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 위도우 > 중

< 블랙 위도우 > 중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어벤져스:엔드 게임>(2019)의 크레딧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6명의 어벤져스 원년 멤버인 '오리지널 6'의 모습이다. 그중 '블랙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 분)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억만장자와 영웅, 신들이 갈등을 거듭할 때도 침착한 표정으로 중심을 잡는 어른이었다. 그는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약하지만 강했다.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2018)에서 동료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캡틴 아메리카, 팔콘과 함께 등장한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남자들 뒤치다꺼리는 늘 내 몫이라니까."
- <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2015) 중 


나타샤는 <아이언맨 2>를 시작으로 9년 동안 6편의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다. 러시아 KGB 출신의 스파이였고, 쉴드(Shield)의 표적 중 하나였지만 '호크 아이' 클린트 바튼(제레미 레너 분)의 손을 잡고 어벤져스가 되었다. 그러나 '부다페스트 사건'이 무엇인지, 나타냐가 어떤 사람인지 상세하게 설명되었던 적은 없다. 심지어 <어벤져스 : 엔드 게임>(2019)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은 이후까지도, 그의 서사는 유독 빈약했다.

그리고 지난 7월 7일, 첫 솔로 영화 <블랙위도우>가 베일을 벗었다.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 이후 2년 만의 MCU 영화다. 개봉 이후 2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뒀고, 국내에서는 2주도 되지 않아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면서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흥행 성적이다.

블랙위도우가 꿈꿨던 페미니즘 서사
 
 < 블랙 위도우 > 중

< 블랙 위도우 > 중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블랙위도우의 MCU 데뷔작인 <아이언맨 2>(2010)를 기억해보자. 토니 스타크를 비롯한 남성 캐릭터들은 그의 외모에서 눈을 떼지 못 한다. 결국 전형적인 '섹시 미녀 스파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스칼렛 요한슨은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아이언맨 2>의 촬영은 환상적이었지만, 블랙위도우가 과하게 성적대상화되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스칼렛 요한슨은 <블랙위도우>에 '책임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로 참여했다. 작품의 기획 방향성 자체를 지휘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말 구현하고 싶었던 나타샤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스칼렛 요한슨은 이 영화가 미투 운동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고 밝혔다. 착취를 겪은 여성들과 연대하겠다는 의도는 영화 전반에 묻어 있다. 이 영화의 주된 적대 세력인 '레드룸'은 어린 여성을 납치해 자궁을 적출하고, 정신을 세뇌한다. 이들의 모습은 현실에 존재하는 가스라이팅과 학대를 체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 이 지옥에서 탈출했던 나타샤는 자신과 비슷한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이제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해"라며 조용한 응원을 건넨다. 캐서린 쇼트랜드 감독이 이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영감을 받았다는 <로건>(2017)의 명대사와도 겹치는 장면이다. 나타샤가 의붓동생 옐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 분)와 공유하는 자매애가 다른 여성으로도 확장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가족 영화에 대한 꿈
 
 < 블랙 위도우 >는 가족 영화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다. 왼쪽에서부터 멜리나(레이첼 와이즈 분),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분), 옐레나(플로렌스 퓨 분)

< 블랙 위도우 >는 가족 영화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다. 왼쪽에서부터 멜리나(레이첼 와이즈 분),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분), 옐레나(플로렌스 퓨 분)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블랙 위도우>는 가족 영화에 대한 야망 역시 놓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캡틴 아메리카 : 시빌워>와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 사이에 펼쳐진다. 나타샤가 가족이라 믿는 '어벤져스'가 분열되어 있던 시절, 예전처럼 고독하게 지내고 있던 그가 잊고 있던 옛 가족 구성원들을 만난다. 

영화의 도입부, 조직의 임무 때문에 만들어진 '유사 가족'이 등장한다. 레드 가디언(데이비드 하버 분)과 멜리나(레이첼 와이즈)는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타샤와 옐레나에게 부모 노릇을 했다. 나타샤와 옐레나 자매는 유년기를 빼앗긴 채 어른이 된 아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가짜 가족에게 갖는 애증은 더욱 크다. 유쾌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옐레나가 "(그 가족이) 나에게는 진짜였어"라며 울먹일 정도다. 

MCU는 이미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시리즈를 통해 '혈연보다 중요한 감정적 유대'를 강조했던 바 있다. 피 한 방울 섞여 있지 않은 이들이지만, 다시 만난 이들이 투닥거리는 모습은 오래된 가족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레드 가디언은 더 이상 '슈퍼 솔져'가 아니라 권위를 잃어버린 구시대의 가부장일 뿐이다.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던 나타샤는 가짜 가족의 옛 추억에 웃음을 짓고, 어린 날의 서운한 감정을 배설하기도 한다. 이 영화를 접한 대부분의 관객은 나타샤가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왜 나타샤가 '핑거스냅' 이후 넋 나간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는지, 왜 그토록 외롭고 숭고한 희생을 선택했는지를 정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옳은 것과 재미있는 것은 다르다. 여성 서사가 담겨 있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블랙위도우>는 시대와 조응하는 메시지를 히어로 영화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아쉬운 지점은 있다. 영화 초반부 부다페스트를 중심으로 한 액션 시퀀스의 타격감은 높으나, 드라마에 신경을 쏟다보니 '블랙위도우'에게 기대할 수 있는 맨몸 액션의 비중이 줄었다. 최근 개봉한 마블 영화 중 가장 뒤쳐지는 악역 역시 아쉽다. '레드룸'의 수장인 드레이코프 장군은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의 알렉산더 피어스(로버트 레드포드 분)의 카리스마에 범접하지 못하고, 상대의 능력을 복사할 수 있는 '태스크마스터' 역시 이렇다 할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나 <블랙위도우>는 의미 있는 드라마를 완성했다. 플로렌스 퓨 특유의 통통 튀는 연기는 마블의 미래에 대한 기대도 만든다. <블랙위도우>는 나타샤로 상징되는 과거에 대한 헌사이자, 옐레나로 상징되는 미래에 대한 마중물이다. 십여 년간 마블이 이 영웅에게 충분한 대우를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성 역시 녹아 있다. 가장 아쉬운 것이 있다면, 너무 늦게 우리에게 왔다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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