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극장'에선 처음 또는 다시 볼 만한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작품부터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까지 다양하게 다루려고 합니다.[기자말]
<나인 마일즈 다운> 영화 포스터

▲ <나인 마일즈 다운> 영화 포스터 ⓒ 페어팍스인터내셔날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중심에서 지하 탐사작업을 하던 연구팀과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자, 경호회사의 직원 잭(아드리안 폴 분)이 현장에 파견된다. 거센 모래바람을 뚫고 도착한 잭은 텅 빈 기지에 홀로 남아있던 제니(케이트 노타 분)를 발견한다. 자신을 연구팀의 일원이라 소개한 제니는 일부가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면서 빨리 현장을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본부와 연락을 취한 잭은 연구팀에 여성은 없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1989년 미국 개신교 계열의 케이블 방송국이 지옥의 문을 연 구멍과 그곳을 담은 소리를 다룬 충격적인 방송을 내보낸다. 핀란드 신문의 보도를 인용하며 1979년 소련의 과학자들이 시베리아에 구멍을 뚫고 탐사를 하던 중, 지하 9마일(약 14.5km) 깊이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 마이크를 구멍 안으로 내려보냈더니 사람들의 비명이 녹음되었다고 전한 것이다. 

'시베리아 지하의 지옥 비명'은 엄청난 화제를 모았지만, 곧 거짓임이 밝혀졌다. 지옥의 소리는 실은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마리오 바바의 1972년작 <바론 블러드>를 위해 녹음된 음성이었고, 핀란드엔 방송국이 인용했던 매체 자체가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나며 사기극은 막을 내렸다.
 
<나인 마일즈 다운> 영화의 한 장면

▲ <나인 마일즈 다운> 영화의 한 장면 ⓒ 페어팍스인터내셔날

 
영화 <나인 마일즈 다운>은 제목 그대로 도시전설인 '시베리아 지하의 지옥 비명'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의 흥미로운 포인트는 관객과 벌이는 진실과 거짓의 게임이다. 영화는 <곡성>(2016)과 마찬가지로 미끼를 계속해서 던져 관객을 헷갈리게 만들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연구팀을 이끌던 교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영상엔 악마의 외모에 미혹되지 말고 믿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는 제니가 악마라고 경고한다. 반면에 제니는 지하 9마일에서 나온 가스로 인해 사람들이 집단 환각에 빠졌고 그 결과 교수가 동료를 총으로 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또한, 자신이 연구팀 명단에 없었던 이유는 여성을 따로 올리면 절차가 번거로웠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제니는 진짜 연구팀의 박사인가, 여성의 형태를 한 악마인가? 죽은 아내와 아이들의 환영이 보이는 건 가스의 탓인가, 악마가 치는 장난 때문인가? 영화는 혼란스러운 잭은 통해 '구멍'의 의미를 탐사대가 드릴로 뚫은 구멍, 지옥으로 통하는 구멍, 잭의 죄책감이 만든 마음의 구멍, 잭이 빠져나갈 수 없는 구멍으로 범위를 넓혀간다. 그리고 관객에게 '지옥'은 특정한 장소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 질문한다.
 
<나인 마일즈 다운> 영화의 한 장면

▲ <나인 마일즈 다운> 영화의 한 장면 ⓒ 페어팍스인터내셔날

 
현실과 비현실이 흐려지고 이성과 광기를 오가는 잭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의 한겨울 고립된 호텔에서 점차 미쳐가는 주인공 잭(잭 니콜슨 분)의 영향 아래 있다. 노골적으로 이름까지 가져왔을 정도로 말이다. 외부와 단절된 공간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어쩌면 초자연적인) 존재와 만나는 설정은 존 카펜터의 <괴물>(1982)을 연상케 한다. 지옥의 문을 열었을지도 모를 상황은 <이벤트 호라이즌>(1997)과 접점을 이룬다. 80~90년대 장르 영화를 많이 참고한 인상이다.

<나인 마일즈 다운>는 각본의 허점과 비약이 많아 중반 이후 불안감과 긴박감이 급격히 떨어진다. 영화의 대부분 분량을 잭과 제니로 이끌어가지만, 여배우 케이트 노타의 연기력이 상당히 좋지 않아 몰입을 해친다. 하지만 적절한 점프스케어와 오싹한 사운드 효과로 약점을 상쇄한다. 몇몇 장면은 대단히 멋지게 연출되었다. 특히 거울을 활용한 장면은 영화를 본 이후에도 쉬이 잊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나인 마일즈 다운>은 1995년경 존 카펜터 감독이 연출하는 프로젝트로 진행되다가 결국 그가 < LA탈출 >(1996)의 메가폰을 잡으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2002년 즈음엔 배우 발 킬머가 주인공 역할에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존 카펜터가 만든 <나인 마일즈 다운>은 어땠을까? 무척 궁금하다. 고립된 공간이 돋보이는 <괴물>, 미쳐가는 작가를 다룬 <매드니스>(1995)를 멋지게 소화한 감독이니 분명 엄청난 물건을 만들었을 거라 짐작한다. 물론, 지금의 <나인 마일즈 다운>도 나쁘지 않다. 이 정도면 오컬트물, 또는 심리 공포물로 제 몫은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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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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