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08 15:56최종 업데이트 19.11.0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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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교사건(1937년 7월)을 핑계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그해 12월 중국국민당 정부 수도인 남경(난징)을 점령한다. 일본군은 이듬해(1938) 여름 후난성 경계까지 진출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창사(長沙)와는 지척으로 임정 요인과 가족들은 다시 피난길에 오른다. 수로와 육로를 이용, 광저우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동산백원'에 청사를 마련한다.

임정 요인과 가족들 숙소는 아세아여관으로 정한다. 그러나 전쟁이 심화되면서 일제의 폭격이 거세지자 그해(1938) 9월 김구는 어머니(곽낙원 여사)와 임정 가족들을 불산(포산: 광저우 위성도시)으로 이주시킨다. 그곳에서 장기체류할 거라는 가족들 예상은 빗나갔다. 10월 초순을 넘기자 일본군이 불산 근처까지 진격해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

옛날 신문들은 10월 20일 무렵 광저우가 함락 직전에 처했음을 보도하였다. 아래는 당시 광동(광저우) 지역 전황을 전하는 1938년 10월 22일 치 <동아일보> 기사(제목: 광동 시가 사도화, 시민에게 강제 철퇴 명령, 완전 함락은 금후 2주간 이내)의 한 대목이다.
 

광저우 지역 전황 알리는 1938년 10월22일 치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일본군 절박(日本軍 切迫)'의 소리에 협위(脅威)된 광동 시민(廣東 市民)은 속속 피난(續續 避難)하고 시내(市內)는 인영(人影)이 적어 전연 사도화(全然 死都化)한 관(觀)이 잇다. 주요(主要)한 여관(旅館)은 거의 폐쇄(閉鎖)하고 상점(商店)의 폐점(閉店)은 약 8할(約 八割)에 급(及)하고 잇다."
 

신문은 '일본군의 군홧발 소리에 위협을 느낀 광동 시민은 속속 피난을 떠났으며, 시가지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뜸해 죽은 도시가 됐다. 주요 여관은 대부분 폐쇄하였고, 폐점한 상점이 8할에 이른다.(기자 주)'라고 보도하고 있다.

홍콩 21일발 뉴스는 "광동 정부는 군사 당국의 명령으로 시민에게 강제로 철수할 것을 명하였다. 지난 20일 이후 도로는 피난민과 가재도구를 적재한 차들로 혼잡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당국은 전례 없는 경호병급 위생대를 동원하여 집단으로 피난시키고 시내 각종 승용차를 전부 징발했다"라고 전한다.
 

임시정부가 이동할 때 사용했던 목선(출처: 임시정부 항주 기념관에서 찍음) ⓒ 조종안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고난의 대장정'은 다시 시작된다. 임시정부가 동산백원에 사무실을 개설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피난 보따리를 싼 것. 칠흑같이 캄캄한 10월 19일 밤, 불산의 임정 가족들도 중국 정부가 주선해준 삼수(三水)행 열차에 오른다. 기차는 일본군 공습이 있을 때마다 멈췄고, 사람들은 역내 급수탑이나 철도변 사탕수수밭으로 몸을 숨겼다.

삼수에 도착한 임정 가족 100여 명은 류저우까지 수로(珠江)를 이용한다. 대가족이 목선 두 척을 빌렸으나, 뱃길 역시 험난했다. 사공이 도망치는 바람에 20여 일을 허비하기도. 선상생활이 한 달가량 지속됐으니 식량이 떨어져 배를 곯아야 했음은 물론이다. 임정 가족들은 11월 30일 류저우에 도착한다. 생사를 넘나든 피난길은 그렇게 40여 일 동안 이어졌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일본군은 1938년 10월 25일 오후 6시 삼수를, 이튿날 저녁 불산을 점령한다. 이는 임정 요인과 그 가족들이 사지나 다름없는 불산에서 '천우신조'로 탈출했음을 추정케 한다. 조국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던 애국지사들. 당시 피난살이 40여 일의 임시정부를 정정화 여사는 <장강일기>에서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라고 표현하였다.

임정 요인들이 묵었던 건물 '낙군사'   
 

마안산 전망대에서 류저우 시내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탐방단(도심을 U자로 감싸며 흐르는 물길은 유강·柳江) ⓒ 조종안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여섯째 날(6일)은 중국 '광서장족(廣西壯族) 자치구' 제2의 도시 류저우(柳州)에서 시작했다.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낙군사(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진열관), 어봉공원(魚峰公園), 유후공원(柳侯公園), 삼일독립만세운동 제20주년 기념식이 열렸던 용성중학교 등을 돌아봤다.

일행은 전날(5일) 광저우 일정을 마치고 오후 5시 45분 고속열차로 이동했다. 광저우~류저우 거리는 약 600km, 시속 180~250km로 달리는 고속열차로 약 3시간 30분 소요됐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기차여행은 낭만이 동행한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임정 가족 피난길 장면들이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흐릿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전날 자정이 돼서야 호텔에 도착, 체크인하고 새벽 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류저우 일정은 여유 있게 진행된다는 가이드 설명에 평소보다 한 시간쯤 늦은 오전 7시에 일어났다. 오전에는 아침을 먹고 호텔 로비에서 일행과 좌담회를 갖는 등 휴식을 취했다. 점심도 근처 간이식당에서 중국식 햄버거와 쌀국수로 해결하고 일정을 오후 1시쯤 느긋하게 시작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묵었던 낙군사 ⓒ 조종안

 
첫 방문지는 어봉구 유석로에 소재한 낙군사. 책 <임정로드 4000km>에 따르면 1920년대 말 러시아가 세운 프랑스식 건물로 처음에는 버스터미널로 사용되다가 1935년부터 '낙군사'라는 간판을 걸고 여관으로 운영됐다. 이 건물은 임정 요인들이 묵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머물렀다는 구체적인 문헌이나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낙군사에 도착하니 하얀색 현판 글씨('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진열관')가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한다. 그러나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건물 1층과 2층에 상하이, 류저우, 충칭 임시정부 항일투쟁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는데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었던 것. 창문으로 들여다본 실내는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처럼 스산해서 더욱 안타까웠다.

한중 우호증진에 기여했던 '광복진선군'
 

광복진선군 기념사진(출처: 독립기념관) ⓒ 독립기념관

   

광복진선군 기념사진 찍었던 유후공원 음악당 앞 최근모습 ⓒ 조종안

 
일행은 큰길 건너편에 자리한 어봉공원 마안산(馬鞍山)에 올라 류저우 시내를 조망하고 내려와 유후공원으로 이동했다. 1938년 11월 류저우에서 결성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아래 광복진선군)가 1939년 4월 임시정부를 따라 치장으로 옮겨가기 전 중국 청년 공작대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소다. 정확한 위치는 유후공원 음악당(음악정) 앞 휘어진 나뭇가지 아래.

"광복진선군이 중국 친구들과 함께 이별의 사진을 이곳 유후공원에서 찍었습니다. 그들이 공연한 장소도 이 옆에 있어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류저우에 와서 처음 한 일이 광복진선군을 조직해서 활동을 시작한 겁니다. 그때가 1938년 11월인데, 후방에서 일제의 폭압을 알리는 일을 했죠. 다시 말해 전쟁이 살짝 피해갔던, 그래서 후방이나 다름없던 류저우 지역에서 사람들에게 전쟁이 이렇게 불행한 것이라고 제대로 알린 겁니다."
 

김종훈 기자는 "광복진선군은 중국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투쟁 대열에 동참하도록 공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특별 조직으로 중국 청년공작대와 합작해서 활동했다, 거리에서 횃불을 들고 공연하는 등 한중 양국 우호 증진에도 기여했고, 실제 성과도 컸다. 광복진선군 대원으로 참가하겠다고 나서는 중국인도 생겨났다"고 덧붙였다.

김 기자 해설이 끝나고 안내판을 보니 마침 한글로도 소개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읽어보니 웬걸, 임시정부나 광복진선군 관련 내용은 없었다. 눈을 씻고 훑어봐도 보이지 않았다. 음악당 설명을 한글로 소개하면서 언급하지 않았다니... 아쉬움을 뒤로하고 근처에 자리한 용성중학교로 방향을 잡았다.

한국독립선언 20주년 선언문 선포했던 용성중학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거행한 삼일절 기념행사(1921) ⓒ 임시정부 충칭 전시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 직후에도, 윤봉길 의사 의거(1932년 4월) 이후 시작된 고난의 대장정 기간에도 신년회, 개천절, 삼일절 등 국가적 주요 행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용성중학교 역시 제20회 삼일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이 열렸던 역사적 공간이다. 당시 임시정부는 광복진선군 연합선전위원회 이름으로 개최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가 삼일혁명 20주년 기념식이 열렸던 장솝니다. 임시정부 요인과 각 독립단체 대표 등 100여 명이 참석했던 그 날이 1939년 3월 1일이었죠. 김구 선생이 연설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이동녕 선생은 아까 우리가 류저우기념관(낙군사) 1층에서 봤듯이 이동녕 선생과 호찌민 선생 사진이 걸려 있었잖아요. 그래서 당시 이동녕 선생이 여기에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기념식은 광복진선군 대원들이 무대에 올라 애국가를 제창한 후 열렸는데 행사 끝나고 한국독립선언 20주년 선언문도 발표하죠. 말씀드린 대로 이곳(용성중학교)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삼일혁명 20주년 기념식이 열린 장소고요. 또 하나는 류저우 지역에서 활동했던 광복진선군이 마지막으로 이별한 곳이 우리가 방금 다녀온 유후공원이기 때문입니다."
 

탐방 여섯째 날도 뿌듯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서너 차례 쏟아진 소나기와 시원한 바람까지 우리를 도왔다. 다른 날에 비해 일찍 탐방을 마친 일행은 용성중학교 근처 공차(貢茶) 전문 찻집으로 옮겨 휴식을 취한 뒤 저녁을 먹고 충칭(중경)행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으로 이동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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