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8 11:58최종 업데이트 19.10.2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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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는 홍윤하의 입장을 앞두고 모든 불이 꺼졌다. 그녀는 가볍게 왼손 오른손을 툭툭 뻗어보면서 홀로 조명을 받고 있는 케이지를 바라보았다.

2019년 9월 8일 대구체육관, 홍윤하가 종합격투기 일곱 번째 경기에 출전한 날이다. 그녀는 데뷔 후 4연패 하고 2연승을 거뒀다. 이날 시합은 3연승으로 갈지 아니면 다시 침체에 빠질지 분수령이 되는 승부처다.


홍윤하는 케이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어둠 속에서 관원들과 응원 온 친구들이 보였다. 모두 열렬히 "홍윤하, 홍윤하"를 외쳤다. 손진호 관장과 남동생은 뒤에서 "가자! 가자! 이길 수 있어"하면서 용기를 넣어주었다.

여자 종합격투기 선수

입장하면서 그녀는 문득 프로 첫무대에 오르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가슴은 터질 듯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라커룸에서 몸을 가볍게 풀어도 긴장감은 떠나지 않았다.

장내 아나운서가 "홍윤하 입장"을 외치고, 손 관장과 세컨이 "자, 화이팅!"하며 등을 밀어줄 때 홍윤하는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한발씩 다가오는 케이지는 너무 광활했다. 쇠막대기로 울창이 처져있는 감옥이며 어디선가 사나운 들짐승들이 자기 살점을 노릴 것 같았다.

케이지 위에 올라섰는데 상대방 선수는 계체량 때보다 훨씬 더 커보였다. 무섭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결국 그 시합에서 1라운드에서 기절하면서 패배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홍윤하의 연습 모습 그는 늘 꾸준하다. 잘하는 선수가 되는 꿈을 위하여. ⓒ 민병래

 
선수 소개가 끝나자 1라운드 공이 '땡' 울렸다. 이날 마주한 상대는 1승2패의 전적을 갖고 있는 고등학생 선수 김교린이다. 그렇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적어도 종합격투기 무대에 오를 때는 많은 준비를 한다. 언제든 기회가 오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홍윤하는 가볍게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가운데로 나아갔다. 8각의 케이지에 들어서면 검투사와 다를 바 없다. 케이지는 직경 11.5m 넓이에 그물식 철창이다. 그 안에 들어가면 오직 투쟁만이, 격렬한 승부만이 있을 뿐이다.

홍윤하는 김교린과 맞서자 마자 앞으로 나가며 원투를 던졌다. 계속해서 원투를 치고 로킥을 뻗었다. 경기 초반 주도권이 중요하다. 손 관장은 "밀어붙여"라고 소리쳤고 관중석에서도 "코치님 힘내요"라며 관원들이 함성을 질렀다.

이날 작전은 '1라운드 1분'. "거세게 밀어붙여 초반에 혼을 뺏자"라는 것이었다. 상대가 아직 경기 경험이 많지 않기에 경기 초반 압박감을 이용하자는 전략이었다.

홍윤하는 왼손 오른손을 다시 '쉭쉭' 뻗으며 작은 들소처럼 철창 쪽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목을 움켜쥐고 왼쪽 오른쪽으로 니킥을 올렸다. 상대방 숨소리가 뜨겁게 얼굴에 와 닿았다.

홍윤하는 멈추지 않고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상체를 제압하고 바깥다리를 걸어 김교린을 매트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곧이어 상체에 올라타서 왼손 오른손을 번갈아 얼굴에 꽂았다. 상대방은 버둥거리며 몸을 뒤로 비틀었다. 그러자 홍윤하는 뒤에서 누르며 김교린을 감싸안았다. 세컨에서는 "지금이야, 끝내! 끝내!"라고 외쳐댔다. 관중석에서도 함성이 끓어올랐다.

홍윤하가 뒤에서 오른 손으로 얼굴을 내려칠 때 상대의 왼쪽 가드가 순간 약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홍윤하는 왼쪽 팔로 거칠게 김교린의 목을 감싸고 오른손으로 단단히 조였다. 심판이 '기브 업'을 물어봄과 동시에 상대는 급하게 바닥을 "탁탁" 두들겼다. 승부가 끝났다. 1라운드 1분58초 만에 거둔 초크승, 3연승을 거둔 순간이다.

홍윤하는 두 손을 치켜들고 "우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세컨 쪽으로 달려가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관중석에서도 박수와 함성이 끓어올랐다. 홍윤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 하늘로 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넙죽 큰 절을 하며 인사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가쁜 숨은 진정되지 않았다.

이제 도쿄로 가야 한다

3연승의 기쁨도 잠시. 홍윤하는 10월이 되자 22일 도쿄에서 열리는 여성 파이터들의 경기 'DEEP JEWELS(딥 쥬얼스)' 준비에 들어갔다. 이제는 코치도 맡고 있는 '본주짓수 송탄MMA' 체육관에 그녀는 오전 9시경이면 도착한다. 체육관의 문을 열고 스위치를 '딱' 누르면 불빛이 일제히 켜진다. 그러면 밤 사이 적막감을 떨쳐내며 매트 바닥이 스르르 일어나고 어제 땀범벅이 되었던 글러브도 뽀얀 얼굴을 내민다. 샌드백은 제 스스로 몸을 부르르 떨며 인사를 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2시간 정도 개인 훈련을 한다. 
 

체력 훈련에 열중하는 홍윤하 그는 달리기와 체력훈련을 매일 충실히 한다. ⓒ 민병래

 
1990년생으로 올해 서른 살인 홍윤하가 종합격투기 선수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녀는 경찰관을 꿈꿨다. 교통 경찰이었던 아빠는 늘 제복을 입었고 명절도 상관 없이 당직이면 출근했다. 그런 아빠의 모습이 좋았고 멋져보였다. 이모부까지 경찰이어서 자연스레 경찰을 동경했고 법학과로 진학해서 경찰 시험에 응시했다. 두 번 낙방했지만 체력 시험을 위해 간 곳이 주짓수 도장이었다.

여기서 그는 손진호 관장을 다시 만났다. 그는 홍윤하가 중학교 때, 남동생을 따라 나간 합기도 도장에서 만난 코치였다. 손 관장이 주짓수를 배워 송탄에 종합격투기 체육관을 열자 홍윤하가 여기에 다니면서 두 사람은 다시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홍윤하는 개인 훈련에서 5km미터 달리기와 체력훈련을 충실히 한다. 최소 2라운드 5분을 버텨내기 위해서다. 자전거와 런닝머신은 전속력으로 달리다 천천히 달리기를 반복한다. 폭발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이런 노력 덕에 턱걸이는 한 번에 30개 이상, 윗몸 일으키기는 1분에 80개를 거뜬히 넘긴다.

경찰 시험을 위해 시작한 주짓수는 그녀를 흠뻑 사로잡았다. 합기도에 비해 실전에 가까웠고 매트에서 거칠게 뒹글며 꺾고 조르는 운동이 좋았다. 그러면서 주짓수 아마추어 대회에 꾸준히 출전했다. 그게 바탕이 되어 '로드FC'에 2016년 데뷔했다.

종합격투기 선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녀의 부모는 "한번만 더 생각해보라"고 간청했다. 홍윤하는 딱 하루를 더 고민해보고 "매트 위를 구르면 행복하고 '격투가'의 길을 걸을래요"라고 말했다. 부모는 그저 몸 안 다치고 잘 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홍윤하는 웨이트를 마치면 타격 기술을 훈련한다. 손등에 붕대를 묶고 격투기용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 앞에 선다. 잽과 스트레이트를 뻗고 미들킥을 찬다. 훅과 어퍼를 날리며 로킥을 찬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수천 번씩... 

잘하는 선수가 되겠다는 큰 꿈
 

스파링과 실전이 구분되지 않는 훈련 장면 선수부 훈련시간은 실전을 방불케 한다. 훈련을 마친 그는 오늘, 살살했다고 말한다. ⓒ 민병래

 
샌드백은 '퉁! 퉁!' 하고 울음소리를 내고 천장으로 연결된 쇠줄은 "철컹 철커덩" 울린다. 머리는 이내 헝클어지고 이마에서는 맑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숨소리는 거칠어진다. 홍윤하는 이 느낌을 사랑한다. 숨을 헐떡일 정도까지 혹독하게 몰아가는 이 훈련을 즐거워한다.

데뷔하고 그녀는 좀처럼 승리하지 못했다. 승리는커녕 내리 4연패였다. 데뷔전에서는 1라운드 47초 만에 베테랑 후지노 에미에게 패했다. 3개월 뒤 일본 원정 경기에서는 판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계체를 통과하지 못해 감점을 받고 패한 경기도 있었다.

그때 체육관 분위기는 무거웠다. 손 관장도 가슴앓이를 많이 했다. "이겨낼 수 있어"라는 말은 그저 뻔한 말 같고 "이겨내야 해"라는 말은 압박이 될까봐 조심스러웠다. 홍윤하는 그저 말 없이, 더욱 꾸준하게 훈련만 했다. 샌드백을 두들기고, 꺾고 조르고 메치기를 더 다듬어 나갔다. 그러면서 "잘하는 선수가 되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했다.

그 덕분인가. 2017년 10월, 심유리와의 경기에서 판정승을 거뒀고, 지난해 12월에는 백현주를 1라운드 1분 44초 만에 리어네이키드 초크로 꺾으며 2연승을 달성했다. 지난 9월에 김교린을 꺾어 3연승 가도에 올라섰고, 그 후 후원사가 생기면서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조건이 좋아졌다.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10월 22일이 다가오면서 홍윤하는 훈련 강도를 조금씩 높여갔다. 하루 스파링 횟수도 늘리고 아톰급 48kg에 맞춰 감량도 들어갔다. 이번에 승리하면 4연승이다. 일본선수에게 세 번이나 졌는데 설욕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홍윤하, 그녀는 중학교 때 '슈퍼 과자'라고 불릴 정도로 과자를 좋아했다. 그 시절에는 피아노를 열심히 해 음대를 가려 했다.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하며 경찰관을 꿈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케이지위의 악녀, 악바리'라고 한다. 작은 들소처럼 밀어붙이고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그녀의 경기를 보면 딱 어울리는 별명이다.
 

연습이 끝나고 땀에 젖은 머리결로 인터뷰하는 홍윤하 케이지의 악녀인데, 이쁜 악녀다. ⓒ 민병래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말하는 꿈이 있다. "잘하는 선수가 되겠다"는 큰 꿈이다. 그것은 4연승으로 가둘 수 있는 꿈도 아니고 '참피온'이 된 날 달성되는 꿈도 아니다.

"꾸준하게 성장하겠다", "높은 경지에 오르겠다"는 그리고 "하루하루 '격투가'로서 정진하고 살아가겠다"는 꿈이다. 그 마음으로 4연패를 당했던 어려운 시기도 넘어섰다.

그렇기에 이번 10월 22일 승부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은 그저 넘어야 할 작은 고개 마루일 뿐이다. 홍윤하는 그런 마음으로 도쿄행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때
그녀는 얼마나 더 '성숙한 악바리'가 되어 있을까?
그녀는 얼마나 더 '이쁜 악녀'가 되어있을까?
못내 기다려진다.

<홍윤하의 B컷>
  

연습할 때 매서운 눈빛 본주짓수 아카데미 송탄 MMA에서 홍윤하는 코치다. ⓒ 민병래

   

타격기술을 연습하는 홍윤하 그녀의 종합격투기 그라운드기술은 국내 정상급이라고 평가받는다. ⓒ 민병래

   

훈련에 지친 홍윤하 그는 힘들어도 서서 휴식을 취한다. ⓒ 민병래



<홍윤하를 만든 시간들>
 

2013년 , 주짓수시합 2번째 출전때 홍윤하 첫 금메달을 딴 장면. 금메달을 따면 손진호 관장이 수상자들 목마를 태워준다. ⓒ 홍윤하제공

 
  

로드FC에서 첫 승을 이룬 날 4연패하고 첫 승을 이룬 날이다. 왼쪽은 손진호 관장. ⓒ 홍윤하 제공

 
 

2연승 했을 때 사진 왼쪽은 동생, 오른쪽은 관장 손진호. ⓒ 홍윤하제공

 
<홍윤하의 프로필>

1990년  1월 4일 생 161cm, 48kg

경력사항
2019.9 로드 FC 055 (VS 김교린) 승
2018.12 로드 FC 051 (VS 백현주) 승
2017.10 로드 FC 영건스 37 (VS 심유리) 승
2017.06  로드 FC 영건스 34 (vs 아라이미카) 패
2017.3 로드 FC 037 (VS 왕 시안지에) 패
2016.10 딥쥬얼스 13  (vs 아사쿠라 칸나) 패 
2016.5 로드 FC 031 (VS 후지노 에미)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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