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어머니가 성장할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외할아버지의 완고했던 보수적 여성관이 한몫 했던 듯하다. 그래서 문자를 거의 해독하지 못하고 쓰는 것은 더욱 그렇다.
아주 먼 옛날 어머니는 나한테 당신이 글을 몰라 너무 창피하다 하셨다. 아버지에게 조차 창피하셨던지 아버지가 집을 비울 때면 나에게 글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곤 하였다.
그렇게 어머니에게는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한 글 배우기가 시작되었는데 그 잠깐의 짬도 아버지의 귀가하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너무도 신속히 '일상'으로 후퇴하셨다.
그런 글 배우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농사 일의 한바퀴가 사람의 힘으로 돌아가던 시절이라 허리 펴고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이 허락되지 않았다. 농사 일에서 '해방'되는 시간이 오더라도 당신의 남편이 부재해야 했고 또 글 선생이 되어줄 아들이 시간을 허락해줘야 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어머니의 실력은 그때 그 수준 그대로다. 교회에 가실 때 성경책과 찬송가 책을 들고 다니신다. 평안을 누려야 할 예배당에서 조차 어머니는 글자라는 괴물과 끝 모를 싸움을 하고 오시는 듯 했다.
지금도 차를 타고 읍내라도 행차할라치면 도로 위 교통표지판과 상업간판들에 박힌 글자들을 읽어내느라 어머니의 입은 쉴새없이 달싹거린다. 글자에 대한 압박감은 어머니 잠재 의식의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수시로 걸어나와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가는 듯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한 구석에 누군가 붙여 놓은 안내문구를 보면서 어머니를 생각한다. 평생의 원죄처럼 몸 여기저기 들러붙어 수시로 괴롭혔던 문자 콤플렉스. 저 어설픈 안내문구의 반의 반이라도 표현할 줄 알았다면 삶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워졌을까. 내가 낱말들을 조합해서 의미있는 문장을 만들어내면서 얻는 희열은 어머니의 '무지'에서 오는 고통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