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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 사용했던 태극기.
▲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 사용했던 태극기.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 사용했던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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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서울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신익희는 거액의 현상금이 붙고 수사망이 좁혀들자 해외 망명길에 나섰다. 백립(白笠)을 쓴 시골 촌부로 가장하고 국경을 빠져나왔다. 심양을 거쳐 산해관을 넘어 3월 19일 상하이에 무사히 도착했다.

상하이에는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와 신한청년당 핵심인사들을 비롯하여,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이회영 형제, 러시아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국내에서 3ㆍ1혁명의 주역들이 파견한 현순, 일본에서 2ㆍ8독립선언을 주도한 최근우, 미국에서 여운홍 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 보창로 325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렸다. 비용은 국내에서 3ㆍ1혁명 준비기금으로 천도교의 손병희가 기독교 이승훈에게 전한 5천원 중 2천원으로 사무소를 임대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26~27일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할 '최고기관'의 설치 문제를 논의하고, 임시정부 수립절차에 들어갔다. 논의를 거듭하여 먼저 임시의정원을 설립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4월 10일 오후부터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의 셋방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조직체의 성격과 형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정부를 수립하자는 측은 국치 이래 국민의 한결같은 소망은 정부수립에 있다는 주장을 폈고, 다른 측은 위원회나 정당을 먼저 구성하자는 주장이었다. 수직적인 정부가 수립되면 지역ㆍ단체ㆍ이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참여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논란 끝에 결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뜻을 모았다.

국내 각도를 대표하는 29명으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신익희는 경기도를 대표하는 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어서 국호와 연호, 국체, 임시헌장(헌법)이 토론 끝에 제정되었다.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대한민국 원년, 국체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임시헌장을 제정하기 위해 이 분야의 전문성이 인정된 신익희ㆍ이시영ㆍ조소앙 3인으로 기초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대한민국 임시헌장 등이 기초되었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 역사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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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은 밤을 새워 토의를 거듭한 끝에 신익희 등이 기초한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을 심의ㆍ통과시켰다. 국호제정과 관련하여 대한민국ㆍ조선민국ㆍ고려공화국 등이 제안되어 역시 토론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다. '대한'이라는 국호를 둘러싸고 일부 의정원 의원이 망한 대한제국의 국호를 다시 쓸 이유가 있는가를 따지고, 다수 의원들은 망한 대한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와 함께 '한(韓)'이라는 명칭은 삼한 이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이름이라는 사적(史的)고찰이 전개되어 결국 '대한제국'에서 '제(帝)' 자 대신 '민(民)'의 시대를 연다는 뜻에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임시의정원은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 서기 이광수ㆍ백남철을 뽑았다. 임시의정원은 이어서 정부조직을 위한 몇 가지 법제를 제정하고 4월 11일 이를 공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어난 순간이다. 신익희는 임시정부가 태어나는데 골격이 되는 임시헌장 기초 등 법률적 전문성을 크게 발휘하였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때문에 이 때가 대한민국 건국 원년이 된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일을 대한민국 건국절로 삼으려던 이명박ㆍ박근혜 정부의 시도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외면한 처사였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국무총리로 이승만을 선출한데 이어 정부각료를 선임하였다. 신익희는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서리에 임명되었다. 초기 내각 명단이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에 선출된 이승만이 미국에 체류 중이어서 상당기간 내무총장 안창호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신익희는 내무총장 안창호가 5월 25일 미국에서 귀임할 때까지 내무총장 서리를 맡아 설립 초기 임시정부의 관리를 주도했다.

신익희가 조소앙ㆍ이시영과 함께 기초한 대한민국 임시헌장(헌법)은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심의를 거쳐 채택된 전문과 10개조로 된 간략한 내용이었다. 일제병탄 9년 만에 국체와 정체를 민주공화제로 하고, 구 대한제국의 복구가 아니라 민주공화제의 새로운 나라 건국을 내외에 천명한 것은 가히 혁명적이였다. 

놀라운 사실은 일제와 싸우는 전시체제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차를 통치함"(제2조) 이라고 규정하여, 권력분립체제를 분명히 한 대목이다. 여기에는 신익희 등 기초위원들의 역사인식이 크게 작용하였다. 전시체제인데도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이 국정운영의 최고정책결정 기관이 되었다.  

임시헌법은 남녀귀천ㆍ빈부계급이 없는 일체 평등을 명기하고 (제3조), 신교ㆍ언론ㆍ거주이전ㆍ신체ㆍ소유의 자유 (제4조), 선거권과 피선거권 보장 (제5조), 교육ㆍ납세ㆍ병역의무 (제6조),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과 국제연맹가입 (제7조), 구황실 우대 (제8조), 생명형ㆍ신체형ㆍ공창제 폐지 (제9조) 등의 조항을 설치하였다. 

주목할 사실은 제10조에서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하여, 광복 뒤에는 지체하지 않고 국민의 뜻에 따라 국회를 소집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비록 10개 조항에 불과한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지만 근대 민주공화제 헌법의 기본적인 내용은 거의 포함하고 있다. 1919년 봄 상하이에 모인 망명 지사들은 이렇게 민주적인 신념으로 우리나라의 국체의 근간을 민주공화제로 만들었다.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구황실의 예우문제와 같은 봉건적인 잔재가 없지는 않았으나, 헌법을 민주공화제로 만들고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중심제의 절충식을 채택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의 제1차 개헌, 1925년의 제2차 개헌, 1929년의 제3차 개헌, 1940년의 제4차 개헌, 1944년의 제5차 개헌 등 다섯 차례에 걸친 개헌과정에서 민주공화주의의 기본틀을 유지하였다. 임시정부가 채택한 공화제의 민주주의 이념은 8ㆍ15해방이 될 때까지 지속되고, 신생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으로 오롯이 이어졌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약헌(헌법)을 공포하면서 〈정강〉도 함께 공포하였다. 이 문건 역시 3인의 기초위원이 작성한 것이다.

정강(政綱)

1. 민족평등ㆍ국가평등 및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
2. 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함.
3. 일체 정치범을 특사함.
4. 외국에 대한 권리와 의무는 민국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의함.
5. 절대 독립을 서도(誓圖)함.
6. 임시정부의 법령을 위월(違越)하는 자는 적으로 함.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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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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