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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가셔브룸Ⅱ(8035m) 정상에서
 2006년 가셔브룸Ⅱ(8035m) 정상에서
ⓒ 김홍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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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김홍빈은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산을 동경했지만 1983년 송원대학교 산악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시절 광주전남 암벽대회 2위, 전국 등산대회 3위를 하는 등 실력있는 산악인으로 성장해 갔다. 에베레스트(8848m), 낭가파르밧(8125m) 등을 등반했다.

그러나 그는 1991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를 등반하다 조난을 당해 양쪽 손가락과 손목을 절단해야만 했다. 장애인이 된 이후 그는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해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정에 도전했다.

그는 2009년 7대륙 최고봉을 13년 만에 완등했다. 또한 히말라야 13좌를 차례로 올랐다. 장애인으로는 세계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는 또 올해 6월 히말라야 14좌 마지막 완등지인 브로드피크(8047m)를 향해 출발할 예정이다.

김홍빈씨를 지난 4월 29일 전남 광주에 있는 '김홍빈과 희망만들기'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그와 나눈 산과 인생에 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다리의 힘으로 다시 시작하다

그가 생애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한 건 32년 전이다.

"1987년이었죠. 광주·전남 지역 등산학교 출신 선배들이 1989년 동계 에베레스트 등반을 계획했어요. 2년 정도 준비를 하며 훈련도 엄청 했었죠. 팀은 해발 8000m 정도까지 갔다가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되돌아 왔지만 저는 이 산행을 통해 고산 등반에 자신감을 얻게 됐어요."

그는 1990년 4월께 낭가파르밧을 등반하면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는 1991년 장비와 식량을 확 줄여 북미 최고봉 매킨리 단독 등정에 도전했다. 그는 해발 5700m에서 정상 등정을 두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갖고 간 식량은 바닥이 났고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그는 추위와 탈진 등이 겹쳐 수면 상태에 빠져버렸다. 다행히 지나가는 산악구조대에 발견돼 눈보라가 치는 악조건 속에서 16시간이나 걸려 겨우 구조됐다.

"구조과정에서 몸을 묶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왼쪽 어깨를 좀 세게 묶었던 것 같아요. 혈액순환이 안 되고 몸이 얼기 시작했나 봐요. 제가 추우니까 뭐를 껴안으려고 했는데, 등산용 글로버가 미끄러우니 글로버를 벗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양손이 동상에 걸렸어요."

그는 병원에서 10일만에 깨어났다.

"다들 죽었다고 생각했나 봐요.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너는 오래산다더라'고 말씀했는데, 그때부터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발동된 것 같아요. 7번 수술을 했지만 양쪽 손가락을 모두 절단할 수 밖에 없었어요. 실은 손목도 없어요. 이것은 뱃살을 떼다 갖다 붙인 거예요. 병원에 있을 때 많이 울었죠. 병원 방향이 서쪽이라 저녁에 노을이 지면 괜히 더 슬펐어요. 손목 관절만 있어도 상체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을 제대로 가꿀 수 있는데, 팔굽혀펴기도 힘들었어요. 하체운동만 할 수 있었죠."
 
2007년 에베레스트 남봉(8750m)에서
 2007년 에베레스트 남봉(8750m)에서
ⓒ 김홍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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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8월 말 퇴원해 당시 부모님이 계시던 전남 순천으로 돌아왔다. 10월 추석 연휴 때 아는 선배가 찾아 왔다.

"선배가 광주·전남 등산학교에 나와 강의를 좀 하라고 해서 그때부터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죠.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같이 산도 타기 시작했어요. 저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짧은 시간에 다시 산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좌절과 슬픔을 산을 통해 빨리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내 IMF로 퇴사를 하게 됐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5대륙 최고봉을 등정하기로 결심했다. 1997년 봄, 그는 고산 등반이 가능한지 자신을 테스트하기 위해 일본 도야마현에 있는 높이 3015m의 다테야마산(立山)을 스키 등반으로 올랐다.

그는 이 산행을 통해 고산 등반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하체 근력을 기르기 위해 사이클, 인라인 스케이트, 알파인스키를 훈련했다.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거의 휩쓸었다. 1999년부터 2006년도까지 7년 정도 알파인스키 장애인 국가대표로도 활동했다.

"저는 발의 힘으로 산을 오르내려야 하잖아요. 빙벽을 올라갈 적에는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꽃발로 디뎌야 해요. 나중에는 다리가 후덜거리죠. 다리가 떨리면 발이 빠져요. 안 빠지려면 체력을 길러야죠. 인라인 스케이트가 좋은 거예요. 스키는 스피드를 이겨내려면 하체가 좋아야 하고요."
 
2019년 전국체전 알파인스키 회전경기 출전 당시
 2019년 전국체전 알파인스키 회전경기 출전 당시
ⓒ 김홍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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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바꿔야 하는 고산 등반

그는 1997년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5642m) 등정을 시작으로 같은 해에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 1998년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62m)와 북미 매킨리를 등정했다.

이전에 도전했다 실패했던 아시아 최고봉 에베레스트와 오세아니아 최고봉 코지어스코(2228m)를 2007년 등정했고, 2년 뒤인 2009년에는 남극 최고봉 빈슨 매시프(4897m)를 마지막으로 7대륙 최고봉을 완등했다. 13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장애인으로서는 세계 2번째 기록이었으며, 열손가락이 없는 장애인으로는 세계 최초였다.

그는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 등정의 꿈도 현실로 만들어 갔다. 2006년 가셔브룸Ⅱ(8035m) 등정을 시작으로 같은 해 시샤팡마(8027m), 2007년 에베레스트, 2008년 마칼루(8463m), 2009년 다울라기리(8167m), 2011년 초오유(8201m), 2012년 K2(8611m), 2013년 캉첸중가(8586m), 2014년 마나슬루(8163m), 2017년 로체(8516m)와 낭가파르밧, 2018년 안나푸르나(8091m), 2019년 가셔브룸Ⅰ(8068m)등 히말라야 13좌를 차례로 등정했다.
 
2008년 마칼루(8463m) 정상에서
 2008년 마칼루(8463m) 정상에서
ⓒ 김홍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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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8000m급 13좌를 등정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담력과 집중력이 있어야 해요. 고산에서는 한 발 한 발에 생사가 왔다 갔다 하잖아요. 저는 손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앞을 보고 걷는 것에 집중합니다. 히말라야 같은 고산에서는 넘어지면 죽어요. 한 번 미끄러지면 순식간에 2000m, 3000m씩 봅슬레이보다 더 빨리 추락합니다. 잡을 데가 없잖아요. 나무가 있습니까, 돌이 있습니까. 오로지 얼음하고 눈밖에 없잖아요.

체력은 기본으로 갖춰야 해요. 그런 준비 없이 간다면 '나 죽겠소' 하는 것과 같은 거죠. 워킹 잘 한다고 해서 히말라야 갈 수 있는 것 아닙니다. 빙벽등반, 암벽등반 등 등반기술도 굉장히 좋아야죠. 걷는 자세부터 달라야 됩니다.

고산에 가면 생리현상도 바꿔야 해요. 아침에 볼일을 일찍 봐야죠. 산에 올라가다 중간에 매달려서 그걸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전벨트 풀어야 하는데 미끄러지면? 가는 거예요. 실제로 똥 누다가 죽은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새벽에 일어나 대변을 보죠."

그는 눈사태의 무서움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눈사태도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는데, 작은 것은 괜찮지만 아주 큰 것은 살 수가 없어요. 눈에 파묻히면 30분 이내에 구조돼야 해요. 얕게 묻히면 스스로 뚫고 나올 수도 있지만 운이 좋아야죠. 히말라야는 폭신폭신한 눈이 아니라 얼음 덩어리입니다. 한 대 맞으면 가요. 그냥 돌덩어리예요. 눈에 묻혀서 죽는 게 아니라 맞아서 죽는 겁니다. 엎드려서 공간 확보를 하고 있어도 구멍이란 구멍은 다 찾아서 눈이 들어옵니다. 눈사태 후폭풍도 어마어마 합니다. 떨어지는 속도도 있고."
      
그는 고산 등반은 운도 크게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날씨가 도와줘야 합니다. 큰 산은 산 자체에서 기상 변화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죠. 그래서 신이 허락을 해줘야 올라갈 수 있다, 산이 받아줘야 등정할 수 있다는 표현이 나오는 거죠. 아무리 등반 실력이 있고 힘이 좋다고 해도 날마다 바람 불고 눈 오면 어떻게 올라가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정상 언제 올라 가냐고.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학암포 해벽에서 암벽등반 훈련 중
 학암포 해벽에서 암벽등반 훈련 중
ⓒ 김홍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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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람들이 고산 등반을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빨리 가는 산행 스타일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면 뛰어가잖아요. 체조도 안하고, 사진도 안 찍고, 옆 사람들과 걸으면서 이야기도 안하고. 30분 후다닥 빨리 가서 30분 쉬어버려요. 일등으로 들어와야지 잘 하는 거잖아요. 근데 이게 고산에서는 천천히 쉬지 않고 가야 해요. 그러면 땀도 덜 나요. 산행도 스트레스를 안 주고 천천히, 꾸준히 가면 이 사람이 결국 더 빨라요.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내 몸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고소 증상(산소부족)이 빨리 옵니다.

등반을 하다 보면 우리는 유럽의 할아버지들을 못 따라가요. 그 사람들은 줄을 묶어서 가요. 한국 사람들은 줄 묶으면 미쳐버려요. 빨리 뛰는 산행만 했지 천천히 같이 가는 산행을 안 해 봤어요. 간단히 말해 땀 흘리면 체력 소모가 많잖아요. 에너지가 낭비되잖아요. 천천히 가면 체력도 더 비축돼요. 가장 힘들다는 사람들 기준에 맞춰서 천천히 걷는 습관을 길러야 돼요. 스틱 등 장비 사용법도 잘 배워야 하고요."

"이번에는 반드시 출발할 겁니다"

그는 올해 6월 히말라야 14좌 마지막 완등지인 브로드피크 등반을 앞두고 있다. 

"등반대장은 유재강 선배가 맡았고, 후배들과 함께 6명으로 팀을 구성했어요. 출국 일정을 6월 10일 쯤으로 잡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점들이 많네요. 발대식도 코로나19 때문에 우왕좌왕하고 있고, 요즘 경제적 후원을 받기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반드시 출발한다는 생각으로 일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홍빈씨는 인터뷰를 끝내면서 마지막으로 장애인 당사자로서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장애인들은 대체로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낮은 산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갈 용기도 없고, 같이 갈 사람도 없습니다. 장애인들의 처우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사회 참여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장애인들은 고립되고 소외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로인해 의욕 상실과 무기력, 도움만을 의존하는 성향, 심신쇠약에 대한 문제가 날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장애인들의 심신단련 프로그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단법인 '김홍빈과 희망만들기'를 설립해 장애인, 청소년 등 이웃들과 함께 둘레길을 걷으면서 작은 희망의 불씨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많은 후원 부탁드립니다."
 
2019년 가셔브룸I(8068m) 캠프2에서 캠프3 구간 사이에서
 2019년 가셔브룸I(8068m) 캠프2에서 캠프3 구간 사이에서
ⓒ 김홍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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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홍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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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tracking photographer. 문화, 예술, 역사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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