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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16세기 사림시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당시 사림들의 일상사를 살펴 봄으로써 역사적 교훈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기자말]
16세기 사림시대를 살았던 사대부들은 때론 목숨을 바쳐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한번 맺은 약속을 끝까지 그 절의(節義)를 지키려 했다. 정몽주의 '단심가'는 오직 한 왕조만을 위해 변심하지 않겠다는 굳은 절의가 느껴진다. 사림들의 계보를 올라가다 보면 고려 말 새로운 왕조에 함께 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에까지 이른다.

이 시대를 살았던 사림들 중에 이렇듯 서로 간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이가 있었는데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의 우정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미암과 하서는 소위 절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우정은 나중에 자식 간의 혼인을 통해 사돈지간을 맺게 된다.

하서 김인후(1510~1560) 하면 사림정치기 호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라 할 수 있다. 그가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18선정(先正)중에 한 명이라는 것을 보아도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서는 당대의 유명 도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 이항, 이황, 기대승, 노수신 등과 교유하여 서로 깊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 · 지리 · 의약 · 산수 · 율력에도 정통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해 1천6백여수의 시를 짓기도 하였다.

김인후를 모신 필암서원
 
필암서원 앞은 해자처럼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다.몇차례 장소를 옮긴 끝에 1672년(현종13) 지금의 자리에들어섰다.
▲ 필암서원 필암서원 앞은 해자처럼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다.몇차례 장소를 옮긴 끝에 1672년(현종13) 지금의 자리에들어섰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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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를 배향하고 있는 필암서원은 2019년 우리나라 9개의 서원 중에 하나로 선정되어 세계문화유산이 된 호남의 대표 서원이다. 작은 시내가 마치 해자처럼 필암서원 앞으로 흐르고 그리 높지 않은 추산이 뒤를 감싸고 있다. 몇 차례 자리를 옮긴 끝에 1672년(현종13) 현재의 자리에 들어섰다.

이곳에 제사 공간과 교육, 학문 수련의 공간, 장서 보관 시설 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구조를 잘 보여준다. 보통 뒤를 받쳐 주고 있는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는 서원에 비해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필암서원의 정문누각으로 현판의 글씨는 송시열이 짓고 써준 것이다.
▲ 필암서원 확연루 필암서원의 정문누각으로 현판의 글씨는 송시열이 짓고 써준 것이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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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 앞으로 들어서면 정문이랄 수 있는 확연루(樓然樓) 누각이 나타난다. 누각의 중앙에는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의 힘차고 장중한 글씨의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는 현판은 우암 송시열(1607~89)이 직접 짓고 써준 글씨다.

우암은 보통 양송체(兩宋體)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우암은 조광조에서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로 조광조의 화순 적려유허비도 송시열의 글씨이기도 하다.

확연은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온 말로 우암은 하서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하게 크고 공평무사하다는 뜻을 담아 이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글씨 만큼이나 멋진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널리 모든 사물에 사심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는 다분히 성리학적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송시열이 이런 의미를 담아 현판을 써주었다는 것을 보면 김인후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서와 미암의 돈독한 우정
 
제사 공간과 교육, 학문 수련의 공간, 장서 보관 시설 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조선 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구조를 잘 보여준다
▲ 필암서원 내부 제사 공간과 교육, 학문 수련의 공간, 장서 보관 시설 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조선 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구조를 잘 보여준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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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와 미암은 지금 말로 절친이었다. 두 사람은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아주 가까운 친구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나중에 하서의 딸과 미암의 아들이 결혼하여 사돈지간을 맺는다. 유희춘은 당시 부인 송덕봉과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었는데, 아들 경렴은 김인후의 딸과 혼인하였고 딸은 해남윤씨 윤항의 아들 윤관중과 혼인하였다.

미암과 하서는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나란히 김안국과 최산두로부터 학문을 배웠던 문인이자 돈독한 친구였다. 학문적으로도 같은 스승 아래서 배운 끈끈한 인연을 알 수 있다.

미암과 하서의 우정이 남다르며 인간적으로도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한 일화가 전해져 온다. 이들 간의 일화는 허균이 쓴 <성옹지소록>에 기록되어 있다.

하서가 1540년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다. 그해 초여름 하서는 전염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이른다. 전염병에 걸린 하서에게 다른 사람들은 감히 돌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미암은 자기 집에 데려다 밤낮으로 돌본 끝에 하서는 다시 일어서게 된다. 그후 하서는 다시 공부를 하여 과거에 합격할 수 있었다.

이들의 우정은 관직에 진출하고서도 계속 이어졌다. 1543년 겨울 미암은 고창의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옥과 현감으로 있는 하서를 찾아가 <효경간오> 한질을 놓고 가는 등 지속적인 만남을 이어간다. 이들의 남다른 우정을 증명하듯 고창 선운사 도솔암으로 올라가는 바위에는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기념하듯 유희춘과 김인후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1547년(명종2년) 유희춘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인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미암 역시 사화에서 비켜 갈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목숨 걸고 가야하는 제주도도 고향 해남에 가깝다는 이유로 다시 두만강 근처인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지를 옮겨야 했다. 미암이 다시 종성으로 유배를 가는 도중 하서는 미암을 만날 수 있었다. 멀리 천리길 유배를 떠나보내는 하서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하서는 미암에게 재회를 약속하면서 시를 한 수 지어주었다.
 
술에 취해 꺾었다오. 버들가지 하나이별의 순간은 다가오는데, 한없는 이 정을 어이하리만리라. 내일이면 머나먼 길을 떠난다지저 달이 몇 번이야 밝아야 그대 돌아오려나
 

친구 간 이별의 애뜻함이 듬뿍 담겨 있는 시다. 하서의 풍부한 시적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기의 사림들을 보면 모두가 시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를 남긴다. 석천 임억령은 400여수의 시를 남기었고, 하서 역시 1천6백여수의 엄청난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인후와 유희춘이 다녀간 것을 기념하여 새긴 것으로 보인다. 김인후와 유희춘은 절친이라 할 정도로 돈독한 우의를 보인 사림시대의 사대부였다.
▲ 고창 선운사 도솔암 암벽 김인후와 유희춘이 다녀간 것을 기념하여 새긴 것으로 보인다. 김인후와 유희춘은 절친이라 할 정도로 돈독한 우의를 보인 사림시대의 사대부였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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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사림들이 이처럼 많은 수의 시문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사화를 겪으면서 유배를 가거나 귀향하여 자연에 귀의 시를 쓰게 된 것도 있었다. 사림들이 험난한 고초를 통해 역설적으로 학문과 문학 발달에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성리학이 인문, 사회, 자연의 전반을 통해 이론 체계를 세우고, 사상적인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사림파의 문예의식이 보편적인 시문학으로 발전해 간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한다.

하서는 이날 멀리 유배를 떠나는 미암의 처지가 걱정 되었던지 미암의 아들을 사위로 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실제로 미암의 아들과 하서의 딸은 혼인을 하게 된다.

이들은 미암의 종성 유배기간 중에도 자주 시를 써서 보내며 안부를 묻고 둘의 우정을 이어간다. 이들이 주고 받은 여려 편의 시가 남아 있는데 한결같이 친구에 대한 따뜻한 우정과 절의가 느껴지는 시들이다.

그러나 미암의 유배가 너무 길었던 것일까? 아쉽게도 하서는 미암이 유배생활 중이던 1560년 세상을 뜨고 만다. 미암은 1567년(선조1년)에서야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어 둘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미암이 좀더 일찍 해배 되었다면 아마 <미암일기>에도 하서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왔을 것이다.

아름다운 우정이었지만 사림시대를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사화로 인한 이별은 다시 재회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태그:#필암서원, #김인후, #유희춘, #확연루,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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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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