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술을 잔뜩 마시고 일어난 다음 날, 나는 기억에 없는데 같이 마신 사람들이 어제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너 그렇게 안 취해 보였는데!"라고 한다.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에 만취했던 나. 그때 내가 한 말과 행동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특히 그 언행이 나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관련된다면? 상대방이 말한다. "너도 동의했잖아. 너 되게 멀쩡해 보였는데 필름이 끊겼나 보네." 이렇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일까.

실제 준강간죄나 준강제추행죄의 피고인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당시 성적 관계는 피해자가 의식이 있을 때 이루어졌는데 피해자가 나중에 이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피해자가 겉으로 멀쩡해 보였기 때문에 합의 하에 성관계 등을 한 것으로 믿었다며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하려는 고의가 없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동안 법원에서는 이러한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인 경우가 많았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음에도 오히려 이러한 사정이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피고인의 무죄 근거가 됐다. 

지난달 4일 선고된 '대법원 2021. 2. 4. 선고 2018도9781 판결'은 이러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법원은 위 판결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의 알코올 블랙아웃을 주장하는 경우 섣불리 그 가능성을 인정하여 피해자가 성적 관계 등에 동의했다고 보아서는 안 되고,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만취한 피해자의 상태에 관하여, 우선 블랙아웃 상태와 패싱아웃 상태로 구분하여 전자의 경우 기억형성의 실패만을 야기한 것으로서 기억장애 외에 인지기능이나 의식상태의 장애에 이르렀다고 인정하기 어렵고, 후자의 경우에는 술에 취해 수면상태에 빠지는 등 의식을 상실한 상태라고 하여 심신상실 상태가 인정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두 가지 경우의 수만 고려한다면 '모 아니면 도' 아닌가? 이에 대법원은 이 두 가지 경우 외에 '피해자가 의식상실 상태에 빠져 있지는 않지만 알코올의 영향으로 의사를 형성할 능력이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행위에 맞서려는 저항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 이러한 경우에도 '항거불능'에 해당하여, 이러한 피해자에 대한 성적 행위 역시 준강간죄 또는 준강제추행죄를 구성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일반인 입장에서는 법의학 분야에서의 정의하는 것과는 달리 단순한 기억장애를 넘어 '음주 후 발생한 광범위한 인지기능 장애 또는 의식상실'까지 통칭하기도 하므로, 피고인이 피해자의 알코올 블랙아웃을 주장하는 경우 "법원은 피해자의 범행 당시 음주량과 음주 속도, 경과한 시간, 피해자의 평소 주량, 피해자가 평소 음주 후 기억장애를 경험하였는지 여부 등 피해자의 신체 및 의식상태가 범행 당시 알코올 블랙아웃인지 아니면 패싱아웃 또는 행위통제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였는지를 구분할 수 있는 사정들과 더불어 CCTV나 목격자를 통하여 확인되는 당시 피해자의 상태, 언동, 피고인과의 평소 관계, 만나게 된 경위, 성적 접촉이 이루어진 장소와 방식, 그 계기와 정황, 피해자의 연령·경험 등 특성, 성에 대한 인식 정도, 심리적·정서적 상태, 피해자와 성적 관계를 맺게 된 경위에 대한 피고인의 진술 내용의 합리성, 사건 이후 피고인과 피해자의 반응을 비롯한 제반 사정을 면밀하게 살펴 범행 당시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하여 여러 가지 사정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피해사실 전후의 객관적 정황상 피해자가 심신상실 등이 의심될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었음이 밝혀진 경우 혹은 피해자와 피고인의 관계 등에 비추어 피해자가 정상적인 상태 하에서라면 피고인과 성적 관계를 맺거나 이에 수동적으로나마 동의하리라고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인정되는데도, 피해자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피해자가 단순히 '알코올 블랙아웃'에 해당해 심신상실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준강간이나 준강제추행 사건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의 알코올 블랙아웃을 주장하는 경우, 피고인이 피해자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했는지 여부는 블랙아웃이니 패싱아웃이니 하는 법의학적 개념에 갇혀 판단할 것이 아니라 실제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피해자의 당시 상태,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등 앞서 대법원이 밝힌 요소들을 면밀히 심리하여 판단해야 하는 것이라고 밝힌 판결이라고 생각된다.

기억이 끊어질 정도로 술을 마신 상황이었음에도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되려 '의식은 있었고 기억만 없을 뿐'인 가능성이 있는 경우가 되어 결론적으로 피해자가 당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거나 피고인이 이를 이용하려는 고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김소리 변호사(법무법인 이공,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월간변론 편집위원)
 김소리 변호사(법무법인 이공,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월간변론 편집위원)
ⓒ 민변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는 2016년 4월 21일 민변 변호사들의 공익인권변론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자 설립되었습니다.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월간변론 편집팀의 '시선'은 민변 회원들에게 매월 발송되고 있는 '월간변론'에 편집위원들이 기고하는 글입니다. '시선'은 최근 판례와 주요 인권 현안에 대한 편집 위원들의 단상을 담고 있습니다.


태그:#블랙아웃, #시선, #월간변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댓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연구조사, 변론, 여론형성 및 연대활동 등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88년에 결성된 변호사들의 모임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