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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첫째 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둘째 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숙춘.
▲ 임정 국무원 사진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첫째 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둘째 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숙춘.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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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로 선임된 이승만은 오랫 동안 상하이 임지로 오지 않았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서리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신익희는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초기 임정의 주요 업무를 기획하고 집행하였다. 갓 출범한 임시정부는 여러가지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내무총장 안창호는 1919년 7월 10일 국무원령 제1호로 연통제 실시를 발령하였다. 내무총장 관할 아래 서울에 총판, 각도에 독판, 군과 부(府)에는 군감(郡監)과 부장(府長), 면에는 면감(面監)을 두도록 하고, 간도 지방에는 독판부(督瓣府)를 설치하는 내용이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 및 해외 독립운동 상황의 국내전달과 국내에서의 독립자금모집 및 반일활동 지휘 등을 위한 행정연락기구로 활용되었다. 아울러 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에게 20세 이상 남녀 1인당 1원씩의 인구세를 징수하고 독립공채를 발행할 것을 결정, 연통제를 통해 이를 실시토록했다. 

1920년 초에 임시정부와 연결된 국내 비밀조직체가 100개를 넘을 정도로, 연통제와 교통국의 하부조직이 국내에 치밀하게 구성되었다. 특히 중국 단동(安東)에 설치된 아일랜드계 영국인 쇼우가 경영하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은 국내와 연결하는 연통제의 거점이자 지사의 역할을 하였다. 신익희는 이같은 역할 수행에 열과 성을 아끼지 않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 퍼블릭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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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통제와 함께 설치한 것이 교통국의 실시였다. 국내외 주요 거점에 설치된 교통국에는 통신원을 배치하여 정보 수집과 교환, 독립자금 모집과 전달, 물자와 무기 운반 등을 맡게 하였다. 임시정부의 선전과 홍보를 위한 지역적 연결망이었다. <독립신문>과 임시정부의 <관보> 및 법령과 포고문 등이 교통국을 통해 국내외에 배포되고, 부산 백산상회 등 비밀조직에서 모금된 독립자금도 이 조직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되었다. 

임시정부 초기의 시정방략은 1. 군사, 2. 외교, 3. 교육, 4. 사법, 5. 재정, 6. 통일이 여섯가지 핵심 정책이다. 안창호가 1920년 1월 3일과 5일, 상해 교포들의 신년축하회에서, 이틀에 걸쳐 5시간 동안 연설하면서 제시한 내용이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던 무렵에 선택한 독립운동 방략은 1920년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가 밝힌 여섯가지 방략으로 요약된다. 군사ㆍ통일 외교ㆍ교육ㆍ사법ㆍ재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군사와 외교가 독립운동의 절대적인 수단과 방법이라고 주장한 그는 가장 먼저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면서, 교육과 재정도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기반이라고 역설했다. (주석 1)

임시정부는 1920년초 이 해를 '독립전쟁의 해'로 설정하고 1월 13일 러시아ㆍ만주지역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무원 포고 제1호〉를 발령했다. 이 지역 동포들에게 더욱 분발을 촉구하면서, 1920년을 '독립전쟁의 제1년'이라고 규정하는 내용을 설명하였다.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해'로 설정한 1920년에는 만주에서 6월의 봉오동전투, 10월의 청산리전투가 벌어지고, 우리 독립군들은 열악한 무기와 비정규 병력으로 일제의 현대 병기로 무장한 정규부대와 싸워 이를 섬멸하는 대첩을 이루었다. 

3ㆍ1혁명 이후 만주에서는 각급 독립군 조직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대한국민회,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47개 단체가 등장했다. 이 가운데  앞의 3 단체를 비롯하여 대한청년연합회, 대한광복군총영, 대한독립군한족회, 대한독립단, 보합단 등 유력한 독립군 조직들은 임시정부 계열이거나,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나선 단체들이다.
 
독립신문.
 독립신문.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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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는 홍보사업에도 열중하였다. <독립신문>의 발행이다. 1919년 8월 21일 임시정부 기관지로 창간된 이 신문은 초기에 <독립>이라는 제호로 발간하다가 그 해 10월부터 <독립신문>으로 개제하였다. 창간사에서 ① 독립사상 고취와 민심통일 ② 독립 사업과 사상전파 ③ 유력한 여론을 환기하고 정부를 독려하여 국민의 사상ㆍ행동방향 제시 ④ 새로운 학설과 새로운 사상 소개 ⑤ 국사(國史)와 국민정신의 고취ㆍ개조를 제시하였다.

창간 당시의 시장 겸 편집국장은 이광수였다. 이광수는 2ㆍ8독립선언서를 집필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초창기 임시정부는 이념논쟁과 파벌대립 등 여러 가지 분란 속에서도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임시정부는 또한 독립운동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관보인 <공보(公報)>와 각종 법령, 포고문 등을 국내로 보냈다. 국내로 보내진 대표적인 법령과 포고령에는 1919년 4월 15일 국무원령 제1호 〈통유문〉, 6월 15일 재무부령 제1호인 〈인구세시행세칙〉, 6월 16일 정부령 제3호 〈임시징세령〉, 7월 10일 국무원령 제1호 〈연통제〉, 9월 30일 포고 〈적의 관공리인 동포에게〉, 10월 15일 포고 〈천주교 동포에게〉,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남녀학생에게〉, 11월 20일 포고 〈적의 관공리인 자에게〉, 12월 5일 내무부령 제2호 〈도사무공장규정(道事務公掌規程)〉, 12월 18일 군무부령 제1호 〈임시군사주비단제〉 등이 초기에 집중되었다. (주석 2)

임시정부는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결의와 탄핵이 추진되면서 크게 동력을 잃게 되었다. 정부수립 1년 반 만인 1920년 12월 5일 상하이에 온 이승만은 여전히 실효성 없는 외교론 외에 아무런 비전도 방략도 제시하지 못했다. 더욱이 임시정부의 분란 해소는커녕 갈등을 부채질하고 이동휘와는 사이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승만은 재임기간 5년 6개월 가운데 6개월 동안만 상해에 머물다가 1921년 6월 태평양평화회의에 참석한다는 구실로 다시 하와이로 돌아갔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업무는 도외시하였다. 

임시정부를 지탱하던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해 국내에서 들어오던 독립자금이 1920년에 일제의 정보망에 두 기관이 포착되면서 완전히 차단되고, 여기에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미주지역 동포들의 성금을 임시정부에 보내지 않음으로써 재정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인력과 자금이 줄어들면서 임시정부는 의정원 정원의 의원을 채우기도 어렵게 되고, 정부청사의 전세값과 중국인 직원들의 임금도 밀리기 일쑤였다. 1919년 가을부터 이승만의 위임통치설을 빌미로 임시정부에 대한 반대세력이 형성되고, 1921년 2월에는 박은식ㆍ원세훈ㆍ김창숙 등 14인이 〈아 동포에게 고함〉이란 성명을 통해 임시정부의 무능과 분열을 비판하면서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강력한 통일정부를 조직하고, 무장독립전쟁을 위해 독립군부대를 통합, 지휘계통을 통일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조완구ㆍ윤기섭 등 45명은 이승만의 절대지지를 표방하면서 협성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북경에 머물고 있던 신채호ㆍ박용만ㆍ신숙 등이 1920년 9월 군사통일촉성회를 열고 이승만의 상하이임시정부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홍범도가 이끈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재중국 동포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하고 떠난 행적은 임시정부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가 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거나 독립운동계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갈등만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승만ㆍ이동휘ㆍ안창호 삼각 구도 사이에 타협을 향한 노력들이 있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사이에 박은식이 대표가 된 선언을 비롯하여, 북경의 군사통일주비회와 만주 액목현회의가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주석 3)


주석
1> 《독립신문》, 1920년 1월 8일치,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1-상해시기》, 108~109쪽, 독립기념관, 2008.
2> 김희곤, 앞의 책, 116~117쪽.
3> 앞의 책, 17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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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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