관직인 비변사 제조(겸직)였던 이서구는 정조가 새로운 관직을 주자, 정부 실세인 채제공과의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직무 집행을 거부했다.

정조가 여러 번 재촉했지만 이서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는 화가 났다. 정조 21년 윤6월 11일 자(1797년 8월 3일 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우의정 이병모 앞에서 "누가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는가?"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 말에 심환지가 이의를 걸었다. "명령대로 따르라는 하교는 충분히 지당하지 않은 듯합니다"라며 고대 중국의 이상적 군주인 요임금·순임금 때도 왕명 거부가 용납됐다고 말했다. 왕명이면 무조건 따라야 하느냐며 이의를 건 것이다. 정조의 인사조치에 하자가 있다는 게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정조가 아닌 이서구를 편든 사실은 정조의 권위에 대한 심환지의 태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에서 찍은 정조의 초상화. ⓒ 김종성

  
심환지가 '사도세자의 비극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고 또 정조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자세도 보였지만 정조는 상당히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다른 정적들에게 했던 것과는 명확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이 점은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정조는 심환지가 답장을 보내지 않는 경우에도 계속해서 개인적인 편지를 띄웠다. '읽씹의 원조는 나 심환지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것인지 심환지는 정조가 보내는 서찰을 받고도 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래도 정조는 끊임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정조 21년 6월 24일(1797년 7월 18일)에는 이런 어찰을 보냈다. <정조 어찰첩>의 한 대목이다.
 
소식이 갑자기 끊어졌군. 경은 그동안 잠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어디에 갔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기 싫어서 그랬던 것인가?
 
정조가 집착한 이유

정조가 정적에게 러브레터 같은 편지들을 보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심환지가 공식적으로는 벽파의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정조와의 사적인 관계에서는 사도세자 명예회복에 긍정적인 뜻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2019년에 <대동문화연구> 제105집에 실린 최성환 한국학호남진흥원 연구위원의 논문 '심환지의 정치 생애와 벽파 의리'에서 인용된 <청송 심씨 만포가 기증 고문서>에 따르면 심환지는 정조 앞에서 '사도세자 복권을 추진하게 되면 다른 정파가 아닌 저희가 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벽파의 당론과 어긋나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정조는 열 살 때부터 아버지의 명예회복만을 생각했다. 심환지는 그런 정조한테 사도세자 명예회복에 찬동하는 것처럼 발언했다. 노론 벽파 지도자가 솔깃한 말을 했으니 그때 정조가 얼마나 설렜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정적 심환지에게 정조가 집착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심환지의 말은 거짓이었다. 이 점은 정조가 죽은 뒤에 심환지가 했던 일들에서 잘 증명된다. 그는 1800년에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정조의 새 할머니)와 손잡고 정조의 개혁을 원위치시켰다. 정조의 개혁을 떠받치던 정약용 같은 인물들도 가차 없이 숙청했다.

처음부터 정조의 개혁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정조의 관직 제의를 사양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심환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조가 주는 관직을 받고 정조와 뜻을 같이할 것처럼 해놓고 정조가 죽은 뒤에 앞장서서 그 개혁을 파괴했다.

정조의 개혁은 서민층의 복리를 지향하는 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사도세자 복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의 개혁을 파괴한 심환지의 행위는 사도세자의 복권 가능성을 짓밟는 것이었다. 이는 애초부터 심환지가 사도세자 복권에 관심이 없었음을 드러낸다.

그런 심환지에게 정조는 연애편지 같은 어찰들을 수없이 발송했다. 아버지 복권에 관한 심환지의 달콤한 발언이 정조의 가슴을 흔들어놓은 것이다. 심환지는 그런 정조의 욕망을 이용했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심환지의 신의 결여를 잘 드러낸다. <정조 어찰첩>에 따르면 정조는 심환지에게 '읽은 뒤 없애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심환지는 '삭제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정조 어찰첩>을 돈 주고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9일 서울 성균관대학교에서 김문식 단국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등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 발굴한 정조 어찰 299통 중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모두 정조가 친필로 써 심환지 한 사람에게 보낸 것으로서 정조 말년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국 동향을 파악하는 데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 자료로 평가된다. 2009.2.9 ⓒ 연합뉴스

 
만약 정조가 좀 더 냉철했다면 심환지를 정적으로 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적으로는 벽파이면서도 사적으로는 시파 같은 심환지에게 정조는 마음이 끌리고 말았다. 이 때문에 허송세월 한 측면도 있다.

늦깎이 과거 급제자인 심환지는 정조의 등용에 힘입어 정치적 거목으로 성장했다. 이것이 노론당 내에서 그의 위상을 높여줬다. 그래서 정조는 그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심환지는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환지는 정조를 그저 정적으로 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심환지도 오래 가지 못했다. 정조 사후 2년 뒤에 정치공세를 막아내지 못해 파면을 당했다. 정조가 죽고 2년 뒤인 1802년 그도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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