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6 14:34최종 업데이트 19.10.1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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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하도 주관이 뚜렷하니까 이제 반대까지는 하지 않지만, 실망감을 숨길 수가 없어서 대하기가 영 껄끄러워요. 대체 왜 편하고 좋은 길을 놔 두고 힘들고 불안정한 길을 가려고 하는 걸까요?"

20~30대가 원하는 '좋은 일'의 기준에 대해서 연구하고 책을 낸 이후로, 20~30대 자녀를 둔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위와 같은 식의 고민을 들은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 분들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사회적 성취를 경험한, 그러니까 학창시절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을 나왔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고, 50대 후반쯤의 나이에 이르도록 큰 어려움 없이 사회생활을 해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들이 이해할 수 없어 하는 자녀들 역시, 어려서 크게 부모 속 썩인 일 없는, 제 할 일 알아서 잘 하는 모범생들이었다. 그래서 '좋은 대학' 가는 것까지는 부모가 만족할 만한 성취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좋은 직장'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그 중 한 사례를 약간 각색해서 설명한다면 이런 식이다. 전문직 자격증을 따낸 딸이 누구나 부러워 할 만한 대기업에 입사했기에 부모는 이제 걱정할 일이 없겠다고, 곧 좋은 사람 찾아 결혼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딸은 2년 남짓 다니더니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번아웃'(burn out)이 됐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모아 놓은 돈으로 여기 저기 여행을 다니고, 운동을 시작하고,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하기도 했다. 

부모는 걱정이 됐지만 그 전까지 모범생으로만 살아온 딸이어서 선택을 존중해 주려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1년쯤 쉰 뒤에는 다시 취직을 했다. 자격증 덕분에 재취업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부모의 관점으로 볼 때는 처음 들어갔던 대기업보다는 못 한 곳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잘 적응해서 오래 다니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번에도 딸은 2년 정도 다니고는 사표를 내고 1년 가까이 쉬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부모의 잔소리도 늘었다. 

"그런 식으로 직장을 짧게 짧게 다녀서 어떻게 인정을 받고 승진을 하겠느냐? 끈기 없이 직장을 옮겨 다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면 갈수록 좋은 기업에 취직하기는 힘들어질 텐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작정이냐?"

아마도 여기에는 '그래서 언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겠느냐?'라는 잔소리도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달리 딸은 불안해 하는 기색이 없고, 이렇게 반문할 뿐이다.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 거예요. 앞으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엄마 아빠는 왜 불안해 하세요?"
   
자유를 가진 사람일수록 단기근속을 택한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출근하고 있는 직장인들. ⓒ 연합뉴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막 40대에 접어든 입장에서 반쯤은 부모의 마음이 이해됐다. 그런 한편, 20~30대가 원하는 노동에 대해서 몇 년간 연구한 입장에서는 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 멋지다는, 참 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20~30대 몇 명에게도 이 이야기를 들려줘 봤다. 한결같은 답이 돌아왔다. 

"와, 진짜 멋지게 사는 분이네요. 저도 딱 그렇게 살고 싶은데, 부러워요."

이밖에도, 그 어렵다는 공기업 공채에 합격하고도 미련 없이 그만뒀다는 사람,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직 전환 기회가 왔는데도 거절하고 1~2년 단위로만 일한다는 사람, 오래 공부해온 유망한 전공을 뒤로 하고 요리사가 되기 위해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사람 등, 최근 1년 안에 들은 사례들만 꼽아봐도 이 정도다. 

이 사례들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안정되게', 엘리트이자 기득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꽤 좋은 대학 출신이라는 등의 '스펙'이 있고, 입사 경쟁률을 뚫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다. 이 두 가지는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자격'이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자산이 있다. 자녀의 진로를 이토록 걱정하면서 믿어주려고 하는 부모, 실패했을 경우에도 어느 정도 지탱해 줄 수 있는 부모라는 자산이다. 즉, 한국 사회에서 원하는 일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 청년들일수록 '단기근속자'가 되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기근속 후 정년퇴직'을 가장 바람직한 직장 생활의 상으로 여겨 온 부모 세대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부모 세대의 안정성, 자녀 세대의 안정성

왜 부모와 자녀 세대의 생각이 이토록 다른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안정성에 대한 생각의 차이다. 부모 세대가 볼 때, 안정성이란 크고 확실한 조직에서 오래 일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채용시장에서 가치가 제일 높을 때 최대한 큰 조직에 들어가야 한다. 이후에도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하고, 적절한 시기마다 뒤처지지 말고 승진도 해야 한다. 그래야 조직이 어떤 위험에 직면하더라도 밀려날 위험이 덜하다.

그렇게 한 직장에 오래 다녀야만 집도 사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아갈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정상 가정'을 꾸리는 것이 진짜 안정성이라고 부모 세대는 믿고 살아왔다.

그렇지만 사실은 부모 세대도 알고 있다. 그 믿음이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로 한국 사람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 기업'이란 없고, 기업이 위기에 빠지면 대규모 정리해고부터 한다는 것도 경험했다. 그럼에도 그 믿음에 매달리는 것은, 다른 길을 알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런 풍파 속에서 어떻게든 조직에서 밀려나지 않고 버틴 사람들이 지금 자산도 있고 연금도 있는 채로 안정된 노후를 맞이한 것을 봐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반면, 같은 현상을 보고도 그 자녀 세대는 다른 것에 주목한다.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가이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자세히 알지도 못 하고, 채용시장에서 값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서 들어간 직장에서 정년퇴직까지 일 해야 하는 삶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에,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내야 하기 때문에 적성에 맞건 안 맞건, 가치관에 부합하건 아니건 계속 일해야 하고 어떻게든 조직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버티고 견뎌야 하는 삶은 얼마나 부자유스러운가? 그렇게 버티던 조직에서 끝내 나가야 할 일이 생긴다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선택지는 얼마나 있을까? 

이런 점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하나의 '조직'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적극적으로 만들면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직장을 그만뒀다가도, 한동안 쉬었다가도 다시 일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 진짜 '안정성'이라고 여길 만도 하다.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부터 적극적으로 그런 삶을 개척해 보이고 있다는 것을 위에서 나열한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삼성그룹 신입사원 채용 직무적성검사를 치른 취업준비생들이 고사장을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문제는 가잔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

문제는 그런 여유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다. 도처에 널린 '취업률 1위 대학', '취업률 100% 보장 자격증' 등 정보 속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가진 자원을 대부분 쏟아 넣어야만 그 자격 하나를 획득할 수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은 과연 그 결과로 좋은 일자리들을 찾고 있을까? 어렵사리 찾아 들어간 직장이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도, 혹은 자신의 육체나 정신을 파괴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여겨져도, 다른 선택을 하기에는 가진 자원이 부족해서 그만두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 즉, 나쁜 일을 거절할 자유가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어쩌면 '단기근속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손꼽히는 '초단기근속국가'다. 3년 이내에 직장을 옮기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한국의 일자리 관련 제도들은 대부분 단기근속자들에게 지극히 불리하다. 한국에서는 한 번 직장을 그만두면, 그리고 몇 년 쉬고 나면 경력에 손해를 입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분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경력단절여성'이라는 말이 거의 보통명사가 됐을 정도로 여성들에게 이 문제가 집중돼 있지만, 사실 남성들의 상황도 별로 다르지는 않다. 경력 단절을 감내할 수 없기에 몸이 아파도, 정신적으로 지쳤어도, 직장을 그만두지 못 하는 남성들이 많을 뿐이다.

직장을 자주 옮기는 사람들도 손해를 본다. 근로기준법 상 연차휴가는 장기근속을 해야 쌓인다. 그나마 지난해 '신입사원에게도 휴가를'이라는 입법 캠페인 덕분으로 입사 후 2년 동안 휴가가 7~8일에 불과했던 점은 개선됐다. 그래도 3년 이내에 직장을 몇 차례 옮긴 사람이라면 사회생활을 한 지 10년 가까이 되더라도 연간 최대 15~16일밖에 휴가를 못 쓴다. 한 직장에서만 10년 이상 다녀야 비로소 연차 휴가가 20일을 넘어간다.

물론, 근로기준법 상의 연차휴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법정 최저선이다. 법으로 최저임금 정했다고 모든 임금을 거기에 맞출 필요는 없듯이, 연차휴가를 법정 최저선에 맞출 필요는 없다. 조직마다 노사가 협의해서 휴가를 늘리거나, 휴가 부여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신입사원부터 대표까지 차별 없이 누구나 연간 25일의 휴가를 쓰도록 하는 식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조직율이 10%대에 불과하고, 노사가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협의하는 문화가 거의 없는 한국에서 쉽지 않은 일인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장기간의 휴가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휴가 가기 위해 사표를 내는' 현상도 나타난다. 일정 기간 쉬기 위해서 이직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 직장에서 연차휴가를 새로 쌓아야 하므로 또 휴가가 모자라는 악순환이 생긴다.

그밖에 실업급여, 국민연금에 있어서도 단기근속자의 경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단기근속자들은 자발적으로 퇴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실업급여를 받지도 못 한다. 국민연금을 꾸준히 붓지 못 해 노후도 불안해진다. 

단기근속자들에게 지극히 불리한 사회

최근 논의되는 '정년 연장'도 단기근속자들이 많은 사회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현재 정년 연장은 노인 빈곤 문제와 연결돼 있지만, 연공서열에 따른 고연봉자들에게 지니치게 유리한 제도라는 비판도 있다. 청년기에 한 직장에 들어가서 30~40년 다닌 후에 정년퇴직 하는 사람들만을 놓고 보면, 이미 상당한 연봉과 근로조건을 누리고 있는데 그 기간을 연장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다. 

그렇지만 단기근속자들이 많은 사회에서라면 연공서열만으로 퇴직 직전에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년을 법으로 정하는 것은 단순히 일반적인 조직에서 직원들이 몇 세까지 일할 수 있는지를 정하는 기준이 될 뿐이다.  따라서 정년 연장을 논하려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그 의미가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제대로 파악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갑론을박만 이어질 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기근속을 하건 단기근속을 하건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능력과 경력이 있어서 채용된 사람들조차도 '계약직' 혹은 '비정규직'이라는 구분 때문에 공채로 채용된 '정규직'에 비해서 이런저런 차별을 받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현상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일과 관련된 법과 제도 개선은 상당히 빠르게, 다방면으로 이뤄지고 있는 편이다. 그 지향점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미 현실에서는 장기근속사회에서 단기근속사회로의 전환이 상당부분 이뤄져 있고, 특히 앞으로 수십 년 일하며 살아갈 청소년, 청년 세대의 지향이 단기근속사회에 가깝다. 그런데도 제도를 그에 맞게 바꿔가지 못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틈에 끼여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 부모가 특권층이 아닌 사람들에게 그 고통은 더 집중될 것이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큰 틀의 변화를 위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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