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 13:53최종 업데이트 20.11.1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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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감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SARS-CoV-2의 유전 정보를 담은 유전체(genome)는 학명이 정해지기 이전인 2020년 1월 말 <란셋>지에 발표됐다. 당시 <란셋>은 이 병증을 유발하는 바이러스가 이전 바이러스와 유전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종류의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것을 밝혔다.

이후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확산되면서 각국 실험실은 코로나19 환자들에게 채취한 시료에서 SARS-CoV-2의 유전체를 분석했고, 불과 수개월 만에 수십만 개의 유전체 정보가 모이게 됐다. 이를 통해 코로나19가 사람들의 이동을 따라 수없이 많은 경로를 반복해서 대부분의 나라로 유입되는 양상을 보였으며, 지금까지 관찰된 모든 SARS-CoV-2 바이러스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사이 중국에서 관찰됐던 바이러스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됐다.


이는 중국에서 크게 확산되기 이전부터 다른 나라에서 코로나19가 이미 유행 중이었다거나, 바이러스의 유래가 중국이 아니라는 가설들을 무효화 시키는 결과다. 또한 인적 교류가 활발한 21세기엔 삽시간에 팬데믹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유전학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했다.

바이러스 유전체 정보는 이밖에도 SARS-CoV-2의 돌연변이율, 돌연변이에 따른 병증과 감염률 변화 추이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할 수 있게 한다.

유전체학 분석 기술과 진화 유전학 이론은 현재 진행형인 코로나19 팬데믹뿐만 아니라 역사에 남은 팬데믹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가 익히 아는 흑사병(Black Plague)의 병원균,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독일 만칭의 집단 무덤에서 발굴된 시신들로, 연구에 쓰인 검체가 포함되어 있다. ⓒ Spyrou et al. 2019

 
페스트균 미스터리

흑사병은 원인균이 공격하는 부위에 따라 림프절 흑사병, 폐 흑사병, 패혈성(혈액) 흑사병 등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대체로 고열과 오한, 구토 등의 증상을 보이면서 점차 신체 여러 부위에 검은색의 괴사를 일으키는 증상이 나타난다. 살갗이 검게 상하면서 죽음을 맞는다는 데에서 흑사병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병세의 진행 속도가 빠르고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짧은 것으로 악명이 높고, 빠른 경우 감염 후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사망률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다. 때문에 추산 방식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유럽에서 피해가 가장 컸던 1346-1353년 사이에 많게는 유럽 전체 인구의 60%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크게 유행하던 시기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부유럽에서 인구의 80%까지 사망했다고 한다.

현대인들에겐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등의 영향으로 유럽에서 참혹한 수준의 사망률을 기록한 14세기 팬데믹이 주로 언급되지만, 사실 이 시기는 흑사병의 2차 팬데믹으로 분류된다. 1차 팬데믹은 대략 6세기에 지금의 중동지역과 당시의 동로마제국에서 큰 피해를 냈던 이른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다. 14세기 유럽에서 다시 시작된 2차 팬데믹은 초기부터 광범위하게 인명 피해를 낸 뒤에 18세기까지 간헐적으로 지역별 대규모 감염으로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전 세계 인구의 1/3 가량인 1억 명 이상이 이 병으로 죽어갔다.
 

닥터 쉬나벨 폰 롬. 흑사병이 유행할 때, 유럽에서는 흑사병 의사가 흑사병 환자의 집을 방문하면 환자가 죽게 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 위키커먼스

 
19세기에는 중국과 인도를 거점으로 3차 팬데믹이 발생해 1200만 명이 사망했다. 현대에 와서는 위생 상태가 크게 개선되고 항생제와 같은 치료제가 잘 보급돼 있지만 아직까지도 종식은 되지 않은 상태다. 가깝게는 지난해인 2019년 몽골과 중국 베이징에서 각각 수명의 사망과 확진 판정 소식이 있었고, 올해에도 콩고민주공화국과 몽골에서 확진자 및 사망자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렇듯 오랜 기간 동안 인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페스트균은 감염된 설치류의 피를 흡입한 벼룩이 사람의 피를 빨 때 전이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정확히 이것이 어디에서 유래해 어떤 경로로 확산했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유럽에 큰 피해를 준 2차 팬데믹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스텝(steppe) 지역에서 유럽으로 건너왔다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확인된 건 아니다. 또한, 유럽 유입 이후 14-18세기 사이에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지역 감염들에 대해서도, 같은 균들이 지속적으로 재발했던 것인지 새로운 유입 경로가 있었던 것인지 여전히 논쟁거리다.

지난 십여 년간 사체(死體)나 화석 등 오래되고 부패한 검체에 남아 있는 손상된 DNA도 서열분석이 가능해지면서, 지역과 시대를 달리하는 페스트균의 유전체 분석 연구도 몇 차례 발표된 바 있다. 그럼에도 아직 데이터가 충분치 않아 '흑사병 2차 팬데믹' 당시 페스트 균이 어떻게 유럽으로 유입되었는가에 대한 답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의미 있는 논문 한편이 발표됐다.

시작은 아시아?
 

논문에서 분석한 34개 페스트 균의 채집 장소와 대략의 추정 연대를 표시해 놓은 지도 ⓒ Spyrou et al. 2019

 
2019년 10월 2일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지에 페스트 관련 논문이 실렸다. 논문은 14-18세기 배경의 유럽 고고학 유적지 10곳에서 발굴한 치아 표본 검체에서 총 34개의 페스트 균 유전체 서열을 복원해 이를 이제까지 발표된 페스트 균 유전체 정보와 함께 분석했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흑사병의 2차 팬데믹은 동쪽(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한 차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연구진은 이 연구에서 복원한 균들과 이미 발표된 200여 개의 현대에 채집된 페스트균의 서열을 분석해 페스트균의 계통도(세균 가계도)를 재구성했다. 세균들이 세대에서 세대로 일정 비율의 돌연변이를 축적하는 것에 착안해 세대와 계통을 알아내는 일로, 사람으로 치면 족보를 그려내는 일과 흡사하다.

분석 결과, 예상한대로 14세기 균, 15-17세기 균, 16-18세기 균들이 순차적으로 계보를 이어 내려가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밝혔다. 흑사병 2차 팬데믹 동안 수세기에 걸쳐 여러 지역감염으로 지속되었던 것이, 14세기에 한창 번졌던 선대 균들의 '자손'들임을 밝힌 셈이다.
 

논문에서 34개 페스트 균과 다른 논문에 발표되었던 페스트 균들을 함께 분석해 재구성한 계통도(가계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선대에서 후대로 이어져 나간다. 14세기의 균들(빨강색과 노랑색), 15-17세기의 균들(초록색), 16-18세기 균들(파랑색)이 순차적으로 그려지고, 서로 계통이 이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선조에 해당하는, 제일 왼쪽(Branch 0)에는 중국(CHN), 몽골(MNG) 등 아시아에서 채집된 균들이 위치해, 그 유래가 아시아임을 암시한다. ⓒ Spyrou et al. 2019

 
이 페스트균들은 중국과 몽골, 키르기스스탄, 조지아 등지에서 발견된 균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였는데, 이것은 2차 팬데믹과 그 이후 계속 번져간 페스트균 후예가 모두 중국과 몽골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균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외에도 논문에서는 유럽에서 14세기 이후 수세기에 걸쳐 흑사병이 지속되는 동안 균들이 여러 개의 계열로 갈라졌다고 봤다. 그 중 하나가 한편으로는 15-17세기 사이에 독일과 스위스 지역에서 발생했던 지역감염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17세기 런던, 18세기 마르세유에서 있었던 지역감염으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였다고 밝혔다. 당시 페스트균이 어떻게 지역에서 지역으로 감염 고리를 형성하며 번져갔는지를 알 수 있는 결과다.

또한 이후 중국, 미국, 마다가스카르, 인도 등 여러 지역에서 채집된 균의 서열도 14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균의 계열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분석됐다. 그간 가설로 논의되던 바와 같이, 유럽에서 창궐했던 페스트균이 다시 동쪽으로,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등지로 퍼져나갔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만, 여전히 흑사병 2차 팬데믹 시기의 유럽 외 다른 지역의 페스트균들은 아직까지 분석된 바가 없는 상태다. 앞으로 더 다양한 샘플들이 새로 분석된다면 어떤 통찰을 더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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