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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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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시장길 29-4에 위치한 '유구전통시장'은 1928년 개설된 상가건물형의 중형시장으로 매월 3일과 8일마다 정기장이 선다. ⓒ 박진희

23일, 매달 3일과 8일마다 열리는 공주 '유구 오일장'에 나가봤다. 정월대보름이 얼마 남지 않아 그날 먹을 오곡밥과 나물거리 몇 가지를 사러 나선 참이다. 그냥 나물이 아니라 시골 할매, 엄니들이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며 뜯어다 말려놓은 나물을 목표로 벼르고 갔다.
 
유독 한 할머님의 노점에만 손님들이 몰려 있었다. ⓒ 박진희
유구 오일장 노점에서는 쌀, 보리, 콩, 팥, 수수, 조, 기장 등을 섞어 불린 것을 사발 단위로 팔고 있었다. ⓒ 박진희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서는 정기장이라 나물과 잡곡을 파는 노점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중 유독 한 곳에만 손님들이 몰려 있으니 자연스레 그곳으로 발길이 이끌렸다.

오곡밥을 지을 쌀과 여러 잡곡을 섞어 팔고 있었다. 손님이 원하는 곡물만 사 갈 수도 있었는데, 스테인리스 대야가 바닥을 드러내면 금방 다시 채워지는 거로 봐서는 섞은 것을 한두 사발씩 사 가는 사람이 더 많은가 보다.

드문드문 강낭콩이나 서리태 대신 초록색 콩이 보여 뭔가 싶었는데, 냉동한 완두콩을 해동하면 모르는 사람 눈에는 알 작은 청포도처럼 보인단다. 냉동식품이긴 하지만, 세상에나! 이 계절에 완두콩을 다 먹는다.

할머니 장사 수완에 그냥 갈 수가 없네 
 
유구 오일장 노점에서는 시래기, 취나물, 고사리, 무말랭이, 호박고지 등을 삶아 팔고 있었다. ⓒ 박진희
노점상을 하는 할머님이 직접 따서 말린 다래잎을 팔고 있었다. ⓒ 박진희
 
이 노점에만 유독 손님이 몰린 이유는 간단했다. 장사가 잘 돼 기분이 좋은 할머님이 호기롭게 내뱉은 몇 마디 말로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우리 집은 4000원에 판다고 벌써 소문이 다 났네벼. "

다른 노점상보다 나물 한 사발에 1000원이 더 싸다는 걸 지나가는 손님들 들으라고 호객하는 솜씨가 보통은 넘는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이유가 하나만은 아닌 듯했다.

장터를 누비고 다녀도 이 할머니 좌판만큼 나물이 다양한 곳도 없었다. 취나물, 고사리, 고구마 줄기, 토란대는 물론이고 뽕나무잎, 다래잎, 망초대 등등 골고루 갖춰 놓았다. 더 둘러보고 사려던 나 역시 할머님 장사 수완에 결국 나물 몇 가지를 사고 말았다.
 
호박고지는 한 봉지 5,000원에 팔리고 있었다. ⓒ 박진희
 
부부 내외가 장을 보러 와서 호박고지 한 봉지를 사서는 검은색 봉투에 갈무리하며 묻는다.

"할머니, 어떻게 먹어요? 들기름에 볶으면 되지요?" 
"그라지. 물에 불렸다가 볶으면 보들보들하니 맛나."

시골 장터에서 팔리는 푸성귀는 할머님들이 일러주는 레시피대로만 하면 크게 실패할 리가 없다. 
 
한 손님이 18,000원에 오곡과 복쌈용 나물 네 종류를 샀다며 들어 보인다. ⓒ 박진희
 
할머님과 안면이 있는 중년 여성은 이것저것 해서 1만8000원 어치나 샀다. 단골이라고 덤 인심이 좋았다 쳐도 양이 솔찬히 많다. 여전히 옛사람들이 그랬듯 정월 14일 아침에 고기나 김치를 먹지 않고, 식구들과 둘러앉아 오곡밥과 나물 반찬으로 첫 끼를 들거나, 이웃들끼리 오곡밥과 나물을 나누는 '백집 밥먹기'를 이어가는 가정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열무김치는 없지만... 푸짐한 '엄마표 밥상' 
 
종묘상에는 소독 처리를 한 종자들이 팔리고 있었다. 봄이 재배 적기인 열무씨도 팔리고 있었다. ⓒ 박진희
   
오곡밥은 김이나 배춧잎에 싸서 '복쌈'으로 먹기도 한다. 채소 좌판 근처를 지나는데 두 여인의 대화가 발목을 잡는다.

"요즘 열무가 어딨어?"
"지들 입맛대로 먹고 싶다고 하는 거지."


여기서 '지들'은 자식들인 것 같다. 열무야 7월~9월이 제철인데, 열무김치를 먹고 싶다고 했으니 철부지들 없는 데서 한 소리 해대는 중이었다. 

"배추나 사 가."
"배추는 생것이 맛있지?"
"쫑쫑 썰어서 청국장 끓여도 맛있지."


객지에서 일하는 아들, 딸들이 모처럼 집에 오는가 보다. 타지에서 고생하는 자식들에게 먹고 싶은 걸로 밥 한 끼 챙겨 주려 했나 본데, 하필 더워져야 먹을 수 있는 '열무김치'를 찾을 게 뭐람.

비록 먹고 싶다던 열무김치는 몇 달 뒤에나 먹게 되겠지만, 간이 센 외식이나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아들, 딸이 고향에 내려와 받는 '엄마표 밥상'의 진가를 모를 리 없다. 

아무리 계절감이 떨어지는 이라도 보름날 오곡밥과 나물 반찬 놓인 밥상을 받고, 지척에 당도해 있는 봄소식을 어찌 모르겠는가. 모처럼의 특식으로 영양 보충하고, 식구들과 2021년의 남은 열 달을 내달릴 채비를 단단히 해야겠다.
태그:#작은 보름, #대보름, #세시풍속, #오곡밥과 복쌈, #부럼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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