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31 11:30최종 업데이트 21.07.3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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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생인 고종 임금은 서른 살 되던 말띠 해에 가슴이 덜컥 하는 일을 경험했다. 1882년 이맘때인 그해 7월 23일(음력 6월 9일)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복귀하는 바람에 그는 1개월간이나 왕권을 정지당했다. 시아버지와 갈등을 빚던 민씨 왕후(훗날의 명성황후)는 궁 밖으로 도주했고, 대원군은 시신도 없는 며느리의 국상을 선포했다.

군란을 일으킨 한양 주민들과 군인들이 대원군을 추대한 것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 고종은 이 위기에서 탈출하고자 청나라 군대를 은밀히 불러들였고, 이에 힘입어 가까스로 권력을 회복했다.

그는 다음번 말띠 해인 갑오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발생한 고부민란이 동학혁명으로 발전하면서 농업지대 중심지인 전라도 전주가 혁명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이변이 벌어졌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그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지만, 불청객인 일본 군대가 함께 들어와 그의 요구에 부응했다.
  

고종 초상화. ⓒ 퍼블릭도메인

 
말띠 해의 저주

말띠 해는 두 번씩이나 그에게 민중의 도전이라는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그에게 위기가 됐다. 자기 힘으로 민중의 도전에 대처할 수 없었던 그는 그때마다 '외국 동업자'들의 힘에 의존했고, 이로 인해 외국의 내정간섭에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말띠 해부터는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두 번째 말띠 해부터는 일본의 내정간섭을 받게 됐다.


그런 내정간섭 기간에 그가 맞닥트린 악몽 같은 외국 간섭자가 하나 있었다. 청나라의 두 번째 조선 현지 책임자인 원세개(위안스카이)가 바로 그다. 고종을 지켜주겠다며 청나라가 파견한 원세개로 인해 고종은 강도 높은 간섭에 시달렸다. 고종은 그로 인해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했다.

고종은 원세개를 의식하면서 30대와 40대 초반을 보냈다. 그에게 원세개는 단순히 경쟁자나 라이벌 같은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두렵고도 지긋지긋한 동반자였다. 혐오스러워서 내쫓아버리고 싶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고종과 원세개 사이에 존재했다.

황하(황허) 이남의 하남성(허난성) 출신인 원세개는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의 자제였다. 그는 고종보다 7년 뒤인 1859년에 태어났다. 처음에 그가 꿈꾼 것은 과거시험을 통한 관직 진출이었다. 그래서 열일곱 살 때인 1876년에 하남성 향시에 응시했다. 하지만 이 지방 시험에서 낙방했고, 1879년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원세개가 조선에 등장해 중요 임무를 수행한 것은 1882년이다. 임오군란 때 들어온 청나라 군대에 그도 섞여 있었다. 그는 대원군을 체포해 자국으로 압송하고 왕십리에 사는 시민군 주역들을 진압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해, 청나라군은 물론이고 조선 정부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왕권을 회복했고 왕후도 궁으로 돌아갔다.

이런 상황은 원세개와 고종의 만남을 가능케 했다. 왕후의 환궁이 이뤄진 뒤부터 만남이 잦아지면서, 고종이 조선군 훈련을 위해 원세개에게 요청을 하는 일도 생기게 됐다.

3년 전인 1879년만 해도 원세개는 낙방생이었다. 명문가의 일원이었으므로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지만, 만 20세 때의 그는 이웃나라의 27세 된 군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가 정치권력을 지향하지 않았다면 이런 비교를 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가 지향했던 권력 세계에서 그와 고종의 차이는 땅과 하늘의 차이 같았다.

당시의 고종은 상당히 활력적인 군주였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친정체제를 구축해둔 그는 아버지와 정반대로 적극적인 대외개방을 추진했다. 청나라와 일본은 물론이고 서양열강들까지 끌어들여 상호 견제시키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겠다는, 상당히 대담한 발상의 소유자였다. 그런 개방정책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은 그는 이웃나라 청년 원세개가 근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순식간에, 부탁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향시에 낙방하고 실망했었을 1879년과 비교하면, 원세개 입장에서는 상전벽해 같은 변화였을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리훙장)의 신임을 받는 오장경(우창칭)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원세개 집안과 막역했던 오장경이 원세개를 막료(幕僚)로 받아들인 뒤 1882년에 조선에 함께 온 것이 원세개와 고종의 만남을 가능케 했다.

청나라 때 특히 많았던 막료는 일종의 개인 보좌관이었다. 막빈(幕賓) 혹은 막객(幕客)으로도 불린 이들은 장군이나 고급 관료의 공적 사무를 보조했지만, '빈'이나 '객'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정식 관료는 아니었다. 그래서 고용주에게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고 그로부터 급료를 받았다.

이런 개인 보좌관이 많았던 것은 만주족인 청나라 지배층이 중국어(한어)와 중국문화에 익숙지 않아 한족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데다가, 이 시대에 지방관들의 권한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막료 제도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것이 향시 낙방생 원세개가 오장경의 개인 보좌관이 되고 조선에서 뜻밖의 명성을 얻는 데 기여했다.
  

위안스카이(원세개) ⓒ 위키커먼스

 
발톱 드러낸 위안스카이

원세개가 조선에 첫 발을 디딜 당시만 해도 그와 고종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고종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대원군을 체포해 청나라로 압송하고 시민군 주역들을 진압한 일은 고종이 왕권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이때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에 갈등 관계 같은 게 생겨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고종을 도우러 온 청나라군이 내정간섭 군대로 돌변하고 원세개가 김옥균의 반(反)청나라 친위 쿠데타인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하면서부터 두 사람 관계는 본격적으로 변모했다. 갑신정변 뒤에 청나라로 돌아갔다가 대원군을 귀국시킨 그는 본국 정부로부터 주찰조선교섭통상사의(駐札朝鮮交涉通商事宜)라는 지위를 부여받았다. 조선 현지의 최고 책임자가 된 것이다.

주찰조선교섭통상사의는 형식상으로는 조선주재 대사 같은 것이었지만, 원세개는 이 직책을 조선총독 비슷하게 활용했다. 그는 이 직책과 본국의 영향력을 활용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을 고종에게 안겼다. 고종이 조선 주상인지 그가 조선 주상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고종 입장에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왕권을 억압당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원세개는 조선을 중국의 식민지쯤으로 생각했다. 그는 청나라의 영향력 하에 묶어놓고자 조선의 독자적인 경제발전을 훼방했다. 조선의 전기·우편 사업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 외국차관을 받는 일도 방해했다. 조선 경제를 청나라에 예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외교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조선이 구미 열강에 외교관을 파견하는 일도 저지하곤 했다. 사사건건 조선의 발목을 잡는 게 그의 임무처럼 보일 정도였다.

거기다가 고종을 불쾌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고종을 알현할 때 허리를 굽혀 세 번 절하는 삼국궁(三鞠窮)의 예를 표해야 했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고종을 대등한 사람처럼 대했다. 이를 보다 못한 각국 외교관들이 항의를 제기했지만, 원세개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원세개는 심지어 고종 폐위까지 추진했다. 고종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미국에 도움을 구했지만 미국이 외면하자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1884년에 러시아와 국교를 체결해 국제사회를 놀라게 한 고종은 청나라의 견제 속에서도 러시아와 비밀리에 접촉했다.

1886년에 이런 움직임을 포착한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고종을 폐위시키고 조카 이준용을 추대한 뒤 대원군이 섭정을 하도록 한 다음에 조선을 합병하자'는 건의를 제출했다. 훗날 이토 히로부미가 했던 일이 원세개가 먼저 하고자 했던 것이다.

건의를 받은 이홍장은 처음에는 마음이 동했다. 그래서 파병을 준비하다가 결국 중단했다. 국제사회의 반발이 예상되는 데다가 대원군 세력이 미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원세개가 고종을 억압하고 고종이 지지 않으려 꿈틀대는 구도는 1894년까지 이어졌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틈을 타서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와 청일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일본군을 두려워한 원세개는 본국으로 신속히 도주했다. 그와 고종 사이의 긴장관계가 너무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때 원세개는 35세, 고종은 42세였다. 처음에는 좋은 인연으로 출발했다가 악연이 되고 만 둘의 관계는 이렇게 12년 만에 갑자기 종결되고 말았다.

외세에 의존했던 왕이 불러온 참사

원세개가 증발했지만 고종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청나라에 이어 일본의 내정간섭에 직면해야 했다. 일본의 도움으로 동학군을 진압하고 왕권을 유지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열강들을 끌어들여 상호 견제시키면 조선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외국열강 끌어들이기는 이처럼 그에게 시련만 안겨줬다.

한편, 조선에서 종적을 감춘 원세개는 청나라에 돌아간 뒤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조선에서 획득한 명성과 지위를 발판으로 군대 양성에 주력한 그는 개혁세력과 보수세력 양쪽에 줄을 대며 영향력을 확장하다가 42세 때인 1901년에 이홍장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그런 뒤 1911년 신해혁명 때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혁명세력을 도와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폐위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힘입어 1912년에 중화민국 임시총통이 되고 대총통이 됐다. 그 여세를 몰아 1916년에는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반발이 거세서 3개월 만에 황제 지위를 포기했다. 그러고 나서 3개월 뒤인 1916년 6월 6일, 57세 나이에 요독증으로 급사했다.

평생을 살아도 고종과 조우하기 힘들었을 원세개가 고종의 간섭자 혹은 대결자로 등장하고 이때 축적한 기반으로 훗날 중화민국 황제까지 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고종의 정권 유지책이 있다. 고종은 변고가 생길 때마다 외국 군대에 손을 내밀었고, 이는 원세개라는 반갑지 않은 존재가 외국 군대에 섞여 들어오는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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