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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보던 웹툰이 남초 커뮤니티의 공격으로 댓글창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몇몇 커뮤니티 유저들이 '남성 혐오 표현을 사용했다'고 주장하며 작심하고 달려든 것이다.

첫 시작은 지난 4월 15일이었다. 이날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 유저들은 네이버 웹툰 <성경의 역사>를 문제 삼았다. 이들은 웹툰에 나오는 특정 대사가 '남성혐오'라고 주장하며 '평점 테러'를 감행했다.

네이버 웹툰에서는 독자가 별점을 매기고 댓글을 달 수 있다. 이들은 해당 웹툰에 최하위 별점 1점을 주고 여성 혐오 내용으로 댓글창을 도배해 버렸다. 여기에 또 다른 남초 커뮤니티까지 가세해 다른 웹툰을 공격하면서 이 사태는 2021년 5월 4일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좌표 찍고 달려든 웹툰은 모두 남성 혐오 콘텐츠와는 거리가 멀다. 공통점이 있다면 여성 서사라는 것. 특히 <성경의 역사>는 여성 혐오를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현실을 너무 실감나게 재현한 나머지, 여성 독자들로부터 '고통 전시 포르노'라는 지적과 함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는 원성을 들을 정도였다.

여성 혐오를 실감나게 그려낸 웹툰 <성경의 역사>

이 웹툰은 여주인공 성경이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이 되기까지, '구애'라는 미명하에 남성들로부터 경험한 '폭력'을 다룬다. 성경은 인간적인 호의를 보였을 뿐인데 이를 이성적인 호감, '그린라이트'로 착각한 남자들은 막무가내로 행동한다. 고백하는 동시에 포옹하고, 거절의 뉘앙스만 풍겨도 화를 내고 위협한다. 손목을 끌고 가서 벽에 밀치고 소리 지르는 식이다.

이 남자들의 시나리오 속에는 상대가 자신을 거부할 수 있는, 동등한 인격체라는 인식이 없다. 성경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내 거'가 되었다가 '꽃뱀' 사이를 오가지만, 모두 근거 없는 망상일 뿐이다.      

그뿐인가. 성경의 친구와 사귀는 동시에 성경에게 집적대는 '여미새(여자에 미친 새끼)' 오근우, 전 여자친구가 레즈비언이었음을 보여주는 사진을 단톡방에 올려 자살 동기를 제공한 남학생까지.

이 웹툰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여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신체적‧사회적으로 여성에게 위협을 가한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문제 삼은 대사 "아 미친...남자들 제발 죽었으면"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을 하는 여학생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역시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여성 혐오를 사회 분위기로 만드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최경민 작가는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여성 혐오라니 가당치도 않다'라고 말하는 남자들을 향해, 그리고 자신은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을 향해 동시에 일침을 날린다. 그러니까 이 웹툰에서 남성을 가해자로 일반화했다는 주장은, 이 말이 놓인 복잡한 지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납작한 판단이다.
 
남성을 가해자로 일반화한다는 비판을 받은 컷. 논란 이후 "아 그런 새끼들은 제발 죽었으면"으로 수정되었다.
▲ 웹툰 <성경의 역사>  남성을 가해자로 일반화한다는 비판을 받은 컷. 논란 이후 "아 그런 새끼들은 제발 죽었으면"으로 수정되었다.
ⓒ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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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성경의 역사>는 남초 커뮤니티로부터 집중 테러를 당했다.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여성혐오 발언들로 댓글창이 도배되었다. 이 댓글들 자체가 여성 혐오를 입증하는 증거로서 이 웹툰의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행위 예술이 된 것이다.
 
맥락 제거하기 : <소녀의 세계> <이두나!>의 의태어와 <바른 연애 길잡이>의 손동작


'남성 혐오'라는 잣대로 공격의 대상이 된 또 다른 웹툰 <소녀의 세계>, <바른 연애 길잡이>를 살펴보자. 이 두 웹툰은 여주인공의 시각에서 10대(소녀의 세계)와 20대(바른 연애 길잡이)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다.

<소녀의 세계>에서 일부 네티즌들이 문제 삼은 표현인 '허버허버'는 여주인공이 최애(가장 좋아하는 인물)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버버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애초에 '허버허버'가 남자가 많이 먹는 모양새를 뜻해서 남성 혐오라는 딱지가 붙은 것하고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다리 짚는다는 뜻으로 '허버허버'를 사용했다.
▲ 웹툰 <소녀의 세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다리 짚는다는 뜻으로 "허버허버"를 사용했다.
ⓒ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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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연애 길잡이>가 남혐으로 찍힌 것은 남자 등장인물이 조금을 뜻하는 손동작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문제 삼는 이들은 이 손동작이 '미러링'을 운동 전략으로 삼았던 여성 커뮤니티 '메갈리아'의 표식이라고 주장한다. 내용상 필요한 손동작이었다는 맥락은 무시된다. 심지어 등장인물 이름이 '하남'이라는 것조차 '한남'에서 따온 게 아니냐며 의심을 제기한다.

그런 비하의 의도였다면, 하남이가 키 크고 잘생기고 성격 좋고 귀여운 데다가 좋아하는 누나를 배려하기 위해 알아서 마음을 접는 스윗 가이로 묘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인 오역이며, 트집 잡기에 불과하다.
 
'조금만'을 뜻하는 손동작으로 논란이 된 컷.
▲ 웹툰 <바른 연애 길잡이> "조금만"을 뜻하는 손동작으로 논란이 된 컷.
ⓒ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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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이두나!>도 마찬가지다. 전직 여자 아이돌 이두나와 스무 살 이원준이 펼치는 로맨스 속에는, 아슬아슬한 성적 긴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감정적으로 미묘한 변화조차 알아내고 섬세하게 접근하는, 고도의 인간관계술이 녹아 있다.

이두나가 키스를 공격의 의미로 사용했다는 걸 원준이 눈치 채거나, 함께 침대 위에 앉은 원준의 심장은 터질 것 같지만 상대가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바로 스킨십을 접고 위로를 건네는 장면은, 로맨스를 꿈꾸는 이들이 교과서로 삼아야 할 정도다.

여기에도 불법 촬영에, 이두나를 사생팬처럼 따라 다니는 남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좋아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의지라고는 없는, 예쁜 인형처럼 취급한다는 점에서 웹툰 <성경의 역사>에 등장하는 남성과 같다.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은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여성은 외모로만 평가되고, 원치 않는 남자들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으면서도 감사를 표해야 하는 걸까?

<성경의 역사>의 성경, <이두나!>의 두나는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적 위협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녀들의 시선으로 사건을 보여주기만 해도, 여성 혐오 문화를 고발하는 콘텐츠가 된다. 여주인공 이두나가 매운 떡볶이를 허겁지겁 먹는 모양새를 '허버허버'라고 표현했다며 이를 남성 혐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논란의 표현 '허버허버'와 '쿵쾅쿵쾅'에 대하여

논란의 표현 '허버허버'에 대해 더 보태자면, 이 표현이 여초 커뮤니티에서 남성 혐오적 표현으로 쓰인 적이 있다 하더라도 대중들은 그렇게 인식하지 않는다. 보통은 '허겁지겁 먹다'라는 의미로 성별을 불문하고 자기 자신에게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허버허버'가 남성 혐오 표현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스트=메갈리아=메퇘지'라며, 페미니즘과 관련된 발언을 하기만 해도 '메퇘지 쿵쾅쿵쾅'이라는 표현으로 비하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누가 '쿵쾅쿵쾅'이라고 썼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혐오라며 비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역이며 언어를 독점하는 일이다. '허버허버'도 '쿵쾅쿵쾅'도 그 자체로는 죄가 없다. 그것을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의미가 결정될 뿐.
   
그래서 드는 의문이다. 이 모든 맥락을 정말 몰랐을까? 아니, 알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을까? 이것은 적극적인 오해다. 그간 여성들이 특정 웹툰에 대해 여성 혐오라며 문제 제기한 것에 대한 보복이며 미러링이라는 의견이 있다. 말이 나온 김에 그간 여혐으로 몇 차례 지적당한 바 있는 웹툰 <복학왕>을 살펴보자.

이 웹툰의 한 에피소드에선, 남주인공 기안이 갖은 고생을 다 해가며 기업에 입사하는 동안 여주인공 봉지은은 상사와의 성관계를 통해 부정한 방법으로 정직원이 된다는 뉘앙스의 내용이 등장해 논란이 일었다.

기안의 작품에서 남성은 의지를 가지고 미래를 일궈나가는 주체다. 그러나 여성은 외모와 나이로 평가되며("누나는 늙어서 맛없어" 등의 대사)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성공한 남자가 가질 수 있는 트로피로 그려진다. 이것이 여성 혐오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여성 혐오란 말인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여성 혐오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여성 서사' 자체가 문제시된다. 개그맨 장동민이 예능 프로그램 <마녀사냥>에서 한혜진에게 했던 말처럼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주인공이니까, 그 여자는 왕자의 도움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앞서 언급한 웹툰 <성경의 역사>, <소녀의 세계>, <바른 연애 길잡이>, <이두나!>가 모두 여성 서사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몇 주째 계속된 여성 서사 웹툰에 대한 남초 커뮤니티의 테러는,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알지 않으려는 의지 앞에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웹툰을 보는 게 삶의 낙인 나로서는, 애정하는 여성 서사 웹툰이 공격을 당했다는 게 분하다. 밑도 끝도 없이 몰려와서 여성 혐오 댓글을 다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현타'가 온다. 그들에게는 놀이일 뿐인데 논리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열심히 설명해봐야 조롱하는 이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알지 않으려는 의지로 무장한 사람 앞에서 논리는 힘을 잃고 만다. 한숨이 나온다. 나는 왜 손가락 아프게 글을 쓰는가. 정신 차리자. 나는 나를 위해 쓴다. 혐오에 혐오로 맞받아치지 않으려, 애써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적는다. 누군가에게는 한낱 먹잇감으로 소비될지라도.

태그:#여성혐오 , #남성혐오, #성경의역사, #소녀의세계, #바른연애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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