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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집에서 가져왔던 압력솥이 고장 났다. 증기배출구 쪽이 문제가 됐는지 밥이 타기만 하고 익질 않는다. 요즘 말로 하면 병행수입, 옛날에 집에서 요리해주고 판매하던 사람들에게 산 제품이라 정식 as가 안된다.

인터넷에서 부품을 사서 고치면 된다는데 혼자는 못하겠어서 남편에게 부탁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몇 년을 버티다 국산 압력솥을 샀다. 스테인리스 제품은 사서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연마제 제거 작업을 해줘야 한다.

스테인리스 후라이팬 3개를 10년째 쓰고 있어서 연마제 소독쯤이야 뭐 가뿐하지 싶었는데 남편이 연마제는 식용유로 닦아야 한단다. 그동안 식초물로 하고 검은 게 안 나올 때까지 닦고 썼는데 그게 아닌가 싶었다. 연마제가 지용성이라며 과학적 근거를 대니 그렇구나 하고 방법을 바꿔서 식용유로 열심히 닦았다.

밥솥 구석구석을 닦고 세제로 설거지한 후 밥을 했다. 오랜만에 압력솥에 밥을 해서 그런지 약불로 줄이고 몇 분인지 헷갈려서 인터넷을 참고로 밥을 했다. 뚜껑을 열었다. 죽밥이다. 아이가 젤 싫어하는 게 죽밥인데 어쩌지. 저녁밥이 늦어서 그냥 먹어야했다. 주걱으로 밥을 펐다. 잉? 밥 색깔이... 퍼렇다.

"뭐야 압력솥으로 한 거야? 이거 뜨거운 물로 씻고 식초 소독했어?"
"아니. 자기가 식용유로 닦으면 된다며."
"아니... 난 이걸 오늘 바로 쓸 줄 몰랐지... 동글아 니네 엄마는 너무 겁이 없어."


결국 찬밥을 데워 아이만 밥을 먹고 남편과 나는 라면을 먹었다. 소고기 등심을 구워줬기 때문에 그닥 찔리지 않는 저녁이다. 다만, 저 말 '너네 엄마는 너무 겁이 없어'가 걸린다.

"그래, 내가 겁이 좀 없지. 겁이 있으면 너랑 결혼했겠냐? 학생인데."
"미래를 보고했겠지."
"내 미래가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안 했겠지."


나도 한때 지나가는 개미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사람이었다. 용사가 된 건 지난 10년 세월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별명이 불곰이다. 화가 나면 얼굴이 불곰처럼 빨개진다.' 불곰 같은 엄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는 가족들 장면으로 시작하는 <불곰에게 잡혀간 우리 아빠> 그림책 첫 장면 대사다. 책 속 주인공 아이는 학교에서 동시 짓기를 하는데 아빠, 동생,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까지 좋은 이유가 뚜렷한데 엄마가 좋은 이유를 찾지 못한다. 

아빠에게 왜 엄마랑 결혼했냐고 물었던 아빠가 해준 이야기는 놀랍다. 배낭여행을 하다 길을 잃었는데 난데없이 불곰이 튀어나와 아빠를 안고 달렸고 그 불곰이 바로 엄마라는 거다. 밤마다 곰가죽을 벗고 자는 엄마를 상상하던 주인공은 외할머니댁에서 엄마의 어릴 때 사진을 본다. 자기와 똑닮은 여자 아이와 책을 한쪽에 든 머리 푼 아가씨 사진을 보고 또 보는 아이. 
 
불굼에게 잡혀간 우리아빠 
책표지
 불굼에게 잡혀간 우리아빠 책표지
ⓒ 서지은(알라딘 서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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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 지금은 저래도 젊었을 땐 얼마나 고왔는지 몰라. 웃기도 잘 웃고.... 새끼들 데리고 먹고 산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책은 처음처럼 소리 지르는 엄마에게 쫓겨서 집을 나서는 가족들 모습으로 끝난다. 처음과 마지막 상황이 똑같은데 그림이 묘하게 다르다. 엄마가 소리 지르는 건 같은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따뜻한 노란빛이 집안을 감싸고 있다. 가족들은 그 빛을 받으며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엄마에 대한 주인공 아이의 시선이 변했음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책을 보는 내내 마음이 착잡하다. 불곰으로 변해가는 엄마의 그림은 사실적이다 못해 다큐처럼 느껴진다.

"OOO 얼른 일어나."
"OOO 밥 먹어."
"너 같은 애는 조선팔도에 없을 거다."


기차화통을 삶은 것 같은 화력으로 온 동네에 아들 이름 석자를 알린 우리 엄마. 그녀는 나와 동생에게 속사포 랩을 쏘듯 잔소리 대사를 읊어댔다. 그런 불곰 같은 엄마도 처음엔 안 그랬다는 증언을 사촌 언니에게 들었다.

"고모가 처녀일때 같이 목욕탕 가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엄마는 타올로 빡빡 밀었는데 고모는 비누를 묻혀서 살살 해줬어. 역시 고모는 아가씨라 다르구나 했지."

10살 위인 사촌 언니는 우리 엄마의 첫 조카다. 아직 결혼 전 아가씨일 때 자신의 조카를 데리고 목욕탕에 간 엄마가 언니의 몸을 밀어줄 때 이야기를 언니가 들려줬다. 믿을 수 없었다. 비누를 묻혀서 살살살 하던 사람이 언니에겐 아가씨 고모였지만 나에겐 빡빡 떼를 밀어주는 엄마였기 때문이다. 언니가 기억하는 여리여리한 아가씨의 고모를 나는 모른다.

내가 겁이 없어지고 우리 엄마가 거칠어지면서 책 속 엄마처럼 불곰이 된 이유를 말해주는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다. 그림책에서 보면 엄마가 왜 불곰이 되었는지 그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불곰이 된 엄마의 엄마다. 그리고 그 내력을 듣는 이는 딸아이다.

남편은 자신이 불곰에게 잡혀 왔다며 엄마가 자신을 살려줬다고 얘기한다. 남편을 건사하고 자식을 돌보느라 불곰이 되지만 그걸 남편이 알아주거나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고 또 다른 여성들에게만 위로받는 엄마. 우리 엄마의 변화를 내가 이해하고 나의 변화를 내 딸이... 난 딸이 없는데 어쩌나. 여성의 마음을 여성만이 헤아리는 모습이 착잡했다.

글렌 굴드 피아노 책을 들여다보며 덩치보다 훨씬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의기소침한 곰의 두 모습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오른쪽 구석에 그려져 있다. 한때 글렌 굴드를 들었던 엄마가 불곰이 된 이유를 남편과 아들이, 우리 사회가 들어줬으면 좋겠다.

불곰에게 잡혀간 우리 아빠

허은미 지음, 김진화 그림, 여유당(2018)


태그:#불곰에게 잡혀간 우리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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