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17 08:49최종 업데이트 19.01.17 08:49
"성폭력은 다스려지지 못한 우발적 성적 욕구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권력관계에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위력의 발현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지난해 서지현 검사의 증언으로 촉발된 미투 정국이 '젠더간의 분쟁' 혹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반격'으로 오인되는 현상을 바로잡으려 할 때마다 울려퍼지던 이 논리는 하늘의 태양처럼 선명했다.


그러나 미투가 증언대에 세운 거의 모든 사건에서 가해자는 남자였고 그것을 폭로한 피해자는 여자였다. 이런 현실은 가해자로 하여금 행위는 있었지만 강압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또렷한 저항의 부재를 무언의 합의로 멋대로 간주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위력과 불평등한 권력관계는 남녀 간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닐진대 우린 남성 피해자를 미투의 증언대에서 본 기억이 없다. 이런 사실이 미투 고발자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어디선가 '꽃뱀'이라고 수근거리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남성 피해자의 등장
 

프랑스 남성들이 법정에 서서 가톨릭 신부들의 성폭력과 이를 교회가 은폐했다고 증언했다. (사진은 본문과 관련 없는 자료사진) ⓒ pixabay


지난주 프랑스 리옹지방법원에서는 추기경 바르바쟁이 법정에 섰다. 자신의 교구에서 일어났던 미성년자들에 대한 성범죄를 은폐해 온 혐의로 재판을 받은 것이다.

그를 고발한 사람들은 38세에서 53세에 이르는 8명의 중년 남성들.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하여 대부분 아버지가 된 이들은 자신들이 8~12살 때 가톨릭 신부가 몸과 영혼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낱낱이 증언했다. 책임을 부인하는 가톨릭 교단을 향해 날린 메가톤급 폭탄이었다.

크리스치앙 뷔르데. 53세. 자신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프레이나 신부와 그의 범행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고위성직자 6명을 고발한 8인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가 법정에 들어서자 무거운 침묵이 법정을 휘감았다. 그는 40년간 자신의 인생을 갉아먹던 고통스런 기억을 만인 앞에서 폭로했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권유로 그는 프레이나 신부가 이끄는 가톨릭 교회의 소년단에 가입하고 그를 따라 캠프를 떠났다.

"프레이나 신부는 저를 자신의 텐트 안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저의 입술에 키스했고, 혀를 입 안에 들이밀었습니다. 차가운 시거의 냄새가 났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선택한 소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너와 나만의 비밀이다."

충격적인 증언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성체를 건네던 바로 그 손으로 나의 성기를 만졌습니다. 당신들은 얼마나 많은 인생들을 이런 식으로 파괴했습니까. 저는 마치 치료될 수 없는 불치병을 앓는 사람처럼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제가 오늘 여기서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저는 오늘 아픔을 안고 이 자리에 왔지만, 저의 고통은 분명 축소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침묵을 깨고 진실을 좀더 일찍 밝혔더라면요."

크리스치앙의 동생인 디디에도 증언대에 섰다. 이어 기소된 6명의 교회 관계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지난 3년여의 시간을 중압감 속에서 살아오셨겠죠. 그러나 저는 40년 동안을 이 끔찍한 소외감과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제 인생은 제가 또 다른 희생자인 프랑수아, 알렉상드르 등을 만나면서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마침내 제가 겪은 일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흘러야만 했습니까?"

그들은 교회가 성직자들의 범행을 방치했고 피해자들의 신고 이후에도 계속 그들이 성직을 수행하게 내버려둔 점에서 가해자와 마찬가지로 막중한 책임을 진다고 판단했다. 8명의 피해자들이 속한 시민단체 '해방된 발언'은 이 피해자들이 오래 전부터 신부의 범행을 고발해 왔음에도 사실을 은폐하고 문제의 신부가 계속 성직을 지속하게 해 온 교회의 책임을 물었다.

1991년 피해 소년 중 한 사람인 프랑수아의 부모들이 교회에 프레이나 신부의 행각을 문제제기 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성직을 쉬었을 뿐 2015년 피해자 중 한 사람이 그를 고발하기 전까지는 소년들과 접촉하는 역할을 줄곧 수행해 왔다.

그 누구도 피해자를 의심하지 않았다
 

프랑스 노트르담 성당 모습. (본문 내용과 관련 없는 자료사진) ⓒ pixabay

 
중년 남성들이 떨리는 음성으로 이어간 고백은 모두의 눈을 아래로 떨구게 만들었다. 이후 이들이 안고 살아왔던 고통에 대해 공소시효니 하는 법적 논리는 모두 잊게 됐다. 

프랑스에서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성범죄의 공소시효는 성년이 된 이후로부터 30년이다. 비교적 긴 공소시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치앙은 더 이상 자신을 유린한 신부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함께 고소한 8명 중에는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피해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동생이 법정에 서서 증언하길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교회가 똑바로 보게 함으로써, 사건을 조직적으로 숨겨온 교회에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가톨릭 교단이 저지르고 은폐해 온 소년 성범죄는 이제 인류에게 너무 익숙한 범죄가 되어 버렸다. 1946년부터 2014년 사이 13세 미만 소년 3677명이 신부들에게 성폭력을 당해 왔고, 최소 1670명의 독일 가톨릭 신부들이 미성년자들에 대한 성범죄에 가담해 왔다고 독일 가톨릭 교회는 지난해에 밝힌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성년자들을 가톨릭 성직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오는 2월말 전 세계 주교들을 소집하여 이 문제를 다루는 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절대 권력과 복종의 룰에 의해 작동하는 군대가 그러하듯 신을 등에 업은 성직자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공간인 종교단체야 말로 위력으로 작동하는 대표적 집단이다. 사제들이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들이 하나같이 피해 사실을 교회에 먼저 알렸다는 점은 피해자들이 여전히 신을 정점으로 하는 절대적 질서 속에 머물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추기경은 자신의 법적 책임을 부인하였으나 그와 함께 피소당한 5명의 피고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뻬리에르 주교는 "우리는 추기경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이 문제가 법정으로 가기 위한 절차를 밟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이미 자신의 범행을 인정한 가해 신부를 비롯하여 은폐에 가담해온 6인의 가톨릭 고위성직자들에 대한 판결은 오는 3월에 나올 예정이다. 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 피해자들은 이미 그들의 "해방된 발언"이 자신을 치유하고 가톨릭 교회의 책임을 세상에 충분히 설득했다고 믿는다.

치유의 시작

동시에 이들의 폭로는 프랑스 사회에 분노를 촉발시켰다. 프랑스 가톨릭 신자의 90%는 교회의 자정장치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으며, 국회 차원의 조사위원회가 마련되어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이고 치밀한 외부의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여전히 신을 믿지만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고 밝혔던 크리스치앙의 경우처럼, 프랑스의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의 종교를 버리는 대신 종교의 목욕물을 더럽혀 온 자들을 벌하기로 한 것이다.

발언하는 것으로 치유는 시작된다. 그것은 아마도 진실이 갖는 치유의 힘일 것이다.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금기의 둑은 허물어지고, 썩어가던 공동체 안에는 비로소 맑은 물이 스미며 새로운 에너지가 약동한다. 미투는 그것이 시작되는 순간 거대한 연대의 고리를 만들고,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에너지를 분출시킨다. 프랑스 남성들이 거기에 접속하기 시작했다. 이후의 세상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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