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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무라씨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청년이다. 현재 국적은 일본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 대학에서 작업 중인 츠무라씨 츠무라씨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청년이다. 현재 국적은 일본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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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츠무라 아키라(津村耀, 가명)씨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다. '김주현.' 그가 출생 직후부터 갖고 있던 한국 이름이다.

재일코리안(재일한국-조선인)들 중 일본 이름과는 별도로 이른바 한국(조선)식 민족명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지만, 츠무라씨가 김주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경위는 이 경우와 조금 다르다. '김주현'은 어떤 민족적 긍지나 정체성을 간직하고자 지어진 이름이 아닌, 그가 생애 전반부에 '당연하게' 사용해왔던 이름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주변의 가족들과 친구들 또한 그를 김주현으로 불렀다. 그 시절 그는 스스로를 '츠무라'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츠무라 아키라는 그저 서류상의 이름일 뿐이었어요."

츠무라씨, 아니, 김주현씨는 한국의 또래 아이들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밟았던 평범한 아이였다. 남들처럼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녔고, 국민의례가 있을 때면 주변 친구들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의 가사를 외우지 않고 있다는 지금의 그를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그때의 그는 아주 '일반적'인 한국인이었다. 일반적인 한국인으로서의 삶 속에서 균열을 잉태하고 있던 요인은 단 한 가지. 그의 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아버지는 외교 관련 업무로 한국에 오셔서 정착하게 됐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 일본어를 가르쳐주긴 했지만,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 일본 혈통이라는 자각은 거의 하지 못했죠."

츠무라라는 이름은 그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김주현씨의 삶 속에 등장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법적으로 공인된 실명을 사용해야 했다. 서류 속에 잠들어있던 '츠무라'는 그렇게 그의 명찰에 새겨졌다. 그를 '김주현'으로 알고 있던 소꿉친구들은 그의 명찰에 새겨진 낯선 이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제가 주변 친구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됐어요. 누가 봐도 한국인이 아닌 '이상한' 이름에 중학교 친구들은 '왜 이름이 그 모양인지' 물어왔죠. 제가 가진 여권이 다른 한국애들과는 다르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됐어요."

갑자기 주어진 일본식 이름... 점점 멀어진 아버지와의 관계
 
스스로를 '한국인 김주현'으로 생각했던 츠무라씨는 갑자기 주어진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당혹스러웠다.
▲ 친구들과는 달랐던 츠무라씨의 여권 스스로를 "한국인 김주현"으로 생각했던 츠무라씨는 갑자기 주어진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당혹스러웠다.
ⓒ 츠무라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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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한국 이름이 일본 이름으로 대체되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다. 갑자기 주어진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사춘기 시절의 그에게 큰 혼란을 줬다. 때로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특히나 그 즈음 독도 영유권 문제로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츠무라씨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역사 수업은 지금의 그에게 거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수업이 사실상 츠무라씨를 중심으로 전개됐던 까닭이다. 선생님은 항상 그를 주시했고, 일본 관련 내용이 언급될 때마다 츠무라씨의 의견을 학우들에게 발표시켰다. 식민통치기의 조선총독부 정책에서부터 아베 총리 같은 일본 정치인들의 행보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관련된 모든 현안에 그의 입장표명이 요구됐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인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던 츠무라씨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학교 생활 중에 항상 반복되던 이같은 부담으로 인해 츠무라씨는 큰 스트레스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수업에 잘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수능 때도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골라 만점을 받았을 정도로 츠무라씨는 한국 교육과정이 요구하는 한국사 학습에 통달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열리는 역사 관련 백일장의 금상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러나 한국식으로 빚어진 그의 역사관은 또다른 갈등을 낳았다.

"아버지께서는, 굳이 한국식 표현에 따른다면 '일본 극우'에 해당하는 역사관을 갖고 계시거든요. 한국 학교에서 이뤄지는 역사 교육 내용에 아버지는 동의할 수 없을 때가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역사나 정치 문제로 항상 아버지와 언쟁을 벌였지요."

갑자기 주어진 정체성의 혼란, 주변의 부담스러운 시선, 역사 교육 스트레스 속에서, 츠무라씨와 아버지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갔다. 어느 날, 츠무라씨는 아버지께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나는 내가 일본 혈통이라는 게 부끄러워!"

그의 아버지는 격노했다. '너를 태어나게 해주고 키워준 부모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울화를 쏟아내는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렇게 단절됐다. 츠무라씨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사춘기 시절의 자존심 때문인지 당시에는 끝내 아버지께 사과하지는 못했다. 츠무라씨는 성인이 되고 나서 정식으로 아버지께 용서를 구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던' 그때의 일은 지금도 후회로 남아 있다.

지병이 있던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던 것도 츠무라씨가 성인이 됐을 즈음의 일이다. 츠무라씨는 아버지가 이제 고국에서 편히 지내셔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능하다면 가까이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싶었다. 한국에서 만족스러운 대입 과정까지 치렀던 츠무라씨는 결국 일본행을 결심하고 대학을 자퇴했다. 츠무라씨는 그렇게 한국에서의 생활을 뒤로 하고 서류상 조국이었던, 그에게는 낯설던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행... 실소하던 일본 교수들 "한일관계 기여? 그게 가능할까"

일본에서 다시 대입을 준비하던 때, 그는 파탄난 한일관계에 어떻게든 기여해 보고 싶다는 희망으로 정치외교 관련 학과에 문을 두드렸다. 여러 입시 과정들을 마치고 면접에까지 다다랐던 그는 면접관으로 나온 교수들에게 스스로의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원동기로 한일관계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하니 면접관들이 실소를 머금으면서 '그래? 근데 그게 가능할까?' 하고 반문하더라고요. 한일 외교의 최전선에서 잔뼈가 굵으셨을 그분들조차도 한일관계 개선을 꿈 같은 이야기로 치부하는 게 너무 충격이었어요. 이렇게나 상황이 극단적인 것일까, 정말 한일관계에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낙담했습니다."

면접 당시로부터 수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한일관계 전망은 여전히 암울해 보인다. 츠무라씨는 일본에서의 혐한, 한국에서의 혐일을 비교해서 평가하며 한숨을 쉬었다.

"일본 사회에 뿌리내린 한국에 대한 편견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죠. 한국인들이나 재일교포들에 의한 범죄를 가지고 전체를 일반화하는 일본인들은 지금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과격하게 표출되다 보니 그게 일본인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한일 사이에 놓인 감정의 골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으니 정말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한일관계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간직하고 있다. 한일관계는, 어머니의 나라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며 동시에 아버지의 나라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넘어 양국의 건설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학생 츠무라, 김주현씨가 품고 있는 꿈이다.
 
츠무라씨에게 있어 일본이 아버지의 나라라면, 한국은 어머니의 나라이며 친구들의 나라이다. 지금도 츠무라씨는 한국의 고향을 그리워한다.
▲ 초등학교 시절 츠무라씨의 생일잔치에 모인 한국인 친구들 츠무라씨에게 있어 일본이 아버지의 나라라면, 한국은 어머니의 나라이며 친구들의 나라이다. 지금도 츠무라씨는 한국의 고향을 그리워한다.
ⓒ 츠무라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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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다문화, #한일관계, #일본, #정체성,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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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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