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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저녁, 펜싱 남자 선수들의 금메달 세리머니를 기분 좋게 시청하며 딸아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집안이 암흑이 되었습니다. 순간 딸과 저는 얼음이 되었습니다. 평소에 당황이라고는 하지 않던 저였는데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집안벽에 붙어 있는 차단기를 핸드폰 플래시를 이용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차단기가 내려져 있을 경우 다시 올리면 전기가 들어왔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러나 내려져 있는 차단기는 없었습니다. 어 뭐지? 오래된 에어컨이 문제인 건가. 두려웠습니다. 누전, 화재 뭐 이런 단어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창밖의 다른 집은 다 환했습니다. 주방 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주방 쪽에서 보이는 뒷동은 앞동과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두 정전. 우리 아파트 단지는 두 개의 건설사가 지어 분양을 했는데 한쪽 건설회사의 이름을 가진 동만 정전이 된 겁니다. 그 시간이 오후 9시 15분.

'아... 말로만 듣던 정전이 찾아 왔구나... 에어컨을 너무 많이 틀었나... 선풍기는 한 대만 사용할 걸. 전기 인덕션이 문제인 건가.'

정전, 단수... 24시간이 지났다
 
정전 후 놀란 주민들이 휴대폰 불빛을 켜고 있습니다.
 정전 후 놀란 주민들이 휴대폰 불빛을 켜고 있습니다.
ⓒ 최향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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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왜 우리 아파트만? 아휴. 그래 곧 좋아지겠지. 찬물로 샤워나 해야겠다. 수전을 들어올린 순간, 2차 당황. 그렇습니다. 단전은 단수와 함께 온 것입니다. 샤워는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었습니다. 생수를 사러 가야했습니다. 재앙은 꼬리를 물고. 엘리베이터 정지. 핸드폰 방전. 손부채도 없고 요즘 유행하는 손선풍기도 방전 상태.

정신을 차려보자. 일단 더우니 냉동실에 있는 하드라도 먹어보자. 두 개를 흡입했습니다. 단지내 안내 방송도 없고 세상은 고요했습니다. 의외였습니다. 다들 차분하네. 핸드폰만 쳐다보던 가족들이 한 명씩 방전이 되었고 결국 차로 갔습니다. 차는 시원했고 충전도 할 수 있고 음악도 나왔습니다. 

저에게 찾아온 이 당황스러운 상황은 사건발생 24시간을 향해 달려 가고 있으나 아직 진행중입니다. 부천시장이 다녀가고, 음식물 쓰레기통이 추가되고, 쓰레기 봉투가 솔드아웃 되고, 얼음을 사러가고, 대형 온라인 상점에서 냉매를 나눠준다는 문자가 오고 있습니다.

저는 숙소 예약 사이트를 통해 이 상황을 탈출하고자 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을 모시고 갔고, 자녀들은 시댁으로 친정으로 옮겨 갔습니다. 마침 방학중이라 냉장고에는 먹을 것들이 넘쳐납니다. 냉장고. 저걸 어찌할꼬. 앞이 캄캄합니다. 덥고 힘들고 씻을 곳이 없어서 나와 딸은 성당을 같이 다니는 자매님 집으로 탈출했습니다.

남편은 급한대로 공원 화장실에서 볼일을 해결했습니다. 시장에서 얼음을 구입해 일단 냉장고에서 김치와 마늘 얼린 거, 양념들은 탈출시켰습니다. 개봉하지 않은 냉동식품과 두부, 버섯, 오이 등등은 자매님들께 나눴습니다. 펜싱 선수들의 금메달 세리머니와 함께한 나의 막걸리도 자매님 집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도시 난민이 되어 보니 알게 된 것들

갑자기 난민이 되었습니다. 도시 난민. 집도 없고 마실물도 없는 이 상황에서 난민을 떠올렸습니다. 위로의 문자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난민을 만났을 때 생수와 잠자리를 걱정해주고 그들의 이야기라도 들어주는 것이 사소한 일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이 도시 안에서 우리만 어려움을 겪는다는 외로움이 두려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지은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 아파트. 겉모습은 멀쩡하고 최근 집값이 뛰어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도 머물기 힘든, 집의 기능을 상실한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안그래도 팬데믹 상황으로 이래저래 많이 체험하고 있는 요즘이었는데 이런 상황까지 접해보니 쉽게 얻고, 쓰고, 주어지고. 얼마의 돈으로 그 대가를 정당히 치렀다고 생각하고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위기는 평범함 속에 숨어 있습니다. 위기는 순간적으로 찾아 옵니다. 대비하지 않으면 위기는 재앙이라는 이름으로 버무려져 현실로 나타납니다. 위기의 신호를 잘 읽고 대비해야 합니다. 절실히 느끼고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지구가, 사회가 적당히 위기의 신호를 보낼 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동안 너무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반성합니다. 정말 쉽게 살아서 미안합니다.

태그:#아파트정전사태, #해마다, #도시난민, #미안합니다., #당연한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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