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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묘과 거창군부인 신씨 묘이다
▲ 연산군 묘역 연산군 묘과 거창군부인 신씨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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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소의 해인 신축년 새해 1월 16일 토요일, 평소 가보지 못했고, 간과했던 집주변의 역사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게 됐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 집과 지근거리에 있는 유적지를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듯이, 집주변 유적지가 상당히 있었다. 물론 가보지는 못했지만 승용차를 타고 지나갈 때, 간간히 유적지 행선 표지판을 본 것이 전부였다.

특히 집 지근거리에는 '역사 속 인물의 묘'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세종 때 집현전에서 활동했고, 한글 창제를 도왔던 신숙주 묘와 임진왜란 시기인 선조 때 의병대장을 지낸 정문부(1565~1624) 장군의 묘가 집에서 2km 안팎에 자리 잡고 있었고, 세조 부부의 묘인 광릉과 국립광릉수목원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또한 20km 지점에 연산군 묘와 그 인근에 양효공 안맹담(1415~1462)과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1477)의 부부 묘가 있었다. 특히 집에서 15km 지점에 국립 광릉수목원과 세조의 부부의 묘인 광릉이 자리 잡았다. 광릉은 한두 번 가본 유적지였다.

거주한 경기도 남양주 별내면 청학리에서 승용차를 타고 이날 첫 번째 찾은 곳이 집현전 학사를 지낸 신숙주(1417~1475) 선생의 묘였다. 경기도 의정부시 송산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기도 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된 신숙주 선생의 묘 앞에 도착하니, 525주년 한글날을 기념해 세워진 '문충공 고령 신숙주 선생 한글창제 사적비'가 눈에 띄었다. 지근에 있는 표지판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숙주 선생의 약력이 소개돼 있었다.

신숙주 선생의 본관은 고령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세종 21년 문과 급제, 세종 27년 집현전 부수찬, 세종 29년 무과 중시 합격 이후 도승지, 병조, 예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수양대군)의 계유정란에 참여해 정난공신을 비롯해 네 번의 공신으로 등록됐다. 세조 8년(1462) 영의정 부사가 됐고, 성종 6년(1475) 영의정 재직 중인 음력 6월 21일 생을 마감했다.

신숙주 선생은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5대 임금을 모셨다. 수양대군(세조) 때 한명회 등과 함께 단종을 모셨던 신하들을 척살하는 계유정란에 참여해 역사적 희비가 엇갈리고 있는 인물이다.
  
신숙두 선생과 부인의 묘역이다.
▲ 신숙주의 묘 신숙두 선생과 부인의 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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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선생의 묘에서 약 1.3km 지점에는 임진왜란 때 맹장인 정문부 의병대장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의정부시가 스탬프 투어 장소로 지정한 열여섯 곳 중 두 곳이 신숙주 선생의 묘와 정문부 장군의 묘이다. 

의정부시는 아일랜드 캐슬, 백영수 미술관, 무한상상 시민정원, 송산사지근린공원, 신숙주 선생의 묘, 정문부 장군의 묘, 의정부 예술의 전당, 의정부2동 성당, 의정부 컬링장, 역전근린공원, 제일시장, 퓨전 문화관광 홍보관, 행복로, 부대찌개거리, 천문우주체험관, 의정부 경전철 등 열여섯 곳을 스탬프 투어 장소로 지정해 지원하고 있다.

충의공 농포 정문부(1565~1624) 장군의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덕사도 있다. 그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을 지냈다. 선조 21년 차석으로 과거에 급제해 승정원, 사헌부 등에서 문관으로 일했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 북평사에 부임해 일본군에 협력한 반적의 목과 왜병 천여 명의 목을 베어 함경도 땅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임란 후 중앙의 당쟁을 피해 길주 목사, 지방 수령 등을 역임했고 병조참판을 지냈다. 의정부 송산에서 시부를 짓고, 농포집 5권 남겼다. 이후 박홍구 역모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창원부사 때 지은 초회왕시가 인조를 빗댄 것이라는 모함으로 고문사를 당했다. 사후 임란 1등 공신 좌찬성 대제학으로 추증돼 충의공의 시호가 내려져 무죄임이 입증됐다.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을 지낸 정문부 장군의 묘이다.
▲ 정문부 장군 묘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을 지낸 정문부 장군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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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복제비로 임진왜란(1592~1598) 때 북평사 정문부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길주, 백탑교 등에서 가토 기요미사가 이끈 왜병들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승전비이다. 

북관대첩비는 실제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민이 세웠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빼앗아 가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됐다가 북한으로 인도돼 김책시 림명리에 복원돼 있다. 정문부 장군 묘역에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복제비이다. 경복궁과 독립기념관에도 복제비가 있다.

이곳 정문부 장군의 묘역을 떠나 15km 지점에, 조선 7대 임금인 세조 부부의 묘역인 광릉이 자리 잡고 있다. 유네스코 조선왕릉 세계유산으로서 광릉은 사적 197호로 지정돼 있다.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에 자리 잡은 광릉은 세조와 부인 정희왕후를 모신 묘소이다.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인 홍살문을 지나면 제향을 모시는 건물인 정자각이 보이고, 좌우로 두 개의 묘가 존재하는데 왼쪽이 세조 묘이고, 오른쪽이 정희왕후의 묘이다. 주변에는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감싼 건물인 비각이 있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으로 1453년 계유정란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잡았다. 계유정란이란 조카 단종을 모신 신하들을 척살한 사건이다. 여기에 칠삭둥이로 알려진 한명회를 비롯해 집현전 학사인 신숙주 선생도 세조를 도와 계유정란에 참여해 공신이 됐다.

1455년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이후 국방력 강화에 힘썼고, 경국대전을 편찬했다. 1455년 세조 등극과 함께 왕후로 책봉된 정희왕후는 1469년 어린 나이로 왕에 오른 성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다. 역사는 이를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라고 일컫고 있다.
  
세조 묘(왼쪽)와 정희왕후 묘(오른쪽) 이다.
▲ 광릉 세조 묘(왼쪽)와 정희왕후 묘(오른쪽)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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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입구에는 왕릉에서 유일하게 '하마비'가 존재하고 있는데, 임금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서는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광릉 입구에 있는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이 상주한 곳이다.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일을 준비했다. 광릉은 5분 정도 걸 수 있는 350m정도의 숲길 조성돼 있다. 숲길 개방은 5월 16일부터 6월 30일까지,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광릉수목원 길을 따라 수풀이 우거진 산책로가 있어 걷는 사람들이 많다. 국립광릉수목원도 가볼 만한 곳이지만, 광릉을 비롯해 이곳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도 기분을 좋게 한다.

이곳 광릉에서 승용차로 40분 거리에 연산군 묘와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남편의 묘가 있다.

서울 방학동에 사적 362호 연산군 묘가 있다. 연산군 묘역에는 거창군부인 신씨묘, 태종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의 묘, 연산군 사위인 능양위 구문경묘와 연산군의 딸인 휘수공주의 묘가 함께 있다.

조선 10대 임금인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은 성종과 폐비윤씨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붓글씨에 능통했고 시에도 재능이 있었다. 1506년 반정으로 폐위, 강화도로 유배돼 그해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이어 이복동생인 중종이 왕위를 계승했고, 중종 7년(1513년) 연산군의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왕자 의례에 따라 서울 방학동으로 묘를 옮겼다. 연산군 재임 시절에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인 두 번의 사회(무오사화(1948), 갑자사화(1504))가 일어났고, 연산군은 끝내 중종반정으로 물러났다.

또한 연산군 묘역 앞에는 서울시 기념물 33호인 은행나무가 존재한다. 나무 높이 25m, 둘레 10.7m의 보호수이다. 2013년 550살로 추정했고, 지난 1968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됐다. 경복궁 증축 당시 징목 대상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이 흥선대원군에게 간청해 제외됐다고 해 대감나무라고 불리고 있다. 지금도 매년 정원대보름날에 제사를 지낸 나무이다.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1477)와 그의 남편인 양효공 안맹담(1415~1462)의 묘이다.
▲ 안맹담의 묘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1477)와 그의 남편인 양효공 안맹담(1415~1462)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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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묘역 건너편에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1477)와 그의 남편인 양효공 안맹담(1415~1462)의 묘역이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50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시대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를 기록해 세운 비석이 신도비인데, 이곳 신도비의 비문은 사돈인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지었고, 글씨는 부부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1445~1478)가 썼다고 알려져 있다.

보는 방향으로 좌측이 양효안공의 묘이고. 우측이 정의공주의 묘이다.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는 1428년 결혼해 4남 2녀를 두었다. 안맹담은 초서에 능통했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출중한 인물이었다. 불심이 깊었던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롭고, 책력과 산술을 잘 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에는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해 임금이 화목을 뜻하는 목(睦)자를 성으로 내렸다고 알려진 '사천 목씨 묘역과 선영 및 재실'도 자리 잡고 있다.

왕실 묘역구간으로 조성된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입구에서 서울 둘레길(연산군묘 방향), 북한산 둘레길(우이동), 우이령 입구, 문수골, 북한산 둘레길(도봉동) 등 어디든지 선택해 출발할 수 있다.

이날 집 가까운 곳에 있어도 잘 모르고 있었던 역사유적지 탐방은 추상적으로나마 알았던 역사적 인물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 뿌듯한 하루였다.

태그:#집 주변 역사탐방, #연산군, 세조, 신숙주, 정문부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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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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