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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노동자회 회원소모임 <페미워커클럽>은 2021년을 맞아 힘들었던 한해를 거치고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준 책 6권을 선정했습니다. 책을 함께 읽고, 코로나19 이후 단절이 부각된 세상에 '우리'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페미워커의 시선으로 담아냅니다.[편집자말]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지는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두 가지를 꼽자면 '사고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개별적으로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만 합이 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바로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내 삶의 결정권은 내게 있다고 배운다. 그리고 그것을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말속에는 너무나 큰 모순이 숨겨져 있다.

'거짓말 스트레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반복적으로 거짓말하거나 침묵함으로써 생기는 긴장, 부담을 말한다.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p.47 참고)

물론 누구나 100% 진실만을 이야기하며 살지는 못한다. 그러나 매 순간 존재의 부정을 위해 연극을 해야 한다면? 자꾸만 가려지는 나를 스스로 속이며 숨긴다면? 상냥한 여자. 진짜 사나이. 사랑과 정열은 이성애로부터! 입학-졸업-취업-결혼-출산의 생애주기. 이것만이 정상이고 정답이라 외치는 사회에서 재미와 감동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살아남기 위한 협상과 타협

나는 프리랜서 연기자다. 일을 시작한 초기에 들었던 말 중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너는 좀 예쁜 척을 할 필요가 있어." '나다움'으로 무장하리라 다짐한 나의 포부를 무색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물론 내 직업은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좀 예쁜 척을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단지 다른 인물을 연기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은 내가 연기자로서 일하기 위해서는 연기하는 인물 외에도 또 다른 가면을 한 겹 덧씌우고 사람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1년 남짓 여러 차례의 미팅과 오디션을 반복하며 나는 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과는 동떨어진 성향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여성성과 일치하는 외형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예쁜 척'을 해야만 일이 주어지는 환경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거의 없었다.

연기가 끝나면 긴 시간을 들여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미팅이 끝난다. 하지만 막상 돌아온 대답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한결같았다. '아쉽게도 이미지가 맞지 않아 이번 작업은 함께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내 연기와 분석이 부족해서라고, 연습을 더 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기자로서 연기를 잘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일 뿐, 잇따른 낙방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일하며 알게 된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나다움'보다 '여배우다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나와의 협상을 시작했다. 내게 일을 주는 사람들, 나와 일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은 '나다운' 솔직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다움'보다는 '여배우다움'의 옷을 한 겹 더 입고 오디션장에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실제로 '여배우다운' 옷을 사기도 했다. 생각보다 이건 꽤 효과가 있었다. 낙방은 점차 줄었고 나는 배우로서 나름의 필모그래피를 쌓을 수 있게 됐다.

여배우다움, 하지만 난 아직도 이것의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이러한 협상으로 인해 스스로 좌절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이 또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노력과 투자겠거니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이게 오롯이 나의 선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지금의 나 그리고 나와 같은 누군가가 처한 현실이겠지.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읽고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와 '다 똑같지 못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차별과 편견에 대항하기 위한 외침

나와의 협상이 진행된 이후 현장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장면과 대사들을 마주치곤 한다. 가령 약자와 소수자를 배제하는 대사 혹은 불필요한 폭력의 장면들이 그렇다. 

이럴 때 사용하는 또 다른 협상법이 있다. 장면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수정하는 방향성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제안이 받아들여질 때 얻는 성취감은 업무 만족도를 높여 주고, 뿌듯함은 덤이다.

이외에도 일터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나만의 방법은 많다. 그러나 바란다. 이러한 방법 없이도 일할 수 있기를 말이다.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p.239  참고)

나는 소수자가 아니라는 단단한 믿음으로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금방 힘을 잃었다. 비좁은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그 누구도 모든 면에 다수자일 수는 없다.

그대도 언젠가 '나다움'과는 무관한 의상을 사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필사적인 노력 없이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누구나 사회가 얘기하는 정상성에 대한 물음표를 던질 수 있었으면 한다.

나 역시 사회가 만든 여배우다움이 아닌 나다움으로 그대들을 만나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기를.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희정 지음, 오월의 봄 펴냄) 책 표지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희정 지음, 오월의 봄 펴냄)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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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페미워커클럽,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 #정상성, #한국여성노동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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