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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찬투'의 북상 소식은 수확을 앞둔 농작물을 거둬야 하는 농부들의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다행히도 나는 여름의 마지막 작물로 고추를 수확했지만 말리기까지는 나름 고생을 했다. 어른들 표현에 고추를 세물(세 번)이나 따면서, 태양 빛에도 내어보고, 건조기의 힘도 빌려보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전기 장판의 열까지 활용하면서 고추를 말렸다.

해마다 김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고춧가루인 줄 잘 알고 있었지만, 올해 처음으로 고추심기부터 고춧가루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육십이 코앞인 내 평생 처음이어서 느낌이 남달랐다. 지난주까지 말린 고추를 모아서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비닐에 보관했었다. 오늘은 고춧가루로 만들기 위해, 방앗간을 찾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10근이나요? 그러면 정말 좋지요!"
 
정성들여 말린 고추가 드디어 방앗간에서 고추가루로 재탄생, 무려 11근이나 나왔습니다.
▲ 올봄 심은 고추모가 고추가루로 되었어요 정성들여 말린 고추가 드디어 방앗간에서 고추가루로 재탄생, 무려 11근이나 나왔습니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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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년 전까지만 해도 친정골목길에 있던 OO방앗간에 가면 명절 때 떡은 기본이고, 고춧가루 만들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주인아저씨가 아프다고 가게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더니, 마침내 가게의 종료를 알리는 안내장이 붙었다. 동네사람들은 아저씨의 발병에 안타까워했고 50년이 넘도록 돌아간 쌀방앗간의 기계들과 작별을 했다.

오늘 고춧가루를 만들어야겠다고 하니, 친정엄마는 전통시장의 OO방앗간으로 가라고 했다. 김장용으로 쓸 거니 너무 곱게 갈아도 안 되고, 너무 거칠게 갈아도 안 된다고 꼭 말하라고 했다. 사실, 어느 정도가 김장용이고, 고추장용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엄마의 말만 전하고 방앗간 주인장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고추를 들어보니, 무게가 제법 무거웠다. 정확한 무게 단위는 몰랐지만 최소 10근(6kg)은 되었으면 했다. 김장하실 때 엄마가 주문하는 고추 양을 알고 있었기에, 최소한 내 김장을 하려면 이 정도는 있어야 했다. 지난주에 심은 배추 100여 포기를 잘 길러서 고춧가루와 함께 올해 친정집 김장 재료로 선물할 예정이었다.

방앗간의 입구에 할머니들이 계셔서 들어가면서 물어보았다.

"저 고춧가루 만들려고 왔는데요, 여기서 하나요?"
"고추 빻을려고? 당연히 하지. 저기 주인 나오네. 방송에도 나온 유명한 사람이여."
"아, 그래요? 어떻게 유명하신 분인데요? 고춧가루를 잘 만들어 주시나봐요."
"고추가루는 말할 것도 없고, 들기름 참기름 짜는 기술자여. 저기 상표를 봐."


체구가 작은 아저씨가 나오더니, 가져온 고추를 달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묻지도 않는 말을 열심히 설명했다. 취미로 텃밭을 하는데, 거기서 나온 고추라고, 김장할 거니까 가루로 잘 좀 만들어 달라고, 청양고추랑 외고추랑 섞어서 해달라고 했다. 고추는 말리기가 힘든데 잘 말렸다고 한 10근은 넘겠다고 말했다. 10근이나요? 그러면 정말 좋지요!

오랜만에 고춧가루 분쇄기계로 들어가는 고추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재채기가 나왔다. 옆에 있던 할머니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젊은 사람이 고추 농사를 어떻게 지었냐고 물었다. 우리 부부도 적지 않은 나이인데 노령의 할머니들 앞에 서면 어느새 어린애 같은 자세로 바꿔지고 칭찬해주는 분들 덕분에 어깨가 으쓱해져서 열심히 텃밭 얘기를 했다.

고춧가루 분쇄기에 들어간 고추는 신기하게도 고추씨가 별도로 나왔다. 마치 캥거루 앞주머니처럼 생긴 부속품 속으로 고추 씨앗이 떨어졌다. 고추씨의 용도를 물으니 고추씨 기름으로도 쓰고, 특히 짬뽕을 만들 때 "아주 최고"라는 답을 들었다. 그런데 내가 가져가도 되냐고 물으니, 일반 집에서는 가져가봤자 필요도 없다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돌아왔는데, 친정엄마한테 혼만 났다. 당연히 챙겨와야지, 그냥 왔다고.

고추는 3가지 종류의 분쇄기를 통해 대 여섯 번 정도의 빻기 과정을 거쳐서 고운가루로 나왔다. 올봄 4월에 고추모를 심을 때 상상했던 고춧가루의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6개월간, 우리 부부의 땀과 수고 그리고 기다림의 댓가를 모두 담고 나와서 고생했다고 격려해주는 생물 같았다. 빻는 데 든 비용도 7000원 밖에 되지 않아서 주인장 아저씨의 작품이라는 들기름과 참기름을 샀다.

도구에 고스란히 남은 주인장의 손자국 
 
참기름 들기름을 볶는 솥단지에 놓인 도구 손잡이에 새겨진 주인장의 손가락 자국이 경이롭다
▲ 방앗간 주인장의 손과 장인정신 참기름 들기름을 볶는 솥단지에 놓인 도구 손잡이에 새겨진 주인장의 손가락 자국이 경이롭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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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을 사는데 옆에 놓은 네모난 도구 하나가 있길래 물어보니까, 주인장이 기름을 볶을 때 쓰는 거라고 했다. 도구의 손잡이 쪽에 난 자국이 이상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으니, 한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그거는 이 주인장 손가락 모양이네. 참깨와 들깨로 기름을 짤 때, 그걸로 떠서 솥단지에 넣는데 그때마다 단지의 열기로 새겨진 거라는 고만."
"아저씨 손가락 모양이라구요? 세상에나."


그제서야 벽에 걸린 방앗간의 역사 얘기를 읽어보았다. '구시장 길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열어 고소한 냄새를 골목 가득 채웁니다.' 깨를 담는 도구에 찍힌 아저씨의 손가락 모양을 보며 주인장의 장인 정신에 감탄을 보냈다.

추석이 다가온다. 올해도 만남을 절제해야 하는 명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 곳곳에 참기름 들기름 냄새가 퍼진다. 사과, 배 등 과일 상자를 쌓아놓은 상인, 생선과 각종 나물을 펼쳐놓고 손짓하는 상인들은 오고 가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기 바쁘다.

시장을 돌면서 비록 풍성한 추석 모임은 못할지라도, 이왕이면 전통시장으로의 발걸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추석 명절 상에 올라갈 음식을 준비할 엄마 생각에 기름 두 개를 챙겨서 보내드렸다. 

태그:#고춧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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