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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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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가 지지부진해진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최근, 전북 부안의 지인으로부터 추천받고 펴든 신간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은 드물게 사흘 만에 읽어냈다. 전근대 조선에 살았던 벼슬아치들이 내밀하게 전하는 삶과 당대 사회의 풍속도가 무척이나 흥미로워서였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학교에서 배운 거시사(巨視史)로는 이르지 못하는 그 시대의 일상적 삶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 전공 전경목 교수가 쓴 이 책의 텍스트인 '옛 편지'는 '간찰(簡札)·서찰(書札)'로 불린 사대부들의 한문 편지다. 저자는 우반동(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의 부안김씨 종가에서 16세기부터 500여 년 동안 주고받은 수백여 편의 간찰을 연구했다. 

사대부들에게 "개인적 감정은 통제나 억압 또는 절제의 대상"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저자는 편지에 드러난 "우반동 사람들과 그와 교유했던 인물들의 솔직한 감정 표현과 사실적인 기록에 주목"했다. 

저자는 간찰에 담긴 주요 감정으로 "욕망, 슬픔, 억울, 짜증, 공포, 불안, 뻔뻔함" 등 일곱 가지 열쇳말을 꼽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결로 드러나는 그들의 감정을 통하여 당대의 삶, 전근대의 일상을 21세기 독자 앞에 생생하게 펼쳐놓았다.

덕분에 독자는 "축첩(畜妾)의 명분과 욕망의 변화, (…) 청탁으로 점철된 수령의 일상과 은폐된 짜증, (…) 기근과 돌림병, 일상생활 속에 깊게 드리워진 굶주림의 공포, (…) 유배당한 관리들의 고달픈 생활과 이를 통해 드러나는 뻔뻔함 그리고 그들을 돕는 후원자의 바람"(책머리에)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열일곱 아들의 후사를 염려한 아비
 
전라도 관찰사 원두표가 김홍원에게 중매를 부탁하며 보낸 간찰. 1640년 8월 10일. 죽간 문양이 인쇄된 고급 인찰지에 흘림 글씨로 썼다.
 전라도 관찰사 원두표가 김홍원에게 중매를 부탁하며 보낸 간찰. 1640년 8월 10일. 죽간 문양이 인쇄된 고급 인찰지에 흘림 글씨로 썼다.
ⓒ 부안김씨 소장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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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지 감정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욕망'이다. 1640년 8월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원두표(1593~1664)는 부안현 줄포에 살던 우반종가의 김홍원(1571~1645)에게 편지를 보냈다. 
 
드릴 말씀은 저희 큰아이가 혼인한 지 4년이 되었는데 아직 태기가 없습니다. 또 며느리가 심한 배앓이를 해서, 귀여운 손자를 얻을 것이라는 온 집안의 희망이 이제는 끊겼습니다. 그래서 좋은 집안의 피를 이은 여자를 구한 지 오래되었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소문으로 듣건대 김안주(金安州)에게 서녀(庶女)가 있다고 하던데 만일 그녀를 얻어서 아들을 낳게 된다면 반드시 절의 높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안주'란 안주(安州) 목사 김준으로 그는 후금의 침략(1627) 때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처자와 함께 화약에 불을 댕겨 순절한 무반(무관)으로 김홍원과 절친한 사이였다. 김준은 뒤에 고부의 정충사, 안주의 충민사에 제향 되고, 장무(壯武) 시호를 받았다.

원두표는 아들의 첩을 들여 손자를 얻고자 김홍원에게 중매를 청한 것이었다. 열흘 뒤에 그는 김홍원이 요청한 말다래(말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려 놓은 기구), 참봉첩과 함께 백지와 가죽신을 선물을 보내고, 서녀를 아들이 아니라 아우인 원두추(1604~1663)의 부실(副室)로 삼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며느리로 원한 김준의 서녀를 아들이 없는 동생의 부실로 바꾼 촌극엔 이유가 있다. 그녀가 아들보다 열 살 이상의 연상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원두표의 아우 원두추가 김홍원에게 중매를 재촉하며 보낸 간찰. 1640년 11월 1일. 한참 나이 어린 원두추가 예를 갖추어 정자로 쓴 편지다.
 원두표의 아우 원두추가 김홍원에게 중매를 재촉하며 보낸 간찰. 1640년 11월 1일. 한참 나이 어린 원두추가 예를 갖추어 정자로 쓴 편지다.
ⓒ 부안김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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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표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실패한 이 혼담은 당대 혼인제도의 봉건성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가문의 혈통을 보전해 줄 대상'으로 떨어진 여성의 권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원두표가 첩을 들여주기로 한 맏아들 원만석(1623~1667)은 당시 17살이었다.

사회관계망 유지의 수단인 '청탁'
   
7가지 감정의 열쇳말로 서술되고 있지만, 전편을 관통하는 것은 '청탁'이다. 신분사회 조선의 양반은 벼슬을 독점하면서 벼슬아치로서 누리는 온갖 편의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나누고 있었다. 온갖 청탁이 이어지고, 이를 들어주는 것은 그들 양반사회의 사회관계망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원두표가 김홍원에게 보낸 가죽신은 감영의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공용 물품이다. 말다래나 백지도 마찬가지다. 청탁은 편지로 이루어졌고, 뒤에 고맙다는 인사도 편지로 전해졌다. 토지조사 사업이 전국에서 시행되던 때에는 관련 민원이 쏟아졌는데, 청탁하는 쪽도 받는 쪽도 부정하다는 인식은 없었다. 지나치지 않은 청탁은 '인정(人情)'이라고 여긴 시대였기 때문이다. 

공용 물품을 사사로이 쓰는 것도 현대라면 마땅히 단죄하는 범죄다. 그러나 요즘과 달리 조선조의 벼슬아치들은 주권자가 아니라 '목민'의 대상에 그친 백성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양반들끼리 주고받는 청탁을 거리끼지 않았다. 

도망간 노비를 찾는 추노, 노비의 관리까지 청탁했고, 별장이나 농장의 관리조차 청탁의 대상이었다. 온천 나들이를 온 양반의 가족을 챙기느라 이름난 온천이 있는 고을 수령은 그 처리가 한 업무가 될 정도였다. 

객지에 살다가 병들어 귀향하는 환자 이송 청탁, 신병에 좋은 약초를 구해달라는 청탁도 심심찮았다. 이어지는 청탁에 수령은 짜증을 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청탁으로 유지하는 사회관계망을 훼손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연면한 청탁은 이처럼 유구한 역사가 있었던 셈이다. 

빈 고을 창고 앞에서 수령들이 빠진 절망과 무력감
 
순천 현감 김명열이 관내의 한 찰방에게 보낸 간찰. 1671년 5월 29일. 굶주린 백성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괴로웠던 김명열은 자신의 심정을 간찰에 담았다.
 순천 현감 김명열이 관내의 한 찰방에게 보낸 간찰. 1671년 5월 29일. 굶주린 백성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괴로웠던 김명열은 자신의 심정을 간찰에 담았다.
ⓒ 부안김씨 소장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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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5백년 문화를 운운하지만, 굶주림은 일상이었다. 천재지이(天災地異)로 말미암은 흉년의 반복으로 수백, 수천 명이 굶주려 죽는 일이 잦았다. 경신 대기근(1670~1671) 때는 백만 명이 아사했고, 소도 4만여 마리가 굶어 죽었다. 흉년에도 청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백성을 구휼해야 할 환곡을 대여해 달라는 청탁도 있었다.

수령들은 흉년에 텅 빈 고을 창고 앞에서 절망하고 무력감에 빠져야 했다. 김홍원의 아들로 1670년 순천 현감으로 부임한 김명열(金命說, 1613~1672)은 한 편지에서 "백성들의 굶주림이 봄보다 더 심한데도 아무런 능력이 없어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고을 수령의 몸으로 어찌 차마 우두커니 서서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썼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몰염치'도 사대부들 감정의 한 자락이었다. 타지에 귀양 온 유배객들은 유배에 드는 각종 비용과 유배 생활의 식량 등을 자신이 조달해야만 했다. 유족한 지방 양반들이 권력에서 밀려나 유배된 이들의 경화사족(京華士族, 한양과 그 근교에 거주하는 사족)을 보살펴주었다. 

지방 양반이 베푼 인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과 인맥을 형성함으로써 가문의 명성과 지위를 높이려 한 이 배려는 그러나, 헛일이었다. 도움에 감지덕지하던 유배객은 유배지를 떠나면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배(解配) 이후 오고 간 편지가 거의 없는 이유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무상한 세정(世情)이었다. 

시대가 다르지만, 인간의 '욕망'과 '이익 추구'가 보편적 성정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는 것으로도 이 책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환기해 준다. 흥미롭게만 읽히던 이야기에 일순,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감동으로 바뀌는 건 이 편지를 통해 인간의 삶과 역사적 진실이 만나는 순간을 맞닥뜨릴 때다. 

사대부들이 주고받은 편지로 들여다본 이 일상 생활사는 한갓진 흥밋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의 도움으로 우리는 중세 봉건사회와 당대의 인간들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역시 어떤 형식으로든 오늘의 삶과 인간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일 터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에서 낸 ‘고전 탐독’ 13권이다. 고전 탐독 시리즈는 <인정사정, 조선 군대 생활사>(1권), <군영 밖으로 달아난 한양 수비군>(12권), <우반동 양반가의 가계 경영>(10권) 등 모두 13권이 나왔다. 틈나는 대로 읽어보리라며 나는 이 책을 인터넷 서점의 보관함에 쟁여두었다.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

전경목 (지은이),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2021)


태그:#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 #간찰에 드러난 일상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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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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