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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장제스에게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선에 나설 것을 요구

미국은 2차 대전 당시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를 통해 일본군과 싸우는 장제스 군대를 지원하였다. 국무부와 국방부는 고문단을 보내고 차관을 제공하였다.

그 당시 미국과 소련은 연합군에 속했기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장제스에게 중국공산당과 연립정부를 꾸려 항일전쟁에 나설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미국 고문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장제스 정부는 미국의 재정지원으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미국이 이를 비판하면 장제스는 "미국이 재정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단독으로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겠다"고 협박하였다. 또한 이 보고에 따르면 장제스 군대는 무능하고 인민들에게 인심을 잃은 반면 공산당은 항일투쟁에 헌신적이라서 인민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장제스의 독재와 무능 및 독단으로 인해 미국이 중국 개입 중단

1927년 상하이 학살 등 장제스가 좌익과 민주인사들을 수차례 탄압하자, 미국의 여론이 악화되었다. 또한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만 요구할 뿐 중국에 파견나온 미국 고문관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그 결과 미국의 고문관들은 장제스와 충돌하면서 대부분 사임하거나 해고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한 직후 미소협력 분위기를 고려하여 장제스에게 공산당과 화해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상은 결렬되고 장제스 군대가 공산당을 공격하였다.

결국 장제스의 무능, 부패, 독단에 질린 미국은 "우리가 지원을 해도 장제스는 마오쩌둥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더 이상 장제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미군이 중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직접 개입한다고 해도 강력한 공산당 군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으며, 여전히 협력관계에 있었던 소련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냉전 이후 두개의 전쟁을 할 수 없어 중국 내전 불개입

1946년 그리스 내전, 1948년 베를린 봉쇄로 인해 미소가 대립관계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냉전이 시작된 이후에도 미국은 전쟁에 지친 미국 여론 때문에 중국 내전에 직접 개입할 수 없었다.

특히 미국이 중국 군대와 전쟁을 할 경우 소련이 그 틈을 노려 서유럽까지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미국으로선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아시아와 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을 할 수 없었다.

장제스는 대만으로 도망가면서도 수많은 좌익인사와 민주인사들을 학살하였다. 미국은 대만해협을 봉쇄하고 공산당으로부터 "대만의 장제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대만을 중국봉쇄의 정치경제적 '쇼윈도' 기지로 만들어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주한 후 냉전은 격화되고 한국전에 중국군이 참전함에 따라 미국은 중국과 적대국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생하자마자 미국은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보내 중국공산당을 압박하였다. 이후에도 미국은 군사적 가치가 높아진 대만을 대중봉쇄의 전초기지로 활용하였다.
 
 대만 해협을 담당하는 미국의 제7함대가 태평양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 중이다.
▲ 제7함대  대만 해협을 담당하는 미국의 제7함대가 태평양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 중이다.
ⓒ 제7함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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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국은 한국 및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권에게 미국식 민주주의와 삶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쇼윈도' 정책을 적용하였다. 미국은 한국에서 독재정부를 지지한 것처럼 대만에서 장제스의 독재를 지지하였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 조셉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상원의원은 의회에서 "국무부에 공산주의자와 소련의 간첩이 많기 때문에 국무부가 잘못된 정책을 입안하고 중국의 공산화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빨갱이 명부를 공개하겠다"고 요구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걸친 '빨갱이 사냥'이 국무부부터 시작되었다.

소련과 대만 양측에 포위당한 중국에 유화정책 도입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의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하자, 중국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를 자처하면서 흐루쇼프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미국은 소련의 힘을 분산시키는 중국의 위상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이 1958년부터 추진한 대약진운동에 실패하여 혼란에 빠지자, 대만은 중국을 상대로 통일전쟁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미국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1964년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윌리엄 풀브라이트(James William Fulbright)는 '구신화와 신현실(Old Myths and New Realities)'라는 연설을 통해 "중국의 대표 자격을 대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 역시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점차 서방에 접근하여 1964년에 프랑스와 수교하였다.

수정주의 논쟁과 중소분쟁 이후 소련 견제 위해 중국에 접근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50여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베트남에 인접한 중국과 긴장상태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한국전쟁과 달리 "미군이 중국 영토로 넘어오지 않는 한 미군과 전쟁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유화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그 당시 중국은 소련과 대치중이었으므로 미국과 대결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미국 역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베트남 전쟁 이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고려할 때였다. 대통령선거를 준비 중이던 닉슨은 1967년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에 기고한 '베트남 전 이후의 아세아'에서 중국을 고립시키는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러던 차에 중소 간 국경분쟁이 발생하였다. 1969년 8월 헬리콥터와 장갑차를 동원한 전투가 있은 후 소련은 중국에 대한 전면전을 고려하였다. 소련은 중국이 더 커지기 전에 중국의 핵미사일 기지를 공격하고 나아가 북경에 대한 핵 공격까지 고려하였다.

중국과 핵전쟁하려는 소련에 경고하고 중국과 수교 논의

당시 중국의 핵미사일은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없었다. 소련은 분쟁 지역이 아닌 전체 중소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중국은 핵전쟁에 대비하여 방공호를 건설하고 10월에는 제1호 비상명령을 내리고 베이징의 지도부를 전국에 흩어지게 하였다.

소련은 베이징을 굴복시키기 위해 전면전을 구상하면서 미국의 의향을 떠 보았다. 하지만 엘리엇 리처드슨 국무차관 등은 "소련이 중국과 전면전을 할 경우 미국은 중립을 취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였다.

미국의 경고로 소련은 전면전을 포기하고 중국과 협상에 나섰다. 나아가 196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한 후 중소분쟁을 서둘러 마무리하였다.

중미, 가까운 적들을 견제하기 위해 먼 적과 화해

중국은 1962년 인도와 국경분쟁을 겪은 후 파키스탄과 동맹을 맺고 인도를 견제해왔다. 중국은 같은 방식으로 미국과 수교함으로써 국경분쟁을 겪은 소련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중소분쟁이 끝난 직후 미중 양국의 관계개선을 위한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양국은 비밀협상을 본격화하였다.

1970년 10월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이 의회 청문회에서 "미국의 중국정책이 변할 것"이라고 밝혔다. 1971년 4월 미국 탁구선수단과 기자가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7월에는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하였다. 10월에는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함께 상호불가침과 평등호혜 등 5가지 원칙을 담은 '상하이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뒤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태그:#국공내전, #장제스, #상하이 공동선언, #핑퐁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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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12년간 기관지위원회와 정책연구소에서 일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연방제 통일과 새로운 공화국』,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 마르크스의 실천과 이론』 등의 저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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