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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할머니 잘 지내고 있지?

세상에 태어나서 할머니에게 쓰는 첫 편지를 돌아가신 지 20년 만에 쓰네. 참 빨리도 쓴다. 우리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가… 맨날 입버릇처럼 중얼거릴 줄만 알았지. 이런 편지 한 장 써볼 생각은 못 하고 있었네. 예전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참 무심하고 불효막심한 손자다. 그치?

나 결혼했어. 맨날 "우리 손자 장가가야 하는데, 왜 장가를 못 가고 있누" 그랬지. 장가도 가고 할머니 증손자도 낳았어. 가끔 생각한다. 할머니가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주변 사람들도 그러더라고, 할머니가 지금 모습을 보면 정말 기뻐하셨을 거라고.

할머니는 내 세상이었어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잖아. 할머니와는 추억이 많아도 너무 많다. 왜 그렇게 추억을 많이 남기고 간 거야. 잊지 못하게. 형제 없이 혼자 자라서 철없던 나도 새끼를 낳아보니까, 할머니 생각이 더 난다. 이렇게 힘든 육아를, 환갑이 넘은 나이로 맨날 울고 떼쓰던 나를 도대체 어떻게 감당한 거야?

할머니가 화낸 기억조차 없어. 아궁이에서 놀다가 부엌에 불을 내고, 차에 달려들어서 치일뻔했을 때도 화를 내는 다른 가족들을 막아서며 "우리 강아지, 안 다쳤으면 됐다"며 꼬옥 끌어 안아줬잖아.

3살 땐가, 4살 땐가 일 때문에 바쁜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한테 갔었지.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나는 참 많이도 울었고 할머니는 온갖 행동과 몸짓으로 달래려고 진땀을 뺏잖아. 나,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순간순간 떠오르는 선명한 장면들이 있어.

어렸을 때 생각하면 내가 참 할머니에게 많이 집착했던 것 같아. 코알라처럼 할머니만 따라다녔고, 혹시 어디로 사라져 버릴까 봐 잠잘 때는 할머니 손과 내 손을 끈으로 묶어놓고 잤지.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리던 기억도 나고, 할머니가 일 때문에 어디 갈 때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주저앉아 대성통곡한 것도 기억나. 할머니가 내 세상이었거든.
 
할머니와 함께 시골집에서 살던 시절, 고양이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할머니와 함께 시골집에서 살던 시절, 고양이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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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펑펑 오다가 잠시 갠 어느 날이었지. 지금도 기억나.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장아장 걸어가서 물이 잔뜩 불어난 냇가를 쳐다보고 있었어. 중심을 잃었던 것일까. 갑자기 뭐가 나를 감싸는 듯하더니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갔어. 뭐라도 잡아보려고 애썼지만 물이 나보다 더 힘이 셌어.

"할머니!" 난 목이 터져라 수호천사를 불렀고, 할머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에 뛰어들었잖아. 할머니도 수영 못 하는데… 다행히 지나가던 집배원 아저씨가 달려오셔서 둘 다 구해줬다고 들었어. 사실 그건 기억이 나지 않아. 할머니가 뛰어든 순간 살았다고 느꼈거든. 우리 할머니니까.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나를 상당히 편애했던 것 같아. 다른 손자 손녀들도 많은데 유독 내 잘못에만 관대하셨고, 먹을 것 하나라도 더 챙겨줬어.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랑 있다 보니 서러운 일도 되게 많이 겪었지만 그런 할머니가 있어서 크게 상처는 받지 않은 것 같아.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하면 힘이 많이 되는 것 알아? 여기저기서 차별받은 나쁜 기억들이 떠오르다가도, 나도 편애라는 것을 받아봤다는 사실이 그런 것들을 밀어내버려. 할머니에게 나는 가장 소중한 손자였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던 200만 원

언젠가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당시 경기도 분당 작은아버지 댁에 있던 할머니가 급하게 나를 보러 내려왔었지. 짧은 휴가 마지막 날이라 시간도 없었어. 터미널에서 나를 보고는 달려오려고 하는 할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어. 마음은 달려오고 싶은 것 같은데 한 걸음 한 걸음 되게 어렵게 걸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

가만히 계시라고 내가 간다고 달려갔을 때 할머니는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힘들어했었어. 그리고는 신문지로 돌돌 싼 현금 200만 원을 내 손에 꼭 쥐여줬지.

"우리 종수 결혼할 것 대비해서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언제 죽을지 몰라 미리 준다"고.

나중에 알았어. 할머니 심장의 절반이 멈춰있었고 병명은 심부전증이라는 것을. 그 몸으로 낡은 재봉틀을 가지고 분당 아파트에서 지내는 몇 년 동안 경로당 등지를 돌며 옷가지 등을 가져와 수선을 했다면서, 한 건당 몇 백원씩 받고. 그렇게 모은 돈 200만 원을 손자를 준다고 그 몸을 이끌고 왔었단 말이야.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뭐라 말을 못 하겠어.

할머니 병명과 돈의 출처를 알고 나서 머릿속이 하얘졌어. 우리 할머니를 떠나, 이 여자는 도대체 뭔가 싶었어. '이런 말도 안되는 사랑을 내가 받아도 되는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기도 했어. 나, 보통 내 또래들보다 사랑 많이 못 받았다고 생각했어. 한데,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이보다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나'싶어. 나 사랑 못 받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유난히 울음도 많았던 나를, 환갑이 넘은 할머니는 지극한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유난히 울음도 많았던 나를, 환갑이 넘은 할머니는 지극한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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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1년, 병원에서의 3개월

군 제대 후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셔와 나랑 함께 살게 해줬어. 할머니도 내가 제일 편하고, 나도 할머니가 제일 편했으니까. 아버지가 정말 잘한 선택 같아.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과 마지막 1년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어느 날, 할머니가 화장실에서 정신을 잃고 못 일어나던 순간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어. 병원에서 몇 달 못 사실 것 같다는 말을 했고 하늘이 빙빙 돌았어.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집착했던 그 순간처럼, 할머니는 내 세상이었던 것 같아. 미안해. 슬픈 것보다는 '나 어떻게 하지, 나 어떻게 살지?'가 먼저 떠올랐어. 배은망덕하고 이기적인 손자다.

3개월 동안 병간호하던 당시, 난 초반에 되게 걱정됐다. 누워있는 할머니 대소변 갈아 드려야 된다는 병원 측 말에 정말 난감했어. 근데 정말 신기하더라. 몇 번 하다 보니 금세 적응됐고, 무엇보다 냄새가 전혀 안 났어. 진심으로. 어쨌거나 미안해. 할머니는 내 대소변을 수없이 많이 갈아줬을 텐데 나는 처음부터 겁이나 먹고. 이래서 부모 사랑은 따라갈 수 없는 것인가 봐.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묘 대신 화장을 한 것은 지금 돌아봐도 잘한 선택 같아. 할머니가 나한테 한 마지막 부탁이었잖아. 장례식장에서는 나름 씩씩하게 굴었더니 "쟤는 슬프지도 않나 보다?"소리까지 들었어. 그랬었는데…

텅 빈 집에 혼자 들어오니 무너졌어. 슬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더라고. 몇 달을 울고, 몇 년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잊을만하면 꿈속에서 나오더라. 꿈속에서 할머니는 여전히 살아있었어. 정말 후회 많이 했다. 할머니한테 못한 것만 생각나고…

이젠 걱정하지 마. 아직도 내가 어른이 되려면 먼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은 아내도 만나고, 예쁜 새끼도 낳았어. 잠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을 키우면서 생각 참 많이 나더라. 나중에 크면 말해줄 거야. 이렇게 아빠를 사랑해주던,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너의 존재를 기뻐해 줄 증조할머니의 존재를.

열심히 잘살게. 나중에 나도 늙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그때 다시 보자. 그때는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해주고, 고맙다는 말도 실컷 하고 싶어. 더불어 당신이라는 여자가 준 끝도 없는 사랑이 손자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되었다는 것, 꼭 말해주고 싶다. 사랑해 할머니. 그리고 고마워.

태그:#큰사랑, #할머니, #할머니에게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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