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 14:01최종 업데이트 20.06.1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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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본격적으로 '어슬렁거리기' 위한 복장이 필요하다. 한 줌 바람이 통할 만한 느슨한 옷차림과 만 보를 걸어도 거뜬한 신발 착용은 산책의 첫 번째 조건이다.

두 번째 조건은 산책할 공간의 느슨함이다. '느슨한 공간'은 '시간'과 '장소'라는 물리적 조건이 부합돼야 한다. 어슬렁거리는 산책자에게는 느긋한 시간과 위압감이 들지 않는 공간 분위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들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국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한국 정치 1번지, 국회의사당 언저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일상의 국회, 일상의 민주주의

고백하자면, 나에게는 '국회 산책'에 대한 일종의 로망이 있었다. 환갑이 넘어도 예술가로 살겠다고 결심한 나는, 누군가 '예술가의 도시는 베를린 아니겠어'라는 말에 그렇게 베를린으로 훌쩍 떠났다.

베를린에서 유학하는 동안 본의 아니게 독일 국회의사당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게 됐다. 나는 후줄근한 '츄리닝' 바람으로 국회의사당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다가 앙겔라 메르켈이 일하는 연방 총리실 건물 앞 푹신한 잔디밭에 앉아 쉬면서 관저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독일 국회의사당의 풍경 ⓒ 권은비

 
학교 가는 길에 독일 대통령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를 마주치거나, 자전거를 타다가 베를린 시장이 건네는 손 인사를 받기도 하고, 앙겔라 메르켈이 자주 가는 슈퍼에서 메르켈이 구입한 버터를 따라 사보기도 했다. 특히 대통령 슈타인마이어는 너무 자주 마주쳐서 동네 할아버지와 별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산책을 마친 뒤 평소처럼 슬리퍼 차림으로 독일 국회의사당을 지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국회의사당 앞 세로 4m, 가로 6m의 거대한 독일 연방기가 노을 지는 태양을 뒤로하고 바람에 펄럭였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국회의사당 앞 잔디밭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는데, 그때 사진처럼 머릿속에 각인된 풍경 때문인지, 나는 좀 낯뜨거운 감성이지만 민주국가의 시민으로서 일상의 평화를 느꼈다. 냉전이 종식된 국가, 통일 이후 국가의 '적'이 없는 나라의 정치 중심부는 이런 풍경이 '일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독일에서 나는 투표권이 있는 정식 '국민'이 아닌 일개 외국인이었지만, 독일 국회라는 공간은 내 일상 속 풍경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나는 매번 독일 선거철이면 정당마다 발표하는 정책을 곰곰이 살펴 읽으며, 한국에 돌아가면 새삼스럽게 기쁜 마음으로 투표도 하고 대한민국 국회에서 산책해 보리라는, 소박하지만 나름 야심 찬 계획을 품었다.
     
대한민국 국회에는 '일상'이 안 보인다

이제 그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가 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1번 출구'로 나가보았다.
 

국회 안에 설치된 안내지도 ⓒ 권은비

 
그런데 첫 번째 관문이 나왔다. 무려 10만 평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는 돌담과 하얀 철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국회를 출입하기 위한 문은 무려 7개다. 국회 울타리 주변과 각각의 출입구 앞에서는 청년경찰들이 땡볕을 그대로 맞으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국회로 들어서자마자 숨이 막힌다. 국회의사당(본관) 건물을 중심에 두고 설계된 조경은 권위적이고 통제된 공간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국회 안 건물과 건물 사이의 길은 말끔한 아스팔트 도로로 조성됐다. 이 넓은 국회에 걷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순찰하는 경찰들뿐. 검고 윤이 나는 세단과 승합차들이 유유히 경내 도로 위를 달린다. 걷는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를 중심으로 설계된 전경은 '감히 국회에 산책을 하러 오다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애초에 국회 안에서 산책 따위를 해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을까.

국회 출입구에서 국회의사당까지는 약 665m.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걸으며 국회의사당을 바라본다. 1975년 완공된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건축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회의원회관은 건축가 이영희가 설계했다면, 국회의사당은 딱 한 명만 참여한 게 아니어서 당최 어느 건축가를 거론해야 하는지부터 세어봐야 한다. 당시 권력자들에 의해 설계 공모가 여러 번 엎치락뒤치락하는 우여곡절 속에서 '국회의사당 설계팀'에 합류하게 된 안영배 건축가는 자신의 구술집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한번은 국회의원들이 하도 높은 돔을 원하기에 일부러 보기 싫게 돔을 크게 설계해서 일단 투시도를 보여준 적이 있어요. 이렇게 비교해 보자는 식으로요. 그랬더니 의외로 우리가 보기 싫게 하려고 그린 설계를 더 좋아하더라고요."

그렇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로보트 태권V'가 나온다던 국회의사당의 돔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국민이 국가를 받들던 시절의 흔적
 

21대 국회, 국회의사당 앞 풍경 ⓒ 권은비

 
다시 국회의사당을 향해 앞으로 걸어본다. 양 옆으로 광활한 잔디밭이 펼쳐진다. '잔디를 보호합시다'라는 표지판을 넘어 저 푸른 잔디 위에 앉기라도 한다면 당장 끌려 나올 것 같다.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길 중심부에는 '평화와 번영의 상'이라는 이름의 분수대가 있다. 그 뒤편으로 1976년에 세워진 '애국애족의 군상'이라는 제목의 청동 조형물이 양옆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조각 속 여성은 한복을 입고 있고, 남성들은 저마다 근육질의 몸에 하반신에는 면보를 걸치고 있다.

'평화와 번영의 상' '애국애족의 군상' 모두 김세중 조각가의 작품이다.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을 만든 김세중 조각가는 이렇듯 한국의 주요 정치적 거점마다 높고 육중한 조형물을 세웠다.

과거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조형물은 "고뇌와 정지에서 벗어나 결의와 결심을 갖고 태극기와 무궁화를 받들고 전진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작가의 말대로 조형물 속의 국민은 국가로 상징되는 무거운 태극을 받들고 있다. 받들어야 하는 국가, 그것은 어쩌면 조형물을 만들었던 1970년 후반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겠다. 국민은 국가를 받드는 존재였던 것이다.

공공장소의 예술작품, 상징물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리 해석되곤 한다. 한국은 산업화 이후, 이른바 근대가 아닌 '현대'의 풍경을 만들어가는 시기였던 1970년에서 1980년대에 걸출한 예술가와 건축가들을 적극 활용해 국가의 모습을 계획하고 실현해왔다. 그때의 국민들이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했듯, 예술가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는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폭력이 국민들에게 거침없이 자행되던 시기였다.

국회의 대표 조형물들에 대한 감상은 각자의 몫이겠으나, 국회 안에 국가권력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거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다룬 상징 조형물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꽤나 씁쓸하다. 그렇다고 지금부터라도 몇억 원대의 국고를 들여 상징조형물을 국회에 만들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제발 높고 거대한 국가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 조형물은 그만 만들자 외치고 싶은 쪽이다.

그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국회였으면

그러나 국회의사당 앞에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반짝이는 검은 세단과 승합차들을 보며 공상에 빠져본다. 언젠가 다시 국회에 산책하러 온다면, 그때는 담장이 없는 국회의 넓은 풀밭 곳곳에서 시민들이 느긋한 산책을 즐기고, 국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쉬어갈 수 있었으면 한다.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걸어 다니는 국회의원 몇 명쯤은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었으면 한다. 

어느 이주노동자는 가족과 함께 놀러 와 국회의원회관을 가리키며 '저 의원실에서 우리를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더라'라는 이야기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그런 국회였으면 한다.

어떤 풍경은 풍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늘의 국회 풍경에서 나는 국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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