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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기 가려고 아침 8시부터 출근하고 왔어. 이번 주 알바 하느라 너무 힘들었다니까. 요즘 진짜 휴식이 필요했어."

올해 스무 살이 된 나는 6년지기 중학교 친구와 함께 지난 25일부터 3일간 신안 도초도에 다녀왔다. 빵집 겸 카페에서 주 5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 친구는 목포여객터미널을 향해 달리고 있는 차 안에서 그동안의 고생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2박 3일간의 여행을 위해 알바 시간을 어렵게 조정했다고 한다.

알바를 마치고 곧바로 차에 몸을 실은 친구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우리는 광주에서 목포까지 자동차로 50분여를 달려, 겨우 10분 전 목포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표를 끊기 바쁘게 간신히 배에 올라타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한숨을 돌렸다.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흐르니 도초도에 도착했다.

도초도는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54.5km에 자리한 신안의 섬으로, 다도해해상국립공원과 유네스코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가 도초도를 방문한 이유는 섬마을인생학교에서 주최하는 '섬에서 숨, 쉼'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신안 도초도에 위치한 시목해변은 일반적인 서해와 달리 연한 하늘색 빛깔을 띤다. 인적이 드물어 조용하고, 덕분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 시목해변 신안 도초도에 위치한 시목해변은 일반적인 서해와 달리 연한 하늘색 빛깔을 띤다. 인적이 드물어 조용하고, 덕분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 송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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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인생학교는 신안군(군수 박우량)이 만들고, 사단법인 꿈틀리(이사장 오연호)가 위탁 운영하는 학교다. 성인 및 가족 단위를 대상으로 자연에서 쉬어가며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행복 에너지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2019년에 설립됐다. 세 팀의 참가자들로 이루어진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도초도와 비금도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배에서 내려 만난 참여자들 대부분은 부모님 세대로 보이는 어른들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또래는 없었다. '어렵게 시간 내어 왔건만 이게 뭐람.' 부푼 기대는 사라지고 왠지 모를 걱정만 앞섰다.

언론인, 대학교 총장, 대학교수, 신부님, 전 교육장, 지역 활동가... 지식인들의 자기소개를 듣고는 내심 놀라 순간 우리는 동시에 눈이 마주쳤고, 또 한 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잠시 숙연해졌다. 하지만 그러한 걱정은 얼마 안 가 서서히 사라졌다. 시목 해변을 함께 걸으며 자연스레 우리는 어른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목해변에서 자연과 교감을
 
섬마을인생학교 참여자들이 시목해변에서 아침 스트레칭 겸 명상을 하고 있다.
▲ 시목해변에서 아침 스트레칭 섬마을인생학교 참여자들이 시목해변에서 아침 스트레칭 겸 명상을 하고 있다.
ⓒ 김현석 섬마을인생학교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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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인생학교 숙소에서 3분 거리에 위치한 시목해변은 도초도에 머무르는 동안 가장 많이 찾은 곳이다. 인적이 드물어 조용했고, 덕분에 고즈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곳 도초도의 바다는 일반적인 서해와 달리 연한 하늘색 빛깔을 띠었다. 해변을 따라 걷는 동안 물결의 일렁임과 잔잔한 파도 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살살 어루만져주었다. 이 때문인지 금세 마음이 편안해져 이곳의 감성에 온전히 젖어 들었다. 

시목해변을 걷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작은 게들의 활동이었다. 게들이 구멍 주변으로 모래를 뭉쳐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흔적들이 모래사장 위로 수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매일 바삐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모습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목해변에서 주운 조개껍질은 색깔과 모양, 크기가 제각각이지만 모두 저마다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 다채로운 색깔의 조개껍질 시목해변에서 주운 조개껍질은 색깔과 모양, 크기가 제각각이지만 모두 저마다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 이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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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속에 슬그머니 박혀 있는 조개껍질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처음 하나를 발견하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워보니, 어느새 여러 개가 됐다. 수집한 조개껍질들은 각각의 색을 뽐내고 있었다. 색깔과 모양,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저마다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친구는 많이 주워 담으려고 하면 할수록 손에서 떨어지는 조개껍질을 보고, 너무 욕심을 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연이 알려준 가르침이 아닐까.

"여기가 무릉도원 아니야?"
 
해송 숲길에서 만난 토끼풀로 반지와 팔찌를 만들었다. 평소에는 사소해 보이던 작은 식물도 여기에서는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토끼풀 반지와 팔찌 해송 숲길에서 만난 토끼풀로 반지와 팔찌를 만들었다. 평소에는 사소해 보이던 작은 식물도 여기에서는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송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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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목해변 주변에는 15분 정도 걸을 수 있는 해송 숲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해송을 비롯하여 각종 염생 식물과 산딸기, 아카시아, 토끼풀 등 도시에서 접하기 어려운 식물들이 반기고 있었다. 초록의 색과 향기는 온몸에 맑은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파도 소리가 더해지니 그 기운은 배가 됐다.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인가 싶었다.

같은 팀원이었던 한 선생님께서는 어릴 적 자연과 어울려 놀았던 얘기를 해주시면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아카시아 잎을 따는 놀이를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또 토끼풀로 반지와 팔찌를 만들어 우리 손에 묶어주셨다. 제법 신이 났다. 내 속에 감춰 있던 어린아이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 시간이었다. 평소에는 사소해 보이던 작은 생물도 여기에서는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에서 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여기에서는 어떤 식으로 찍든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다.
▲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에서 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여기에서는 어떤 식으로 찍든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다.
ⓒ 이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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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초도 발매리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두 채의 초가집이 보인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집필 과정을 그린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이다. 초가집 너머로 보이는 다도해와 우이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바다라는 그림에 초가집이라는 액자가 더해져 더욱 아름다운 완성작을 전시해 놓은 느낌이었다. 여기에서는 어떤 식으로 찍든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다.

비금도에 위치한 명사십리 해변은 그저 바라만 봐도 속이 뻥 뚫린다. 날은 더웠지만, 마음만큼은 시원했다. 잔잔한 시목해변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4km의 단단한 모래사장 위를 차로 달리니, 마치 외국 영화에서 주인공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는 장면 같았다. 끝없는 모래사장 위에서 머릿속 잡념들은 거친 파도와 함께 씻겨나가는 듯했다.

자연과 함께 '쉬었다 가도 괜찮아'
 
섬마을인생학교 참여자들이 시목 해변에서 떠오르는 달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
▲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 섬마을인생학교 참여자들이 시목 해변에서 떠오르는 달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
ⓒ 이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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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별이 반짝이던 마지막 날 밤, 참여자들 모두가 시목 해변에 둥글게 모여 앉아 다 같이 노래를 불렀다. 파도와 함께 들리는 기타 반주와 노랫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밤하늘 아래 장관을 이뤘다. 인생을 노래하고 꿈꾸는 이 순간이 너무나 이상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소중했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행복들을 그동안 무심히 지나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박 3일 동안 사람들을 만나며 얻은 배움도 컸다. 언론인, 대학교 총장, 대학교수, 신부님, 카페 사장, 지역 활동가 등 각계각층의 어른들을 만나 친해졌다. 밖에서는 말 한번 쉽게 걸어보기 힘든 대상이었을 테지만, 여기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서로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잘 상상되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친절하게 다가와주신 어른들 덕분에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잘 어울렸고 같이 사진도 찍었다. 섬마을인생학교의 직책을 노리시는(?) 두 분의 유머 덕에 다 같이 한바탕 웃기도 했다. 단순히 보고 즐기기만 한 여행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사람들로부터 많이 배우고 얻어간 것 같다. 어른들도 젊은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어 좋았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이 특별했던 이유는,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내게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치열했던 입시 전쟁과 계속되는 코로나19로 인해, 최근 몇 년간 어디를 놀러 가서 제대로 휴식을 취해본 기억이 없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 여유롭게 본 바다와 따사로운 햇살, 꽃들의 살랑임, 맛있는 음식 그리고 함께한 이들의 따뜻함이 내게 진한 온기를 전해 주었다.

친구와 나는 여행 중 때때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서로에게 "괜찮다"라고 말해줬다. 한 번은 우리가 팀원들과 모이는 시간에 조금 늦기도 했는데, "에이, 여기서는 지각해도 괜찮아"라며 우리끼리 몰래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섬마을인생학교에서만 맛볼 수 있는 꽃피자다. '맛'과 '멋'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 꽃피자 섬마을인생학교에서만 맛볼 수 있는 꽃피자다. "맛"과 "멋"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 송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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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했던 내가, 실수를 두려워하던 내가, 쳇바퀴 같은 굴레 안에서 뛰어가기만 하던 내가 이번 여행 덕분에 스스로 진정한 쉼을 허락할 수 있었다. 친구도 알바라는 짐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생기를 되찾았고, 주말마다 여행을 자주 다녀야겠다고 했다. 잠깐 쉬어감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된다는 것.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이다. 각박한 삶 속에서 힘들고 지칠 때면 또다시 섬마을인생학교를 찾게 될 것 같다.

'쉬었다 가도 괜찮아. 다른 길로 가도 괜찮아.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섬마을인생학교의 철학이 새삼 울림 있게 다가온다.

태그:#섬마을인생학교, #전남 신안, #도초도, #신안 도초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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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학교에 재학중인 대학생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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