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12 09:26최종 업데이트 19.03.12 10:04
타이완을 여행했다. 대만 금문고량주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금문도를 가려면 다시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한다. 또 다른 고량주 팔팔갱도 고량주의 숙성 갱도를 찾아가려해도 배를 타야 한다. 수도 타이베이에서 가까운 양조장이 없을까 지도를 보다가 한때 양조장이었던 화산1914문창원구(華山1914文創園區)를 발견하게 되었다.

확 달라진 옛 양조장
 

시민들이 광장과 문화공간이 된 화산1914문창원구 ⓒ 막걸리학교

 
평일 해거름에 화산1914문창원구를 찾아갔다. 사무실로 쓰였을 2층 건물 한 동과 시옷자형 지붕을 인 단층 창고 건물이 연달아 있었다. 주변은 고층건물과 고가도로가 있는 도심 한복판이다. 연결된 광장에 무대가 있고, 요란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와 연인들이 느린 걸음으로 단층 건물들 사이로 열린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길 끝에서는 길거리 공연 음악 소리가 났다. 이곳이 모두 양조장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넓었다. 창고식 건물에는 소소한 기념품 가게, 옷가게, 카페, 공연장, 체험장, 영화관 등의 문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광장, 거리, 나무, 창고, 복도, 교실, 천정, 유리창, 담쟁이넝쿨이 잠깐 걸어본 그곳에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처음 와본 곳이지만, 추억 속의 공간을 다시 걷고 있는 듯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이곳이 모두 양조장이었다는 사실은 건물 복도 끝에 있는 벽보를 보고 알 수 있었다. 1914년에 민간 회사로 방양사(芳釀社)라는 주창(酒廠)이 창업되어 노홍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896년부터 일제 강점기에 들어섰으니, 그때는 대만 총독부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대만총독부가 소금, 장뇌, 담배에 이어 1922년부터는 술까지 독점하게 되었다.
 

화산1914문창원구 안에서 거리공연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 ⓒ 막걸리학교


방양사 주창은 1929년에 총독부가 관리하는 제조장으로 바뀌었다. 1945년 해방이 된 뒤로는 중화민국이 이를 그대로 승계하여 관리하였다. 1987년에 양조장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도심 속 빈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1992년에 한때 병원으로 사용되었지만 이런저런 논란이 되었다. 1997년부터 작가들이 화산 구역을 예술 문화 공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7년 화산1914문창원구로 탈바꿈하게 되고, 시민들의 문화 공간이 되었다.


양조장이 공원이 되다니, 내게는 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때로 운영되지 않는 양조장 건물이 술박물관으로 살아남는 외국의 사례가 있지만, 대개는 신축 건물이 들어서 사라지는데 화산 1914는 달랐다.

이는 대만의 특수한 술 정책과 문화가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대만에서는 술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윤을 중앙권력이 독점하고 착취했다. 양조장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총독부 소유였고 국가의 소유였다. 도로, 전기, 수도와 같은 공공재를 다루듯이 했다. 그러면서 양조장은 경쟁하지 않고 규모를 키울 수 있었다.

대만에서는 양조장을 주창(酒廠)이라고 부른다. 실제 운영되는 주창을 가보고 싶어 타이베이역에서 기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의란(宜蘭) 시를 찾아갔다. 의란역에서 1㎞ 떨어진 거리에 주창이 있었다.
 

이란주창 안에 보관된 술항아리들. ⓒ 막걸리학교


의란주창 입구에는 고량주 숙성 항아리가 주창 건물 벽을 가릴 정도로 높게 장식되어 있었다. 양조장 안의 첫 번째 건물에서는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양조와 관련된 주제는 아닌, 시민들의 작품 전시회였다.

두 번째 건물은 홍국관이었다. 의란주창에서 붉은 누룩으로 술을 빚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간인데, 지역 상설 장터 분위기가 더 짙었다. 홍국관을 나오니 젊은 남녀가 누구의 안내도 받지 않고 익숙하게 양조장 건물 사이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양조장 건물 사이 젊은 남녀, 따라가 봤더니
 

이란주창의 술상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 ⓒ 막걸리학교


그들을 따라갔다. 그러자 빈병이 들어있는 노란 술 상자가 담장 높이로 쌓인 공장 빈터가 나왔고, 또래의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낯선 풍경 속을 찾아온 청년들이었다. 반복된 술상자의 이미지와 검회색 창고 건물을 배경으로 일그러진 표정이거나 자신감 넘치는 몸짓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동일한 패턴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잡지 화보를 찍는 듯했지만, 렌즈 좋은 카메라는 하나만 눈에 띌 뿐 모두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빈터에 울려 퍼졌다. 그들에게 이곳은 멋진 양조장일 필요도, 견학 코스가 잘 짜인 양조장일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일요일이라 양조장 직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양조장 주인이 보았다면 꽤나 당혹스러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의란주창 술박물관 앞에서는 마을 악사가 트럼펫을 불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는 길목에는 꼬치구이를 파는 포장마차와 간이식당이 있었다. 선물가게에도 주창의 대표 술인 황금주와 노홍주만이 아니라, 마을 특산품도 팔았다. 양조장은 마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대만에서 주창이 국가 독점산업에서 풀린 것은 2002년 일이다. 현재 의란주창은 대만술담배공사에서 운영하고 있다. 비록 술은 공공재가 아니지만, 술을 만드는 공간이 공공성을 띠고 있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의란주창을 보고서 도심 재생 공간인 화산1914 공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술은 개인이 만드는 게 아니라, 국가가 만드는 것이라는 등식이 대만에 있지만, 그 도정 속에서 양조장 공원이 생겨났다.

양조장 단층 건물 자리에 60층 빌딩을 지을 수도 있었겠지만, 수직 공간이 아니라 수평적인 광장과 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은 화산1914 공원의 놀라운 점이었다. "이제 도시는 빌딩이 아니라 광장과 공원이 필요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독점 권력이 아니라 작가들이 중심이 된 시민 권력이 화산1914 공원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 깊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