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예술체조 여자 단체 결승전에서 미국의 시몬 바일스가 도마 앞에 서있다. 2021.7. 27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예술체조 여자 단체 결승전에서 미국의 시몬 바일스가 도마 앞에 서있다. 2021.7. 27 ⓒ 연합뉴스


미국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Simone Biles)가 "마음과 몸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며 2020 도쿄 올림픽 체조 결선 경기에서 기권하자 미국체조협회와 그를 후원하는 회사, 백악관 대변인 포함한 많은 유명 인사 등이 용기 있는 결정을 했다며 지지했습니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가 결선에서 경기에 기권했는데 오히려 지지하다니. 

시몬 바일스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기계체조 여자 단체전, 개인종합, 도마, 마루운동에서 모두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 때문에 이번 올림픽에서 미국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미국 광고 전문지 <애드위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여자 체조에 가장 많은 관심(59%)을 보였는데 바로 바일스에 대한 기대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바일스가 지난달 27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여자 기계체조 단체전에서 4개 종목 중 한 종목만 뛰고 기권했습니다. 주 종목인 도마에서 13.766점이라는 기대 이하의 점수를 받은 뒤 이단평행봉, 평균대, 마루운동 등 세 종목을 뛰지 않았습니다. 이어 29일 열린 개인종합, 도마, 이단평행봉 등 이미 진출한 개인 종목별 결선 5개 종목 중 3개 종목을 기권했습니다.

세상을 다 얻어도 무슨 소용

바일스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전 운동을 했을 때까진 괜찮았는데 경기장에 와서 멘털이 나가 버렸다. 결국 내 정신 건강에 집중해 나를 위한 결정을 했다."
"무작정 세상이 기대하는 것을 해내려 하기보다 몸과 마음을 보호하겠다." 
"예전만큼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 좀 더 긴장을 하고,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올림픽이고 이게 나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를 바랐는데… (울음)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된 것 같다."

- '완벽' 대신 '기권' 택한 美 체조여왕에게 격려 쏟아졌다, <동아일보>, 2021.07.28

바일스는 이보다 앞서 단체전 예선을 마친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때로 내 어깨 위 세상의 무게를 느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하지만 그게 엄청 힘들 때도 있다. 올림픽은 장난이 아니다!"라고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바일스의 기권이 용기 있다며 지지를 받은 이유는 바로 그가 자신을 위해서 기권을 한다고 당당히 밝혔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기권한 선수들은 많았지만 바일스처럼 나를 위해서 기권한다고 밝힌 선수는 드물었습니다. 특히 바일스가 "세상이 기대하는 것을 해내려 하기보다 몸과 마음을 보호하겠다"라고 한 말은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사느라 힘겨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가수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려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영혼을 잃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때때로 우리의 거절은 우리의 승낙보다 강력합니다. 평소 좋아하던 것이 정작 당신의 기쁨을 빼앗아 가기 시작한다면, 왜 그런지 살펴보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바일스를 격려했습니다.

기권 후인 지난달 29일 바일스가 트위터에 올린 글도 눈길을 끕니다. 

"저는 넘치는 사랑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 경험으로 나 자신이 제가 이룬 성취나 체조 선수 이상의 존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진심으로 자신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올림픽 4관왕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Simone Biles)가 트위터에 남긴 말

미국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Simone Biles)가 트위터에 남긴 말 ⓒ 시몬 바일스 트위터

 
이 글에 대해 관계 코칭을 하는 심하나씨는 오마이뉴스에 쓴 글 <미국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의 용기 있는 기권 http://omn.kr/1uo62>에서 인간의 가치는 기능을 완수하는 데 있지 않고 존재 자체에 있다는 믿음을 보여줬다고 말했습니다. 

바일스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분위기는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미국체조협회와 바일스의 후원사인 카드회사 비자(Visa)와 운동복 회사 애슬레타(Athleta), 단백질 셰이크 업체 코어 파워(Core Power)가 바일스의 기권을 지지하는 성명을 낸 것을 보면 금메달과 국위선양에서 선수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쪽으로 올림픽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래리 나사르 성폭력 사건 뒤 처음 열린 올림픽

바일스는 지난 2018년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체조 주치의 래리 나사르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래리 나사르는 체조팀 주치의로 일하며 선수 등 여성 260여 명에게 성범죄를 저질러 수감 중입니다.

바일스는 미 NBC와 한 인터뷰에서 "나사르의 성폭력으로부터 살아남은 누군가는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잘못된 것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없다면 이 일은 그냥 지나갈 것"이라며 "내가 이곳(체조계)에서 영향력을 가져야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기권한 美 체조영웅 바일스…"주치의 성폭력에 목소리 내려 출전", <중앙일보>).

보통 여자 체조 선수들이 20세에 은퇴를 하는데도 바일스가 24세의 나이로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포함한 성폭력 피해 체조 선수들을 위해 올림픽에 출전한 바일스는 결국 자신을 위해 올림픽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바일스가 지키려 했던 체조 선수들에게도 그의 기권 선언은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바일스는 "내가 공중에 있을 때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었다"(I had no idea where I was in the air)라고 말했습니다. 바일스가 겪은 증상은 '트위스티스(twisties)'로 공중에 있을 때 몸이 어디쯤 있는지 인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체조선수들은 공중에서 비틀기나 뒤집기 같은 동작을 하는데 트위스티스를 겪으면 착지가 불안해져 다칠 위험이 크다고 합니다. 바일스의 이번 기권 선언으로 체조 선수의 몸과 마음을 보호하는 일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는 "이제 정신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Signal New Era of Prioritizing Mental Health)"라고 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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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올림픽 미국 체조 선수 시몬 바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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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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