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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교동시장
ⓒ 맛객
80년대 후반 어느 해 겨울... 여수

여수 하면 먼저 오르는 게 있다. 돌산대교와 돌산갓, 오동도와 동백꽃, 여수만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산물과 지역의 별미인 서대회. 하지만 맛객이 떠올린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80년대 끝자락, 몹시도 추웠던 어느 해 겨울이 잊혀지지 않는다.

맛객의 가출 지역이 여수로 정해진 건, 그곳으로 이사 간 동네 후배가 있다는 이유 하나뿐이다. 가출 길에 외롭지 말라고 동행이 있었다. 역시 같은 동네에 살던 후배가 여러 날이 걸릴지 모르는 무단외박에 동참해 준 것이다. 후배의 부모에게는 미안했지만 의리가 뭔지 아는 녀석이다.

여수는 추웠다. 아니 가출은 추웠다. 후배가 여수에 산다지만 그 애 부모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따뜻한 아랫목은 환상일 뿐이다. 돌산대교 아래에는 소형 어선을 만드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시간을 때우기도 하고, 돌산대교를 걸어서 건너기도 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외박이란 참 나쁜 거구나 생각하며 인생을 배워나갔다.

주머니에서는 먼지만 날렸다. 밤이 되자 따뜻한 잠자리를 찾아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 대신 가마니를 덮었다. 잠이 제대로 올 리 없다. 동트기 전 가장 춥다는 그 시각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나왔다.

짓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반죽한 시멘트를 담는 고무대야가 보인다. 몇 개의 각목과 함께 고무대야를 태워 얼기 일보 직전인 몸을 녹였다. 천사의 도움을 받는양 따뜻함이 온 몸에 전해졌다. 날이 밝자 밖으로 나왔다. 안에 있을 땐 몰랐는데 나도, 녀석도 얼굴에 그을음이 잔뜩 끼어 거지가 따로 없었다.

더욱 큰 시련이 다가왔다. 이러다 굶어죽는 거 아닌가 생각 들었다. 작전을 세웠다. 일단 어디든 들어가 음식을 먹는다. 그 다음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왜 안 오지? 말하면서 출입문을 열고 밖을 살피는 듯하다가, 냅다 뛴다는 아주 간단한 작전이다.

▲ 부산 자갈치시장 부근에서 팔고 있는 찐빵
ⓒ 맛객
그때 먹었던 찐빵은 찐빵이 아니고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거였다. 맛나게 먹고 작전대로 뒤도 안돌아보고 튀었다. 맞다. 튈 때는 서로 갈라지고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도 했다. 내가 먼저 터미널에 도착했고 그 애는 기다려도 나타나질 않는다.

불안한 기분이 엄습해온다. 혹, 잡혀버린 건 아닐까. 그러나 그 애 걱정도 잠시 혼자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하는 불안감이 앞선다.

한참 후 그 애가 모습을 드러낸다. 왜 늦었냐? 물었더니 그 애는 주머니에서 담배꽁초를 꺼낸다. 꽁초를 주우면서 오느라 늦었단다. 그때 그 애에게 들은 말 중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게 있다.

분식집에서 도망칠 때 들었는데 뒤에서 주인아저씨가 하는 말.

"도둑 잡아라!"

하긴 그 다급한 상황에서,

"찐빵 먹고 돈 안 내고 도망가는 놈 잡아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아저씨를 이해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 오동도에 핀 동백꽃
ⓒ 맛객
여수는 그렇게 내 청소년기의 방황과 추억이 묻어 있는 곳. 그 여수에 왔다. 터미널 근방에서 지인을 만난 후 오동도부터 찾는다. 이미 해는 떨어져 사방은 어둑해지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 왔던 오동도,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붉은 동백꽃은 변함없다.

어린 시절 흰 눈으로 덮인 뒷산에 올라가면 빨간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꽃을 따 뒤꽁무니를 쭈욱 빨아 먹으면 그리 달콤할 수가 없었다. 아련한 기억 속의 그 맛은 지금도 변함없을까. 꽃을 하나 따 '쪽' 빨아본다. 꿀물보다 달콤함이 넘치는 맛이다. 지인에게도 그 맛을 보여주었다. 동백꽃에 꿀물이 있는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달콤함에 또 한 번 놀란다.

▲ 돌산대교 야경
ⓒ 맛객
오동도에서 바라보는 여수 시내 야경이 아름답다. 빛으로 치장한 돌산대교도 아름답다. 저 아름다움 속에 묻어 있는 그 시절 내 방황의 한 토막. 훗날 저보다 더 아름답게 추억될 수 있을까.

여수는 추억과 말집이 있어 행복한 곳

오동도를 벗어난다. 찾아가는 곳은 공화동에 있는 주막 '말집'이다. 주막과 주모는 아직도 거기 그대로 있을까? 여수에 와서 서대회무침이나 생선회를 먹어야 순리이거늘 맛객은 오늘 별다른 안주거리도 없는 말집으로 간다.

말집은 2년 전 이맘때 딱 한 번 들렀던 집이다. 그때 주모의 인정에 푹 빠져버려 늘상 기억의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는 집. 여수역 근방에서 물어물어 말집에 왔다. 찾아가던 날이 일요일이라 문 열지 않았으면 어떡하나, 걱정은 기우였다. 주모도 변함없고 분위기도 변함없다. 그때 무한정 공짜로 내 주던 돼지껍데기는 지금도 무한정 내주고 있다.

▲ 연탄불에 기름기를 빼서 구워도 딱딱해지지 않고 느끼하지도 않다. 부드러우면서도 쫀득하게 씹히는 맛이다
ⓒ 맛객
같이 간 지인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맛객에게 몇 번 물어본다. 정말 공짜냐고. 대신 막걸리를 많이 마셔주면 된다고 말했지만 이리 장사해서 뭐가 남을까 싶다. 생 돼지껍데기가 나오는 서울과 달리 이곳은 연탄불에서 두 번 지방을 쏙 뺀 후 다시 연탄불에 구워 먹는다. 이렇게 하면 많이 먹어도 느끼함은 전혀 없는 게 특징이다.

돼지 껍데기는 배받이가 일미다. 직접 구워주는 주모에게 배받이 쪽으로 구워달라고 했다. 테이블에 있는 배받이를 다 올리고 안에 가서 또 가져와 구워준다. 서울장수쌀막걸리보다 큰 통의 막걸리도 2천원 그대로다. 그간 방송도 몇 차례 탄 듯하지만 주모는 2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 곰삭은 이 고추지 국물에 껍데기를 찍어 먹으면 맛을 끌어 올려준다
ⓒ 맛객

▲ 고추지 국물에 빠진 돼지 껍데기
ⓒ 맛객
살짝 구워진 껍데기를 진맛이 느껴지는 고춧잎 김치 국물에 찍어 먹으니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맛이다. 간장에 고추냉이 넣고 다진 고추 들어간 것에 찍어 먹는 맛은 저리 가라다! 그러나 이날 맛객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 입에 착 들어맞는 무김치, 밥 생각 난다
ⓒ 맛객
무김치가 그것이다. 사각썰기 해서 담그는 무와 달리 무 한 개를 반 토막으로 잘라 담근다. 주로 김장할 때 담갔다가 몇 개월 뒤 무에 맛이 배어들 때 먹는다. 시원하면서 아삭 씹히는 맛은 깍두기 같은 건 근처에도 올 수 없는 맛이다.

▲ 무김치가 맛있다고 하자 주모가 밥을 가져다준다
ⓒ 맛객
어렸을 적에는 젓가락으로 무를 찔러 왼손엔 무 오른손에 수저 이런 식으로 밥을 먹었다. 무김치가 맛있다며 탄복하는 맛객을 본 주모가 밥 한 공기를 내온다. 그렇지! 아무래도 무김치는 뜨거운 밥과 함께 먹어야 제 맛이다.

세상 사람 누구나 맛있다고 말하는 음식이 있다. 그것들은 진미이고 별미이기도 하다. 음식기행이라고 해서 그런 맛만을 찾는 건 아니다. 화려한 음식은 아니어도 자기만의 맛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게 음식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행복 아니겠는가. 음식기행의 참맛을 만끽하고 있는 이 순간처럼.

이렇게 해서 우리가 먹었던 값은 막걸리 두통 값인 4천원뿐이다. 만원을 드리고 잔돈은 받지 않았다. 다음에 가게 된다면 안주라도 하나 주문해야 덜 미안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2.22~3.7 까지 음식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업소 정보는 http://blog.daum.net/cartoonist/9827080 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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