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무도 없는 곳>에 출연한 배우 윤혜리.

영화 <아무도 없는 곳>에 출연한 배우 윤혜리. ⓒ 엣나인필름

 

매체 기자와의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영화와 드라마 등 쌓아온 작품이 십수 편이 넘어가는데 이 배우를 아직 조명하지 않았다니. 마침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이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김종관 감독의 신작에서 유진 역을 맡은 배우 윤혜리는 차분한 말투에 밝은 기운이 느껴지는 표정의 소유자였다.

유진은 소설가 창석(연우진)의 대학 후배다. 영화는 해외에서 아내와 헤어진 후 홀로 한국에 들어온 뒤 며칠 간 여러 사람을 만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경희궁 뒷산에 올라 두 사람이 기우는 해를 뒤로 하고 함께 흡연하는 장면이 바로 윤혜리에게 주어진 큰 과제였다. 특별한 대사를 주고받진 않지만 정서와 분위기 만으로 창석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캐릭터가 바로 유진인 것.

치열했던 순간들

2년전 오디션을 전전하던 때 윤혜리는 김종관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옴니버스 영화 <한낮의 피크닉> 출연 때 흡연 연기를 보고 감독이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같다고 윤혜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몇 영화 행사에서 인사도 나누고 얼굴을 익히다가 덜컥 캐스팅 요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감독님 작품엔 항상 제가 좋아하는 여성 선배들이 나왔다. 그래서 감독님께 연락왔을 땐 뭔가 동경하는 세계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신났다(웃음). 감독님께서 어떤 역할엔 그 주인이 따로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는데 단순히 캐스팅을 떠나 제겐 큰 용기를 주는 말씀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한 남자를 대하는 유진은 섬세하다.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에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윤혜리는 "대학 때 잠시 좋아했던 선배, 그리고 창석의 소문을 멀리서나마 듣고 실례되지 않게 행동하려는 인물로 이해했다"고 유진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전했다. 평온하고 차분하게 표현된 유진의 모습과 달리 배우는 매우 전전긍긍한 상태였다고 한다. 윤혜리는 "2년 전 제가 지금보단 깊이가 얕았던 것 같다"며 촬영을 어떻게 준비해갔는지 차분히 설명했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의 한 장면.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의 한 장면. ⓒ 볼미디어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의 한 장면.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의 한 장면. ⓒ (주)볼미디어

 
"감독님에 필적할 내공이 없었기에 부족한 걸 채우는 시간이어야 했다. 뭔가 힌트를 얻고 싶어서 감독님께 책을 추천받기도 했고, 질문을 많이 하기도 했다. 그분의 취향을 알아야 캐릭터에 다가갈 수 있겠다 싶었다. 촬영 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려 했다. 김연아 선수를 제가 좋아하는데 감정연기를 굉장히 잘하는 것처럼 우린 받아들이잖나. 인터뷰를 보니 약속된 동작을 해내야 하기에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없다더라. 저도 그랬던 것 같다. 약속된 시간에 한번에 해내려면 자기감정에 빠져선 안 되거든.

이 작품 전까지 저는 대부분 저와 경력이 비슷한 사람들과 작업했었다. 감독님과 스태프들 포함해서. 그런데 이번엔 모든 사람들이 저보다 경력이 많았다. 물리적 시간만 따지면 제가 가장 부족한 사람이잖나. 그래서 더 긴장했던 것 같다. 경험이 적기에, 배우는 느낌으로 일했다. 고군분투하면서 했던 작품이었다."


긴장했던 순간들이었다지만 윤혜리는 이후 김종관 감독 차기작 <조제>에도 부름을 받아 출연했다. 그가 전작에서 잘해냈다는 방증이었다.

자기 탐구의 시간

동료들보다 조금 늦게 연기에 대한 꿈을 가졌다는 생각 때문일까. 본래 음악을 좋아해 음악 관련 전공을 했던 윤혜리는 친구의 연극을 돕다가 연기에 빠지게 된다. 대학교 전공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은 안했지만, 제대로 배우고자 학교를 다시 들어갔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가족의 반대가 있었고, 직접 계획서를 만들어서 설득한 뒤에 연기를 전공하게 됐고, 하나둘 작품을 경험했다. 그에게 처음으로 상을 안긴 단편 <대자보>를 찍었을 무렵이 바로 학교 졸업 직전이었으니, 이 시기를 윤혜리는 절박함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 프로젝트였는데 사실 졸업까지 앞둔 선배가 참여하는 건 약간 부끄러울 수도 있잖나. 근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몇 개월을 쉬어야 할 것 같더라. 그때 곽은미 감독님을 만난 거고, 덕분에 배우로서의 생명력이 연장됐다. (부모님 설득 과정에서) 제가 철부지였던 것 같다. 주변에서 항상 절 걱정하곤 했는데 에이포 용지에 대학입학, 오디션 계획 등등을 적어서 보여드렸지(웃음). 

빈약한 계획서였지만 그마저도 안하고 연기하겠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잖나. 아버지 말씀이 기억난다. 너가 마음에 안 들어서 반대하는 게 아니라 힘든 길인 걸 알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아버지도 예술가가 되고 싶으셨는데 되지 못한 경우였거든. 시인이 되고 싶어하셨다."


그렇게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가며 윤혜리는 짧게 등장하더라도 다양한 역할을 경험했다. 영화 <기생충> 속 현장 기자,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선 흉부외과 간호사로, 그밖에도 형사, 고등학생 등. 

이제 막 서른을 넘긴 그는 긍정 에너지를 화두로 삼고 있었다. 평소 자신을 탐구하고 바라보며 일기를 꾸준히 써왔고, 책 또한 즐겨 본다. "제가 글로 일단 정리된 다음 누군가를 만나야 원만한 사회 생활이 되더라"며 그가 웃어 보였다. 

"마음에 우울함이 있을 땐 일기를 썼다. 그렇다고 막 죽을만큼 힘들어 하진 않는다. 제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한데 낙관적이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재밌게 나름 즐겼다. 제가 박재범, 지코, 자이언티를 좋아하는데 세 사람 모두 긍정 에너지를 전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상엔 심각한 정보들도 많고 힘든 일도 많은데 거기에 물들면 스스로를 모질게 대하고 가족에게도 그렇더라. 그래서 더욱 신나는 노래도 많이 들으려 한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에 출연한 배우 윤혜리.

영화 <아무도 없는 곳>에 출연한 배우 윤혜리. ⓒ 엣나인필름

 
아침엔 운동, 그 외 시간엔 음악과 책 등으로 공부하는 일과란다. "작품이 들어오고 아니고는 내 의지나 계획과는 상관 없는 일이니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공부 같은 건 꾸준히 하고 싶다"며 그가 눈빛을 밝혔다. 이 대목에서 그는 "라디오 DJ가 어릴 적 꿈이었는데 배철수 선생님께서 은퇴하시면 케이팝 전문 DJ가 되어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김수철, 한대수 선배, 현재 활동하는 아이돌 가수 등 아티스트의 역사를 공부 중"이라 유쾌하게 귀띔했다. 

물론 본업인 연기에선 더욱 철저할 것이다. 전주영화제 출품작인 <계절과 계절 사이> 일화를 전하며 윤혜리는 남다른 각오를 다졌다. 

"그땐 이영진 선배께서 끌고 가주셨다. 제가 분투하지 않아도 절 잘 리드해주셨고 저도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이후로 더 치열해져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주체적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지. 이 자릴 빌어서 영진 언니께 감사하단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윤혜리 아무도 없는 곳 김종관 연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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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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