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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이었다. 내가 취지문 작성 담당자로 정해진 것이다. 쟁쟁한 통일 운동 활동가들이 있는데도 이렇게 된 것은 제안을 한 사람이 실무까지 떠맡게 되는 관행의 연장선이었다. 취지문뿐 아니라 웹자보까지 덩달아 만들게 됐다. 북한 함경남도 곳곳을 폭우가 휩쓸면서 1200여 주택이 침수되고 주민 5000명이 긴급 대피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서다.

사람들이 올라가 있는 지붕까지 물에 잠긴 채 급류에 둥둥 떠가는 사진은 올해 유럽과 중국을 폭우가 휩쓸 때부터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지난해 가장 폭우가 심했던 전남 구례 지역에서도 봤던 모습이다. 지구촌 기상이변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 북한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렵게 남북 통신선이 복구된 시점에서 북녘 동포 돕기는 매우 시의성 있어 보였지만 북녘 동포 돕기에 대한 남한의 부정적 시각이 있는 것 역시 현실이라 간결해야 할 취지문에 이를 어떻게 담아낼지가 고민거리였다. 단순한 수재민 돕기가 아닌데 동포 의식이나 남북 교류, 민족 동질성을 거론하려니 이런 단어는 너무 많이 쓰여서 신선함이 없어 보였다.

취지문과 별도의 웹자보를 만들려고 할 때 번개처럼 머리에 떠오른 게 '기후양심'이었고 곧장 웹자보 제목이 됐다. 기후폭동(기후 위기나 온난화, 기후변동 등의 단어와 달리 기후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단어다) 현상과 대책에 대해 봤던 여러 자료와 이미지가 머리 속에서 순식간에 합성되었다. 서너 시간에 걸쳐 완성된 웹자보의 '기후양심'은 북한 동포 돕기에서 신조어로 등극했다.
 
나라별 땅 넓이와 온실가스 배출
▲ 기후양심 나라별 땅 넓이와 온실가스 배출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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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이 좋았다. 북한 수재민 돕기가 자선이나 시혜가 아니라 기후 악당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의무이자 책임 있는 태도라는 접근이어서다.

웹자보 구성은 이렇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지구 야경 사진이 가장 위에 있다. 유럽과 미국, 중국 동부 지역은 불야성을 이룬다. 한반도 주변 야경도 선명하다. 남한은 전 지역이 휘황찬란하다. 하지만 남한과 중국 사이에 있는 북한은 바다와 꼭 같은 깜깜한 색이다. 아프리카처럼. 섬나라 일본과 한국 사이 바다처럼. 그래서 한국은 완전한 섬나라로 보였다. 이 사진은 어이없게도 북한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조롱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섬나라가 된 야경 한국의 바로 아래에 붙인 사진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기준으로 그린 세계 지도였다. 온실가스 세계 지도에는 아프리카와 남미가 '홀쭉이'로 나온다. 미국과 유럽은 비만에 걸린 듯한 모습이다. 당연히 남북한도 비교가 된다. 남한은 북한보다 땅 면적이 조금 작지만, 온실가스 면적은 두 배가 넘는다.

매년 4.5%씩 증가해 OECD 최고 증가율로 작년에 온실가스 배출 세계 6위를 달성한 대한민국. 이대로라면 2030년에 부동의 1위 미국을 제치고 온실가스 배출 세계 1위를 차지하게 될 대한민국(사단법인 기후변화연구소 발표, 한겨레 5월 10일 보도).

'기후양심' 웹자보는 북한의 물난리에 남한 국민이 어떤 책임이 있는지, 북한 수재민 돕기가 왜 우리의 의무인지를 잘 알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웹자보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양심을 지키자고 호소하고 있다. 작가적 양심, 학자적 양심, 농부적 양심도 있지만 '기후양심'을 지키자고. 자해 문명, 식물복지, 기후폭동 등 내가 만든 신조어인 '기후양심'이 널리 쓰이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남도민일보에도 실립니다.


태그:#기후,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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