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내용은 2017년 7월, 필자의 할머니 이복연씨 인터뷰를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기자말]
복연은 아궁이에 불 때고 밥 지으며 밤이 되면 호롱불을 켜고 삯바느질 했다. 복연의 눈은 틈틈이 마당을 향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승엽이 언제라도 집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시댁식구들 속에서 마음 둘 곳은 오로지 승엽 밖에 없었다. 승엽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해 해와 달만 보던 시간들이 아련하고 그리웠다.

"어무이, 부인 내 왔소."
"아이고! 내 새끼 살아 돌아왔네, 잘했다. 잘했어."


승엽의 엄마가 하던 일을 멈추고 승엽을 향해 달려가 와락 안았다. 복연은 승엽 목소리에 놀라 방에서 뛰쳐나왔다.

승엽이 돌아왔다. 승엽의 얼굴과 팔 다리를 까맣게 그을렸다. 흰 무명옷 사이로 보이는 팔뚝이 마른 나무꼬챙이 같았다. 시어머니 품에 안겨있던 승엽의 눈이 복연과 마주쳤다. 복연은 말없이 승엽을 바라봤다.

기쁨의 재회는 잠깐이었다. 장독대에 쌀이 채우는 일이 더 중요했다. 승엽이 돌아온 뒤 둘째 박호병과 섯째 박옥순을 낳았다. 입은 늘어났는데 쌀이 든 장독대는 수시로 바닥을 보였다. 승엽이 농사 짓고 강에서 그물로 고기 잡는 일로 여섯 식구가 살아가기에 버거웠다.

"부인, 부산 충무동에 5촌 아재가 목재소를 하는데 거기 사서 일을 해보면 어떻겠소."

승엽의 말에 복연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부산 초장동으로 이사했다. 전쟁 이후 부산은 어딜 가든 사람들이 넘쳐났다.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은 하늘과 맞닿은 위로, 위로, 산길을 자꾸만 올라갔다.

초장동에 셋방을 구했다. 승엽이 구한 집 역시 산 위에 있었다. 중풍이 찾아와 걷기 힘들었던 시어머니를 업고 승엽은 산으로 산으로 올랐다. 숨을 턱까지 차올랐고 집까지 아득했다.

목재소에서 일을 하며 받은 월급은 4000원. 당시 짜장면 값이 15원, 승엽의 월급은 오늘날 돈으로 계산하면 150만 원 안팎이었다. 여섯 식구가 배불리 삼시세끼를 먹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초장동 셋방살이 1년, 남부민동 셋방살이 1년. 두 번 이사를 한 뒤 남부민동 산능성에 새 집을 구했다. 집은 판자와 시멘트로 얼기설기 지은 허름한 곳이었다. 창문은 유리 대신 비닐을 켜켜이 둘러져 있었다.

산은 깎이고 깎여 가난한 사람의 보금자리가 됐다. 복연이 산나물을 캐러 산을 오를 때면 때때로 시체를 마주했다. 노란 금발에 하얀 얼굴, 전쟁으로 죽은 미국 사람들 시체가 널브러져있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복연은 남의 나라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죽어간 이들을 향해, 지장보살을 왰다. 죽은 후 고통 받는 이들을 지장보살이 구원하고 천도하길 바랐다.

"누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소."

일본에서 함께 나왔던 복연의 엄마는 동생 이진복 내외와 함께 살았다. 이진복은 약사인 부인을 얻어 괴정에서 약국을 운영했다. 소식을 들은 승엽이 목재소서 관을 짰다. 승엽은 관을 이고 지어 충무동에서 괴정까지 한 시간을 넘는 거리를 걸어 왔다.

복연은 먹고 살기 바빠 엄마 얼굴을 자주 보지도 못했다. 이따금 진복의 집에 갈 때면 팔목이 저릴 때까지 엄마 다리를 주물렀다. 복연이 할 수 있는 효도는 그게 다였다.

복연은 엄마를 보내드리고 뱃속에 넷째를 얻었다. 남부민동에서 넷째 박병옥을 낳았다. 병옥을 낳은 1959년은 커다란 태풍이 도시를 집어 삼켰었다. 9월 17일 추석 제사를 모시고 나니 창문에 붙여놓은 비닐이 쉼 없이 펄럭였다. 심상치 않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에 물이 불어났고, 돼지, 소, 사람이 불어난 강물이 휩쓸렸다. 부산 앞 바다는 집채만 한 파도가 위로 솟구치며 모든 걸이 쓸어갔다. 태풍 이름은 '사라'. 태풍으로 송도와 영도에서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복연은 병옥을 낳고 일을 시작했다. 열차 차장 마쯔가와 하루코는 복연에게 젊은 날 아름답던 추억이 됐다. 문자 그대로 먹고 살아야했다. 복연은 충무동 어묵 공장에서 어묵 만드는 일을 맡았다. 1963년 다섯째가 뱃속에 자리 잡았다. 복연은 더 이상 입을 늘릴 수 없었다.

뱃속에 아이를 떠나보내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양잿물도 마셨다. 복연 마음과 달리 아이는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탯줄을 붙잡았다. 1964년 11월 26일, 음력 10월 23일. 다섯째 박은정이 태어났다. 의사가 복연의 집으로와 연탄집게로 박은정의 머리를 잡고 그를 꺼냈다. 덕분에 박은정은 이마 관자놀이 부분이 쏙 들어갔다. 복연은 은정을 '모계'라 불렀다.

"모계야!"

이름 대신 모계라 불린 은정은 모계가 제 이름인 줄 알고 곧잘 대답했다. 은정이 자라 초등학생이 됐다. 첫째 박희병은 결혼을 하고 사업을 했다. 잘 가던 사업 대표였던 희병은 어느 순간 빚쟁이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첫째는 빚쟁이를 피해 도망갔고 첫째 며느리와 손녀가 좁은 집에서 함께 살아야했다. 복연은 늘어난 식구를 먹여 살기기 위해 돈을 더 많이 주는 직장을 찾았다.

복연은 해가 뜨지도 않은 오전 5시, 새벽별을 보고 나갔다가 달을 보며 다음날 0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식당에서 일하며 일당으로 300원을 받았다. 일을 시작하고 두 달 뒤 식당 사장은 복연에게 일 잘한다고 일당을 500원으로 올려줬다. 고무장갑도 끼지 않은 채 주방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설거지했다. 1년이 지나니 손가락 사이가 뭉개졌다. 성실히 일한 덕에 사장은 설거지 일은 그만하고 반찬 놓는 참조로 승진시켜줬다.

한식당이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반찬 8개가 쟁반 위에 놓여 나갔다. 자갈치 시장에서 제일 값싸게 팔리던 생선 도루묵은 배고픈 이에게 최고의 반찬이었다. 복연은 연탄불 위에 도루묵을 구워 쟁반 위로 날랐다.

승엽의 돈벌이는 변변찮았다. 월급을 제대로 못 받을 때면 승엽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복연을 볼 낯이 없었다. 돈을 손에 쥐지 못한 날은 나무 톱밥 위가 잠자리로 변했다.

복연은 하루도 쉬지 못했다. 일이 힘들어 사장에게 '그만 두겠다' 하니 다음 날 집으로 사장이 복연을 찾아와 일을 해달라고 사정했다. 넷째 박병옥이 자라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새벽 이슬을 맞고 나가 달빛을 받으며 돌아오는 생활을 10년 넘게 했다.

승엽은 다른 일을 구했다. 자갈치 시장을 리어카를 끌고 돌아다니며 상인들의 짐을 실어주고 돈을 받았다. 승엽이 리어카를 끌면 복연이 뒤를 밀었다. 승엽은 어수룩했고 약삭빠른 상인들은 승엽을 이용했다. 승엽은 짐을 실어주고 삯을 받아야 하는 상인의 얼굴을 자꾸만 잊었다. 공짜로 일하기 부지기수였다. 리어카 일은 몇 년 하지 못하고 그만뒀다. 승엽은 산을 시키는 산불감시원이 됐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 그 아들의 부인이 된 복연. 그들에게 매일 매일은 산능성이 자리 잡은 집을 오를 때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나날이었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게재됩니다.


태그:#공감에세이, #할머니, #추억, #기억, #역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직 시골기자이자 두 아이 엄마.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시간이 쌓여 글짓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아닌 '김예린' 이름 석자로 숨쉬기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 짬짬이 글을 짓고, 쌓아 올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