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대표팀을 이끄는 파울루 벤투 감독

축구 대표팀을 이끄는 파울루 벤투 감독 ⓒ 대한축구협회

 
포르투갈 출신의 파울루 벤투 감독은 최근 한국 축구대표팀 역대 최장수 사령탑에 등극했다. 그는 2018년 8월 22일, 러시아월드컵을 이끌었던 신태용 감독의 후임으로 한국축구 역대 73번째 대표팀 사령탑에 올랐고 2일 현재 부임 1016일째를 맞이했다.

독일 출신의 울리 슈틸리케 전 감독(2014-2017, 총 995일)이 세운 기록을 넘어서 벤투 감독은 단일 재임 기간으로는 가장 오래 태극호를 지켜온 선장이 됐다. 다만 역대 최장기간 재임 기록은 총 세 번에 걸쳐 대표팀 사령탑을 역임한 국내파 허정무 감독이 기록한 4년 6개월이다.

대표팀 감독은 영광과 부담이 교차하는 자리다. 벤투 감독이 취임하기 이전까지 최근 10년 동안만 봐도 한국축구 대표팀 사령탑은 무려 10명이나 바뀌었고, 감독들의 평균 임기는 약 1년6개월에 불과했다. 변수도 고비도 많은 대표팀에서 흔들림 없이 장수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벤투 감독의 기록경신과 장기집권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각은 다소 미묘하다. 일단 표면적인 성적은 나쁘지 않다. A매치 28경기에서 16승 8무 4패, 승률 57%를 기록하고 있다. 2019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에서는 전승으로 우승했고, 2022 카타르 월드컵 2차 예선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한국은 H조 선두(2승 1무)에 올라있어서 최종예선 진출이 유력한 상황이다.

그러나 내실은 그리 좋지 못했다. 59년 만의 우승 도전이었던 2019년 아시안컵에서는 부진한 경기력 끝에 카타르(우승팀)에 패하여 8강에서 탈락했다. 안방에서는 강했지만 원정에서는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이며 강팀과 약팀을 가리지 않고 그리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올해 3월 한·일전에서 0-3으로 참패를 당하며 여론이 싸늘해졌다.

한편으로 벤투호의 장수 이면에는 이전의 대표팀에는 없었던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특수한 변수가 있다. 벤투호는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의 여파로 지난 2020년부터 올해까지 A매치를 단 3경기밖에 치르지 못했다. 예년처럼 대표팀 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쯤 최종예선을 거쳐 월드컵 본선행의 운명이 판가름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 각국들의 방역 문제로 인하여 월드컵 예선일정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아직 2차예선도 마무리 짓지 못한 상황이다. 벤투 감독도 정상적으로 선수들을 점검하고 대표팀의 전력을 다지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일각에서는 벤투 감독에게 코로나19가 오히려 행운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동안 A매치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벤투호가 평가받을 기회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재임기간만 늘어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벤투호는 코로나19가 터지기 전부터 2차예선 통과조차 낙관하기 어려울만큼 불안정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설사 최종예선에 올랐다고 해도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한국은 북한의 월드컵 불참으로 북한전 경기결과들이 모두 삭제되며 가만히 앉아서 조 2위에서 1위로 올라서는 행운도 따랐다.

벤투 감독의 전임자이자 종전 최장수 사령탑이었던 슈틸리케 감독은 승률에서도 27승 5무 7패 69.2%로 역대 최고였다. 하지만 주로 약팀들을 상대했던 2차예선까지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으나 최종예선에서의 급격한 부진으로 끝내 중도에 낙마했고 신태용 감독이 대타로 투입되고 나서 간신히 본선행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냉정히 말해 벤투호는 코로나19라는 변수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승률이나 경기력, 비전 모두 한국축구의 흑역사로 평가받는 슈틸리케호보다도 크게 나을 것이 없다.

만일 월드컵 예선에서 최근 진행된 한일전과 같은 경기력과 결과를 보여줬다면 과연 벤투 감독을 향한 여론이 비판 정도로만 끝났을까. 한일전 패배에 두고 벤투 감독을 향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진 데는, 어쩌면 '미리보는 최종예선'의 예방주사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중요한 화두는 과연 벤투 감독이 추구하는 축구와 한국축구가 나아가야할 방향성이 서로 일치하는가라는 의구심이다. 성공한 역대 대표팀 감독들은 모두 저마다의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신화와 함께 선진적인 대표팀 운영시스템의 정착, 강한 체력과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압박축구라는 스타일을 완성했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월드컵 본선에서 최초의 원정 승리를 달성했고, 고 핌 베어벡 감독은 대표팀에서 히딩크나 아드보카트도 실패했던 현대적인 포백 수비 시스템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파인 허정무 감독은 사상 최초의 원정 16강을 비롯하여 박지성-이영표-기성용 등 2000년대 이후 한국축구를 이끌어가게 될 수많은 선수들을 직접 발굴해냈다는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벤투 감독은 벌써 3년이 흘렀는데도 자신만의 업적이라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다. 벤투 감독이 강조하는 빌드업 축구는 그만의 전술이라기보다는 점유율과 패스를 강조하는 현대축구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인데다, 정작 세밀한 부분전술과 유연성의 부족으로 완성도에 물음표가 붙고 있다. 어느 팀을 만나도 비슷한 전술만 고집하느라 상대에 따른 대응력이 취약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설픈 빌드업에 대한 의존으로 스피드-활동량-투쟁심 등으로 요약되던 한국축구 본연의 장점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내부 경쟁 체제의 약화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부임 초기 이후로는 자신의 눈에 든 기존 선수들과 해외파 위주로 소수정예화된 대표팀 운영을 고집하고 있다. 젊은 선수나 새 얼굴을 뽑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실전에서 과감하게 기용하는데 인색하며 구색맞추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홍철-김영권-남태희같이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소속팀의 반대에도 그저 자신이 선호하는 선수들만 고집하는 것이나, 선수차출 문제를 둘러싼 올림픽대표팀과의 신경전에서 보듯, 대표팀 감독으로서 필수적인 주변과의 소통능력에 대한 의문부호가 크다.

이제는 변해야한다. 벤투 감독이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않는 한 그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더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축구가 많은 비용과 대가를 감수하며 벤투 감독을 데려온 것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한 것이지, 벤투 감독 개인의 커리어나 축구철학을 증명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안팎으로 위기에 몰려있는 벤투호에는 분위기 반전이 절실하다. 축구대표팀은 오는 5일 고양 종합운동장에서 투르크메니스탄전을 시작으로, 9일 스리랑카, 15일 레바논을 상대로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잔여일정을 한꺼번에 소화한다.

벤투호는 지난 한일전에 합류하지 못했던 손흥민-황의조같은 주력 유럽파들은 물론이고 원두재같은 올림픽팀 멤버까지 차출하며 최상의 전력을 구축했다. 상대가 약팀이고 홈경기이니만큼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지만 만에 하나 여기서도 경기내용이 좋지 못하다면 벤투 감독을 향한 여론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승리는 기본이고 팬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비전과 과정을 보여줘야할 필요가 있다.

한국축구는 1986년 이후 월드컵이 열리는 4년 주기를 기준으로 단 한 번도 사령탑 교체 없이 월드컵 예선과 본선을 완주한 경우가 아직 없다. 벤투 감독이 기왕이면 그저 무늬만 최장수 감독이 아니라, 실력으로 살아남아 월드컵 본선까지 완주하는 최초의 감독으로 남을 수 있기를 팬들은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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