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사 수정 : 2021년 9월 7일 낮 12시 2분]

지난 13일, 서울행정법원 지하2층 B220호에서 '고문가해자 서훈취소 정보공개 청구 소송'(정보공개거부처분 취소 행정소송, 재판부 : 서울행정법원 제1부) 변론기일이 진행됐다. 원고는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 피고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다. 이날 변론기일에서 피고 행정안전부는 '대한민국의 안전과 재난에 관한 정책의 수립·총괄·조정'한다는 본래 취지에 걸맞지 않은 변론 수준을 보였다.

가해자는 가리고, 피해자는 드러내고
 
지난 2018년 7월 10일, 행정안전부가 배포한 "80년대 간첩조작사건 관련자 등 서훈 대대적 취소" 보도자료.
 지난 2018년 7월 10일, 행정안전부가 배포한 "80년대 간첩조작사건 관련자 등 서훈 대대적 취소" 보도자료.
ⓒ 행정안전부 보도자료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소송의 시작은 2018년 행정안전부가 스스로 내놓은 보도자료에서 비롯됐다. 2018년 행정안전부는 "80년대 간첩조작사건 관련자 등 서훈 대대적 취소"를 발표한다. 이 보도자료에 따르면, 1980년대 대한민국 정부는 범죄 혐의가 없는 일반 시민을 불법 구금하고 고문해 사형까지 조작해 낸 국가 공무원에게 대통령 표창 17점, 국무총리 표창 14점을 비롯해 총 56개의 서훈을 수여했다.

당시 힘 없는 시민을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만들었던 고문 가해자들은 특진 등 수많은 혜택을 누렸다. 2018년 행정안전부는 이를 시인한 셈이다.

그러나 서훈 취소 소식을 발표하면서 행정안전부는 고문 피해자들의 이름을 버젓이 보도자료에 담아 세상에 공개했다. 하지만 정작 서훈이 취소된 고문 가해자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에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는 2019년 3월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해 2019년 7월 승소했다.

이 같은 재판 결과에도 불구하고 행정안전부는 고문 가해자의 이름이 '국가안보'라는 이유를 들어 공개를 거부했다. 그러자 인권의학연구소는 지난해 10월 2차 행정소송을 제기해 진행 중이다. 

고문 가해자 이름이 '국가안보'?

행정안전부가 지속적으로 고문 가해자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고(인권의학연구소) 측 변호를 담당하고 있는 법무법인 덕수의 김성주 변호사에 따르면 행정안전부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하나는 현재 행정안전부는 유관 정부부처인 국정원이 고문 가해자의 이름 공개를 반대하고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정보공개법에 근거해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다는 점 때문에 고문 가해자의 이름과 서훈 취소 사유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피고 측 행정안전부를 대표해 이날 변론기일에 참석한 담당 사무관은 '행정안전부는 2018년 서훈을 취소하는 과정에서 관련 부처인 경찰청, 국정원, 국방부, 보건복지부와 지속적인 논의를 거쳤으나 이 부처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고문 가해자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경찰청과 국정원의 주장은 당시 대공수사를 담당했던 국가기관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은 국가기밀인 동시에 국가안보에 해당하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재판 후 인터뷰에서 담당 사무관은 이번 소송의 핵심 쟁점을 '피해자의 권익보호와 국가안보가 부딪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타 부처의 상황과 논리가 존재하는 한 행정안전부도 어려운 형국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행정안전부는 1970, 1980년대 국가기관의 고문을 인정하면서도 고문피해자의 권익보호보다는 고문가해자의 사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과 법리적 주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고문피해자들의 경우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행정안전부, 재판 준비는 제대로 했나

이 같은 법리적 인식과 함께 이날 행정안전부는 중앙행정기관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모습을 재판 과정에서 보여줬다. 이 소송은 원래 7월 2일 선고가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재판부가 피고와 원고 측에 추가 자료를 요청하면서 변론재개 결정을 내렸다. 이에 행정안전부는 재판부에 추가 자료를 제출했고, 이 자료를 기반으로 재판부는 이날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날 재판은 제출된 자료의 내용에 근거하여 법리적 다툼이 아니라 행정안전부가 제출한 자료를 확인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 이유는 행정안전부가 제출한 자료 목록 중에서 자료 제목과 실제 제출된 자료의 이름이 다르거나 아예 누락된 부분들이 있어 재판부가 제대로 검토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행정안전부는 원고 측이 요청한 세부 품목에 대해선 제출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재판부가 계속해서 자료에 대해 질의하자 행정안전부 측은 '오늘 재판에 제출하기 위해 USB에 담아왔다'고 답변했다.

방청석에 앉아 하늘만 쳐다본 고문피해자들
 
지난 13일 서울 행정법원에서 열린 행정소송에 참여한 피해자들과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왼쪽에서 세 번째), 법무법인 덕수의 김성주 변호사(왼쪽 첫 번째).
▲ 행정소송에 참여한 고문피해자들 지난 13일 서울 행정법원에서 열린 행정소송에 참여한 피해자들과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왼쪽에서 세 번째), 법무법인 덕수의 김성주 변호사(왼쪽 첫 번째).
ⓒ 박민중

관련사진보기

 
결국 재판부는 피고에게 다음 기일 전까지 재차 자료 목록을 확인해서 정확하게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이날 변론기일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방청석에는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보도자료의 고문피해자들이 있었다. 선고를 기대하고 왔던 고문피해자들은 행정안전부의 말을 들으며 하늘만 쳐다봤다. 변론기일 후 만난 한 피해자는 "너무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바뀌고,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나를 고문했던 가해자의 이름 하나도 밝히지 못하는 행정안전부를 보면서 나는 또다시 힘이 없는 민초라는 점만 인식하게 됐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그냥 이것이 내 팔자인가 보다" 하고 스스로 위로하기로 다짐했다고 밝혔다.

과연 고문가해자의 사생활보다 고문피해자의 인권이 우선시 되는 판결이 나올까. 다음 변론기일은 10월 8일 오후 2시 30분에 예정돼 있다.

태그:#행정안전부, #고문가해자, #서훈취소, #행정소송, #고문피해자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름은 박민중입니다. 생일은 3.1절입니다.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