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08 09:15최종 업데이트 19.01.09 13:55
 

외설스럽게 생긴 제주 고소리 ⓒ 막걸리학교


소줏고리는 소주를 내리는 도구다. 소줏고리를 고조리라고 부른다. 고조리의 어원을 찾다가 '고주망태'라는 말을 만났다. 고주망태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나 사람을 칭한다. 망태는 망태기, 주머니라는 뜻인 줄 알겠는데, 고주는 무슨 뜻일까?

고주는 고조에서 왔다고 한다. 고조망태가 고주망태가 됐다는 것이다. 고조는 <훈몽자회>(1527년에 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에 나오는데, 고조 조(槽), 고조 자(榨)라고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 고조가 술을 거르거나 짜는 틀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역어유해>(1690년에 간행된 중국어에 한글 음을 단 어학서)에서 고조목술(鋼頭酒)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고조목술은 술주자(酒榨)에서 갓 뜬 술을 뜻한다. 여기서도 고조는 술주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술을 짜거나 거르기 위해 술을 잔뜩 담은 주머니를 고조망태, 고주망태라고 함을 알 수 있다.

고조리의 원리

이쯤 되면 고조리를 쉽게 해독할 수 있다. 고조리의 '리'자에 별다른 뜻이 담겨있지 않으니, 고조리는 고조와 같은 의미로 술을 거르거나 짜내는 기구가 된다. 다만 고조리는 막걸리나 청주를 거르는 틀에서, 소주를 내리는 기구로 그 의미가 확장 또는 전이된 것으로 보인다. 소줏고리의 고리도 고조리와 친근감이 있어 보이지만, 좀 더 두고 보기로 한다.

소줏고리, 고조리는 맵시 있는 장구처럼 생겼다. 색깔도 오지색이라 옻칠이 된 장구 같다. 허리가 잘록하고, 위아래로 나팔처럼 퍼져나갔다. 아래는 훤하게 트여있고, 위는 물을 담을 수 있는 자배기처럼 생긴 게 틀어막고 있다.
 

웃박이 큰 고조리, 순천의 옥산가의 고조리를 모본으로 창아트에서 만들었다. ⓒ 막걸리학교

 
옹기장이들은 아랫단을 밑박, 윗단을 웃박, 막힌 윗부분을 속박이라고 부른다. 생김새도 다양하여 밑박이 치마폭처럼 넓고, 웃박이 색시 저고리처럼 품이 좁은 게 있다. 또한 웃박이 헬스클럽 트레이너의 상체처럼 삼각으로 퍼졌지만, 밑박은 주저앉은 듯이 짧은 것이 있다.

속박은 몸체와 붙어있는 것이 많은데, 때로 몸체에서 분리되는 것도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잘록한 허리 부분에 긴 봉이 하나 빠져나와 있다. 소줏고리의 몸통에서 대처럼 빠져나와 있어 '소줏대'라고 하는데, 그곳으로 액화된 소주가 흘러나온다 해서 주둥이, 뾰족 튀어나왔다 해서 코, 짓궂게 고추라고도 부른다.

고조리는 혼자서는 소주를 만들지 못한다. 고조리와 짝을 이루는 솥이 있어야 한다. 솥에 술을 붓는데 이때 탁주거나 청주거나 상관없다. 솥 위에 고조리를 얹고, 솥과 고조리 사이로 증기가 새지 않도록 찰기 있는 곡물로 번을 한다. 비로소 소주를 내릴 수 있는 장치가 완성된다.    
 

소주가 만들어지는 원리 ⓒ 고정미

 
그리고 고조리 윗부분인 속박에 찬물을 붓는다. 불을 지펴서 술을 끓이는데, 처음엔 센 불로 하지만 술이 끓기 시작하면 불을 약하게 줄인다. 잔불이나 숯불 정도로 줄여놓고 느긋하게 술을 끓여댄다.

에틸알코올은 78.4℃에서 끓기 시작하는데, 솥 안의 술 도수가 10%쯤 된다고 하면, 에틸알코올의 순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90℃ 가까운 지점에서 증발하기 시작한다. 증발된 에틸알코올은 고조리 속을 돌다가 차가운 속박의 밑바닥에 부딪혀서 액체가 된다.

천정에 해당하는 속박은 솥뚜껑처럼 둥글게 생겼다. 뜨거운 증기가 액체가 되면 차가운 속박의 가장자리로 흘러내려 떨어지게 된다. 떨어진 액체는 밑박과 웃박 사이의 잘록한 허리에 나 있는 홈을 따라 돌다가 소줏대를 타고 바깥으로 이슬방울처럼 떨어진다. 그래서 붙여진 소주의 다른 이름이 이슬 로(露)자를 쓴 노주(露酒)이다.

한민족의 문화유산

고조리는 외설스럽다. 특히 제주도로 넘어가면, 고조리는 고소리가 되고, 소주 이름으로 옮겨와 고소리술이 된다. 고소리술은 제주 오메기술을 증류해 만든 소주의 이름이다. 제주의 소줏고리들은 육지 것보다 더 짓궂게 생겨, 남자의 성징을 상상하기 좋게 만들어두었다. 몸통과 이어진 소줏대 부분이 음낭처럼 벙벙하다. 어떤 옹기장이는 소줏대 위에 아예 힘줄까지 그려 넣기도 한다.

물론 소줏고리의 몸통에 달린 소줏대 부분에 벙벙한 주머니를 만들어둔 것은 과학적인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흙은 화산토라서 점성이 떨어져서 항아리든 고소리든 크게 성형하기가 어렵다. 크게 성형하면 굽다가 휘거나 주저앉게 된다.

그래서 육지 것보다 제주 항아리는 작고, 고소리도 작다. 작다 보니 고소리 안에서 증발한 알코올이 돌아다닐 공간이 좁아 소줏대를 타고 연기처럼 곧장 빠져나오게 된다. 이를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해 몸통과 소줏대 사이에 주머니 같은 여유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서 증기가 회전하거나 냉각되게 했다.

고로 제주 고소리만이 아니라 크기가 작은 육지 고조리도 주머니 공간이 달린다. 주머니 공간은 증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마련된 장치였지만, 옹기장이들은 그곳에 웃음거리까지 빚어 넣었다.
 

밑박이 넓은 고조리 ⓒ 막걸리학교

 
고조리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문화유산이다. 고려 시대 몽골침략기 때에 증류 원리와 함께 증류기가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한민족은 독창적인 옹기 고조리를 만들어냈다. 옹기 형태의 증류기는 다른 나라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나라의 소형 증류기는 나무로 짠 목통이나 구리(銅)로 돼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정감 있는 소규모 증류기는 아시아에서는 한국의 고조리이고, 유럽은 알람빅 동증류기이다. 두 개의 증류기가 동서양을 대표하는 증류기라고 꼽아줄 만하다. 또한 옹기가 주로 항아리와 같은 저장 용기로 쓰이는데, 고조리는 제조 기구라는 점에서 옹기 중에서도 기발하고 특이한 걸작이다.

우리 민족의 흙을 다루는 탁월한 솜씨와, 흙과 친했던 문화를 고조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밀주 단속과 함께 오래도록 우리 곁을 떠나있었던 고조리, 그 균형감 있고 독창적이고 짓궂고 외설적인 고조리를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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