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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찌는 듯한 더위는 멈출 줄을 모른다. 오늘은 시니어 클럽 가는 날이다. 시니어는 일주일에 세 번 나가고 한 달이면 열흘 나간다. 남편은 아침부터 일찍 나가자고 서두른다. 오늘 병원에 가는 날인데, 월요일은 사람이 많아서 접수를 빨리해야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날은 집에서 8시 30분쯤 나가면 9시가 조금 못 되어 여유 있게 시니어에 도착을 한다. 마치 출근하는 사람처럼 활기가 있어서 좋은 점이다. 집에서는 말이 없는 남편도 차를 타고 가면서 길거리 풍경을 보면 대화의 소재가 있어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간다. 

매번 똑같은 약속을 한다. 시니어 일 끝나고 만나는 시간 약속을 하면 시간을 잘 지킨다. 남편은 꼼꼼하고 틀림없는 성격이다. 남편이 컴퓨터나 다른 기계처럼 정확해 가끔은 힘들다. 다른 사람도 본인처럼 해야 하니까.

사무실에 들어가면 짝꿍 어르신은 언제나 나보다 일찍 와서 붓글씨를 쓰고 계신다. 팔십이 훨씬 넘은 분인데 참 부지런하고 성실하시다. 시니어에서는 우리 두 사람만 담당 선생님이 말하는 대로 우리의 일을 하면 된다. 사람들이 없어 조용하고 다른 일에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분은 붓글씨를  쓰고 나는 꽃 그림을 그리며 꽃밭에서 논다.

서로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자기의 일을 각자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불편한 일이 없다. 나는 항상 차를 준비해 가지고 가서 작업하는 동안 차를 우려 주면 좋아하신다. 사람은 보통 연세가 들면 자기 말을 많이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어르신은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신다. 나는 그 점이 참 좋다.

어르신은 텃밭을 하시며 가끔 상추도 가져다주고 호박도 준다. 나는 덕분에 싱싱한 야채를 얻어먹고 있다. 오늘은 옥수수 두 자루를 쪄가지고 와서 먹으라 내민다. 얼마나 주고 싶었을까, 따뜻한 마음을 알기에 "잘 먹을게요" 하면서 웃으며 말을 건넨다. 받으면서 겸연쩍어 한마디를 거든다. "어르신이 나 좋아하시나 봐요" 그러면 방긋이 웃기만 한다. 

나는 가끔가다가 어르신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 칭찬과 응원을 많이 해 준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춘다고 했다. 그분의 삶을 응원하고 덕담 한마디씩 해 드리면 환한의 미소를 짓는다. 사람마다 살아온 세월은 아프고 힘든 것이다. 나는 안다. 나도 노인이니까, 자식들은 엄마에게 살갑게 하기보다는 주의를 주면서 잔소리를 한다. 때론 그게 섭섭하다. 부모 자식도 존중과 공감이 있어야 한다. 

시니어 일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항상 남편은 차에서 기다린다. 그런데 병원에 갔다가 올 시간인데도 남편이 보이질 않는다. 전화를 해 보니 병원에 사람이 많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조카가 영업을 하는 가게에 가서 기다리는 말을 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날도 뜨겁고 가지고 다니는 가방이 제법 무겁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려면 도리가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나는 걸어서 조카가 운영하는 가게까지 10분쯤 걸어갔는데 가게 문이 닫혀 있다. 웬일인가 싶어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가게 앞을 서성거리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다시 하니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가는 장소에 따라 필통을 바꾸어 가지고 다닌다.
 가는 장소에 따라 필통을 바꾸어 가지고 다닌다.
ⓒ 이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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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단 났다. 지갑은 무거워 안 가지고 다니고 필통 속에는 딱 동전 1300원 들어있다. 필통도 바꾸어 가지고 왔다. 다른 필통에는 비상금이 만 원 이상은 들어있다. 버스를 타려 해도 200원이 모자란다. 그렇다고 버스를 타고 차비를 깎아 달라는 말은 못 할 것 같다. 이 더운 땡볕에 집까지 걸어가려면 1시간은 훨씬 더 걸린다.

봄이나 가을, 날이 선선할 때는 걸어갈 만하다. 그러나 양산도 받지 않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집까지 걸어가야 하다니, 나는 참 난감했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계속 오지 않는 조카를 기다릴 수도 없다. 걸어가는 데까지 걸어갈 테니 병원 진료 끝나면 전화하라는 말만 남편에게 남기고 걷기 시작한다. '운동도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걷는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힘들다고 하면 더 힘들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인다. 

여하튼 걸어보자. 다행히 모자는 썼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걸어가면서 사람 구경을 한다. 그 동네는 시장과 가까운 동네라서, 길거리에 파라솔 하나 펴 놓고 채소 장사하는 할머니가 보인다. 채소가 마를세라 덮어 놓고 얇은 천 하나 깔고 앉아 다리는 쭉 뻗고서 계신다. 이 더운 날 할머니는 누구를 위하여 이 고생을 하시나 생각하면서 걷는다. 왜 나이 드신 분들은 본인을 위하지 못하고 살까...

차를 타고 다닐 때와 다르게 눈으로 보고 풍경을 세밀하게 관찰을 하면서 걸으니 생각거리가 많아 좋다. 길은 걸어가는 나이 든 분들, 젊은 사람은 보이질 않는데 나이 든 분들만 걷는다. 걸음걸이도 제각각이다. 거의 허리를 펴고 반듯하게 걷는 분들이 드물다. 살아온 세월만큼 달라진 몸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 탓할 겨를도 없이 온몸으로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되도록 그늘을 찾아 걷는다. 가방이 무거워 책을 한 권 빼고 다른 손에 들고 무게를 분산한다. 하필이면 요즘은 팔목이 아파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치료 중인데 더는 아프지 말기를 염려하면서 걷는다.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다. 책에서 무언가 빠지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오늘 그리다 만 그림이 책 속에서 빠져나갔다. 놀라서 빨리 주워 가방 안에 담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휴지로 보이겠지만 나는 온 정성을 들여 몇 시간째 그린 그림이다. 남에게는 소중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는 소중할 수 있다. 화가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내가 그린 꽃 그림을 하나씩 완성하고 느끼는 나만의 만족감이 있다. 사람은 저마다 보물이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꾸어 가는 작은 것에 기뻐하면서 살아간다. 

걸으면서 땀이 흐르고 가방이 무거워 힘들다. 다시는 지갑을 놓고 다니지 말아야지, 마음에 새긴다.

길을 걷다가 보면 어는 담장에 피어 있는 작은 꽃이 방긋 웃으며 나를 보아 달라고 말을 거는 듯하다. '그래 한 두 송이 데리고 가 나하고 놀자, 차 마시면서'. 미안하지만 꽃을 꺾어 가방 안에 담는다. 등에 땀은 자꾸 흐르고 극기 훈련이 따로 없다. 예전에는 다 이렇게 걸어 다녔는데 지금은 차가 많고 편리함만 쫒고 살다 보니 불편하고 힘든 것은 참지를 못한다. 

1시간을 넘게 걸으니 우리 동네에서 멀지 않은 주공 아파트가 나온다. 몇 년 전에 입주한 아파트라서 길거리에 나무들은 그늘을 만들어 준다. 매미 소리를 들으며 걸으니 마음도 상쾌하다. 매미는 여름을 노래하듯 우렁차게 울어댄다.

그늘에는 나이 든 어르신들은 의자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쉬고 있다. 나도 나무 의자가 있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매미 소리에 넉을 놓고 듣고  잠시 쉰다. 매미 울음은 어떠면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낭만이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어김없이 철을 알고 매미가 울고 있으니 자연의 섭리는 신기하다.

일이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 사는 일도 항상 힘든 일만 있는 게 아니고 살다가 보면 기쁜 일도 오게 된다. 걷다 보니 우리 동네가 보이니 반갑다. 돈 200원이 모자라 1시간 반을 걸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을 때론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 항상 준비물을 세밀하게 살펴야겠다.

삶이라는 마르지 않는 바다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정말 하찮은 것에서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항상 말만 하면 모든 걸 다 수용해 주는 남편도 어느 날은 세월의 인연이 끓어지면 아득한 곳으로 자취를 감출 수도 있다. 삶은 공식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곁에 없을 때 소중함을 느낀다. 돈 200원도, 항상곁에서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던 남편도 소중하다. 오늘 1시간 30분을 걷고, 힘든 만큼 혼자 사색하고,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 하는 일을 관찰하면서 번뜩이는 글감을 찾아 글을 쓰고 있다. 

항상 결핍과 고통에서 얻어지는 교훈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의 브런치에 실립니다.


태그:#필통, #동전 2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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