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18 10:45최종 업데이트 21.08.1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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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서거 12주기가 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는 1997년 12월의 평화적 정권교체다. 단순한 여야 정권교체가 아니었다. 탄압을 받아온 세력과 탄압을 해온 세력 간의 교체였다. 그런 정권교체가 유혈혁명이나 시민혁명 또는 정변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화적 선거에 의해 실현됐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0년 전인 1987년 6월항쟁 이후로 꾸준히 성장한 한국민들의 민주주의 역량에 일차적으로 기인했지만, 구세력 일부를 끌어들인 김대중-김종필의 DJP 연대에도 적지 않게 기인했다. DJ와 JP가 하나로 되는 이 연대에 힘입어 김대중은 보수층 유권자 일부의 지지를 받아내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이 연대의 성사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대중 지지층에서도 반발이 많았다. 하지만 김대중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은 "나는 이런 반발에 (대해) '색깔론 망령'과 3당 합당 이후 강화된 호남 고립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자민련과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며 "특히 6월항쟁 이후 반독재 민주화라는 전선이 이완되고 3당 합당으로 구축됐던 반호남 구도가 자민련의 창당으로 그 일각이 붕괴됐음을 상기시켰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반민주 대 민주' 구도가 많이 이완됐을 뿐 아니라 보수세력이 6월항쟁에 역공을 가하고자 만들어놓은 1990년 3당 합당 구도로부터 김종필이 이탈해 나왔다는 점을 김대중은 상기시켰다.

한 편의 반전 드라마
 

지난 1963년 1월 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 ⓒ 연합뉴스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뭉침으로써 호남권에 기반을 둔 평화민주당(평민당)이 소외되는 호남 고립 구도가 형성됐지만, 김종필이 민자당을 나오면서 그 구도 일각을 붕괴시킨 점을 높이 평가해주자고 김대중은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김대중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권교체"라며 DJP 연대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3김'이라고 할 때는 김종필을 포함하지만 '양김'이라고 할 때는 김종필을 제외한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민주화투쟁을 함께한 기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3김 정치가 본격화된 6월항쟁 이후에 김종필의 위상이 김대중·김영삼에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김대중의 정치 역정에서는 김영삼보다 김종필이 더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을 돕기보다는 견제하는 일이 더 많았던 김영삼에 비해, 김종필은 김대중을 탄압하는 쪽에 있었지만 1997년에는 결정적인 조력을 제공했다.

김종필은 김대중의 민주화투쟁이 평화적 정권교체로 결실을 맺는 결정적 순간에 김대중과 함께했다. 한때는 김대중을 탄압하는 쪽에 있었고 한때는 김대중과 경쟁하는 쪽에 있었던 김종필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김대중의 승리를 도왔으니, 두 사람의 관계는 한 편의 반전 드라마 같았다고 말할 수 있다.

구세력의 일원이었던 김종필이 김대중을 돕게 된 근본 원인은 김종필과 군부독재세력의 갈등에서 찾을 수 있다. 김영삼 정권(1993~1997년) 중반에 김종필이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결성하기 훨씬 전부터 DJP 연대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공화당(공화당) 내에서 박정희 독재에 경계심이 본격 표출된 것은 1969년 3선 개헌 때였다. 김종필은 결국에는 찬동했지만 처음에는 격렬히 반대했다. 박정희 최측근 그룹의 집요한 견제에 염증을 느껴 1968년 6월 공화당 의장직을 사임하고 탈당한 뒤 야인 생활을 하고 있던 김종필은 당 지도부가 1969년 1월부터 개헌 필요성을 운운하기 시작하자 다음 달부터 3선 개헌 반대에 나섰다.

<김종필 증언록> 제1권은 김종필이 2월 하순에 공화당 의원들을 접촉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 '이 나라의 민주정치와 박 대통령을 위해서도 3선 개헌은 반대한다'는 강한 소신을 밝혔다"며 "당적 없는 야인이라 해도 나의 이러한 입장 표시에 당내 개헌반대 세력들은 힘을 얻었다"고 자평한다.

실제로 공화당 내에서는 박정희의 영향력이 흔들렸다. 1969년 4월 8일에는 야당이 제출한 권오병 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에 대해 공화당 의원 40명 이상이 찬성표를 던져 해임이 가결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4·8 항명 사태).

3선 개헌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이런 상황 속에서 박정희는 김종필 설득에 나섰고, 이 설득이 주효해 김종필은 결국 반대 의사를 접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17일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했다.

박정희-김종필 갈등

하지만, 이것으로 김종필과 박정희의 갈등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5·16 쿠데타 2인자와 1인자인 그들 사이의 불신이 이만저만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3선 개헌 6년 전부터 박정희(육사 2기)는 5·16 주체 세력인 육사 5기 및 8기(김종필 포함)를 견제할 목적으로 육사 11기 전두환을 움직여 군부 사조직 하나회를 은밀히 확장시켰다.

김종필 역시 박정희의 경계심을 잘 알고 있었다. 위 증언록에 따르면, 공화당 탈당계가 처리된 1968년 6월 3일 그가 청와대에 가서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라며 크게 고함친 것도 자신을 견제하는 박정희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결과였다.

나세르 운운은 1952년 이집트혁명 당시에는 2인자였다가 얼마 뒤 1인자로 올라선 가말 압델 나세르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김종필 자신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증언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김종필은 나세르의 집권 과정을 '친절하게' 설명한 뒤 "제가 그런 사람인 줄 아십니까?"라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박정희의 입에서 잠시 뒤 나온 한마디는 "난 임자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가 아니었다. 그의 대답은 "그럴 수도 있지 뭐"였다.

이 말에 김종필은 더 허탈해졌다. 이 말의 2가지 의미에 관해 김종필은 "하나는 '네가 나세르처럼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러니 내가 너를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김종필 너도 그런 마음을 품었을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러니 나 역시 그런 너를 경계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느냐는 의미로 김종필은 이해했던 것이다.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에 대해 "그럴 수도 있지 뭐"라는 대화가 오고간 두 사람의 감정적 관계는 치유되지 않았다. 김종필은 겉으로는 2인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박정희 최측근 그룹의 견제를 받으며 청와대와 멀어져 갔다. 3선 개헌에 이어 1972년 출범한 유신체제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에 대한 박정희의 박해가 극심했던 그 시절, 박 정권 내부에서는 2인자 김종필이 박정희로부터 버림 받아 심정적 고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것이 심정적 문제로 그치지 않고 정치적 소외로까지 연결됐다는 점은, 박정희 최측근 그룹이 일거에 와해된 1979년 10·26 사태 직후에도 김종필이 상황을 전혀 장악하지 못한 사실에서 재차 증명됐다. 김종필은 최측근 그룹이기보다는 2진급이었던 전두환·노태우·정호용에까지 밀리다가 1980년 5·17 쿠데타 및 5·18 때 김대중과 함께 탄압을 받는 동병상련의 처지로 내몰렸다. 박정희에게 버림받은 김종필이 이번에는 후배들에게까지 내쳐짐을 당한 것이다.

야당 지도자로 변신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왼쪽)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97년 10월 문화일보사에서 열린 대선후보 토론회에 참석,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10·26 직후에 김종필은 김대중·김영삼과 함께 3김으로 거론되면서 유력 대선 주자로 부각됐지만, 이 경쟁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김종필은 후배 군인들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재산이 국고에 들어가는 수난을 겪었다. 김대중보다는 훨씬 덜했지만, 김종필 역시 정권의 탄압을 받는 처지로 내몰린 것이다.

증언록 제2권에서 김종필은 "5·17은 국민의 지지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정권 찬탈일 뿐이었다", "5·18은 부조리로 시작한 정권의 필연적 코스였다"라고 썼다. 민주화세력이 전두환을 바라보는 것과 약간 비슷한 시각으로 김종필도 전두환을 바라본 것이다.

이런 정서는 6월항쟁 이후에 김종필이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민정당)에 맞서 신민주공화당을 결성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후배 그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김종필을 김대중 같은 야당 지도자로 변신시킨 것이다. 이때부터 김종필은 김대중·김영삼과 본격적인 경쟁관계를 이루면서 실질적인 3김 시대를 열어나갔다.

박정희·김종필에게 기원을 두는 구 군부세력과 전두한·노태우가 주축인 신 군부세력의 악연은 1990년 3당 합당으로도 치유되지 않았다. 민정당·통일민주당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결성했던 김종필과 구 군부세력은 1995년 1월에 탈당하고 3월에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이 상황은 1997년 10월 27일 DJP 단일화 합의로 이어지고 김대중이 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성사시키는 단계로 이어졌다.

김대중을 탄압하는 쪽에 섰던 적도 있고,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인 적도 있고 야당 지도자로 경쟁한 적도 있었던 김종필은 결국에는 김대중의 승리를 돕는 동지 역할을 수행했다. 집권 및 공동정권 수립 뒤에 다시 갈라서기는 했지만, 한때 김대중의 경쟁자였던 김종필은 결정적 순간에는 화려한 조연이 되어 김대중의 승리를 도왔다.

김대중의 1997년 대선 승리는 한국 민주주의가 그만큼 성장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동시에, 김종필이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에게까지 배척을 당하는 군부세력 내부의 분열과 갈등에도 적지 않게 기인했다. 김종필의 동지 그룹과 후배 그룹이 그를 밀어내는 과정은 그가 김대중의 화려한 조연으로 거듭나도록 만드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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